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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게임 30년 역사에 큰 이정표를 제시했던 [악튜러스]>



과거 한국게임은 일본게임의 그늘 밑에 있었다. 초창기 국산 게임을 개발해 왔던 크리에이터들도 대부분 일본게임에 열광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파이널판타지], [드래곤퀘스트], [이스] 같은 일본산 RPG에서 감명을 받고 게임인생을 택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한국게임의 정신적 뿌리는 일본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일본게임에 열광할수록 한국 개발자들이 느끼는 공허함은 커졌다. 특히 RPG 부분에서 이런 푸념이 심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일본RPG와의 격차를 줄일 수 없었다. 유저들도 두 나라 게임들을 비교해 가며 한국RPG의 수준을 폄하하곤 했다.

그런데 역사는 참 아이러니하다. 수준 이하라고 평가받던 한국RPG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악튜러스]와 [라그나로크]로 이어지는 한국RPG의 계보는 일본과 한국의 위치를 뒤집어 놓았다. ‘손노리’와 ‘그라비티’가 협력해 만든 [악튜러스]는 일본RPG에 비해 손색없는 게임성으로 한국RPG의 수준을 올려놓았다. 유저들도 한국RPG의 대표작 하면 주저 없이 [악튜러스]를 꼽는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악튜러스]를 기반으로 만든 MMORPG [라그나로크]는 오히려 일본시장에 진출해 한국게임의 위상을 떨쳤다. [라그나로크]는 가장 성공한 온라인게임으로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인기가 높다. 이제는 일본이 한국RPG의 놀라운 자생력을 배우려 하고 있다. [악튜러스]와 [라그나로크]로 이어지는 한국RPG의 위대한 계보를 알아보자.


김학규의 지하 단칸방, 한국 RPG의 산실

“그라비티를 설립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세금계산서였습니다. 제가 당시 다른 회사 외주를 했었는데, 세금계산서를 떼려면 법인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회사를 설립한 거죠. 회사는 저에게 있어서 게임을 개발하기 위한 수단 정도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2011년 김학규 대표 디브온 강연 중


2000년 발매된 [악튜러스]는 한국RPG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게임은 당대 최고의 게임사로 불리던 ‘손노리’와 ‘그라비티’가 공동개발 한 작품으로 더욱 유명세를 떨쳤다. 손노리는 말이 필요 없는 국내 게임업계 최고의 개발사다(손노리 작품에 관해서는 게임대백과 [화이트데이] 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아직도 [악튜러스]가 손노리의 작품이라고 알고 있는 유저들이 많은데, 엄밀히 말해 그라비티가 더 많은 부분을 개발했다. 당시 손노리는 [화이트데이] 제작에 회사의 역량을 집중했기 때문에, [악튜러스]는 기획과 시나리오 정도만 맡았다. 대부분의 게임 콘텐츠는 그라비티 쪽에서 작업을 했다. [악튜러스]와 [라그나로크]에 대해 설명하자면, 국내 게임산업의 또 하나의 별 김학규 대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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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비티를 창업하고 [악튜러스]를 개발한 IMC게임즈 김학규 대표.>



김학규 대표(현 IMC게임즈 대표)는 전형적인 국내 1세대 게임개발자다. 그는 서강대 수학과를 중퇴하고 게임개발에 나섰다. 하지만 당시엔 게임개발을 전문으로 교육하는 학교나 기관이 없었다. 그는 하이텔 게임 동아리 같은 PC통신을 중심으로 같은 꿈을 가지고 있는 개발자 지망생들을 모았다. 여기서 만난 사람이 [창세기전]을 만든 소프트맥스 최연규 이사다. 그는 최연규 등과 함께 ‘아트크래프트’팀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게임제작에 들어갔다.

게임개발에만 관심이 있던 그는 창업해 매출에 목매지는 않았다. PC통신 동호회에서 만난 지인들과 술 한 잔 하면서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며 창작의 자유를 즐겼다. 초창기 게임개발 작업은 그가 얻은 한 연립주택 지하실에서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이원술, 서관희, 최연규 같은 1세대 개발자들과 교류하며 게임개발의 꿈을 키웠다. 이때 지하실 사무소는 일명 ‘학규굴’이라는 이름으로 통하며, 많은 사람들이 기억한다고 한다. 게임 개발사라기보다는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김학규 대표는 [리크니스]와 [개미맨2]의 외주제작을 맡았다. [리크니스]는 소프트맥스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사업체를 가지고 있지 않는 그는 업체로부터 세금계산서를 청구하기 위해 ‘그라비티’라는 회사를 설립했다고 한다.


게임학원 강사로 전전긍긍하던 시절
그는 RPG 게임을 만드는 게 꿈이었다. 이미 그가 잘 아는 손노리는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를 발매해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일본식 SRPG를 한국에 맞게 도입한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순수한 의미의 한국RPG라고 보기엔 독창성이 부족했다. 그는 한국에서도 제대로 된 RPG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RPG는 돈과 인력이 많이 드는 장르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이를 받쳐주는 기술력도 겸비해야 한다. 지하 단칸방 사무실의 작은 회사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프로젝트였다. 그는 액션RPG에 도전했지만 절반까지 만들고 중도에 손을 놓아야 했다. [울티마]나 [드래곤퀘스트]같은 RPG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아직까지 그라비티는 다른 게임사들의 하청을 맡으면서 연명했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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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그라비티는 지하 단칸방에서 외주를 맡아 연명했다. 그가 제작에 참여한 [리크니스](좌)와 [개미맨2](우).>



1998년, IMF 한파로 게임회사들이 줄줄이 파산했다(그러고 보면 IMF는 한국게임산업과 필연이자 악연으로 묶여있다). 이때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려웠던 시절이다. 일거리가 바닥난 그는 돈을 벌기 위해 게임 학원의 강사를 뛰었다. 당시 정부는 경제위기의 돌파구로 IT산업을 적극 육성했다. 인터넷과 게임은 IT산업 중 단연 촉망받는 분야였다. 여기저기서 벤처붐이 일어났던 시절이었다. 게임 학원에 대한 수요도 많았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게임개발의 꿈을 위해 학원을 찾았지만, 막상 이들을 교육할만한 전문 인력이 없었다. 당시만 해도 게임개발자들은 변변한 명함 하나 내밀 수 없었을 때였다. 그는 현장의 경험을 살려 학원에서도 꽤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김학규 대표는 학원 강사를 하면서 수 차례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자신의 꿈은 RPG 개발이지 학원 강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이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그는 학생들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인생사 '세옹지마'라고 했던가. 그가 학원강사가 된 것이 [악튜러스]를 개발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것이다.


악튜러스는 프로가 만든 마지막 아마추어 게임

“[악튜러스] 프로젝트는 기업의 이윤창출이라는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2000년대가 오기 전 우리가 항상 꿈꿔오던 초대작RPG를 만들고 싶다는 발상에서 출발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규모가 너무나 커서 한 회사의 힘으로 이끌어 나갈 수 없다고 판단되어 ‘공동개발’이라는 형식을 취하게 됐습니다.”
-그라비티 김학규 실장(피시파워진 인터뷰 중)


그는 학원생들을 게임개발에 참여시켜 보자는 참신한 발상을 기획했다. 능력있는 학생들에게 수업료 면제를 조건으로 내걸고 게임제작에 참여시켰다. 한 강연장에서 김 대표는 “똑똑한 사람들이 몇 명 보여서 ‘내 일을 도와주면 학원비를 받지 않겠다’라는 조건을 걸고 만든 게임이 [악튜러스]”라고 밝혔다. 얼마나 사람이 없었으면 학원생들을 개발에 참여시키다니, 주위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열정만큼은 현역 개발자를 능가했다. 개중에는 돈은 안 받아도 좋으니 프로젝트에 참여만 시켜달라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래도 아마추어 학생들만으로 RPG를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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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비티와 손노리가 공동개발 한 [악튜러스]의 홍보영상. 당시 유명 광고를 패러디한 코믹한 홍보영상으로 그 시절 개발자들의 풋풋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김학규 대표는 손노리와 손을 잡았다. 당시 손노리는 한국 RPG의 맏형으로 인정받고 있는 개발사였다. 손노리 창업자중 한명인 서관희 이사(현 엔트리브소프트 이사)를 통해 손노리는 악튜러스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손노리가 김학규 대표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이유는 간단하다. 양쪽 모두 제대로 된 초대형RPG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공유하고 있었다. 아마추어 학생들의 풋풋한 열정에 손노리의 노하우까지 보탠 RPG 프로젝트는 나름 모양새를 갖춰갔다. 특히 손노리가 개발에 참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게임의 기대치가 더욱 높아졌다. 이미 [악튜러스]는 한국 RPG의 자존심이 걸린 프로젝트 반열에 올라있었다. 김 대표는 투자자들을 설득해 게임개발 자금을 모았다. 물론 학원 강사비로 받은 돈을 모두 개발비에 쏟아 넣은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악튜러스] 프로젝트는 손노리와 그라비티의 특징을 담아 기존에 볼수 없는 독특한 게임으로 성장했다. 그라비티의 비극적 서사와 손노리의 유머감각이 어우러져 새로운 형태의 스토리텔링을 연출했다. 이들에게 기업의 이윤창출 같은 것은 뒷전이었다. 오직 2000년대가 오기 전에 제대로 된 한국형 RPG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하나로 서로 뭉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바램은 한국게임사의 또 다른 이정표를 세웠다. [악튜러스]와 [라그나로크]로 이어지는 한국RPG, 그 위대한 계보의 시작이다.


20세기 끝자락, 비극과 희극을 넘나드는 세기말적 묵시록

"프로 개발자의 입장에서 게임을 만들면 제작비라든가 발매일 등 여러가지로 신경을 써야하죠. 하지만 아마추어들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만족할 때까지 게임을 만들죠.악튜러스는 손노리와 그라비티가 프로 게임제작사로서 만든 마지막 아마추어게임입니다."
-손노리 이원술 대표 (피시파워진 인터뷰 중)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악튜러스]는 개발자의 말처럼 여러모로 실험적인 요소가 많았다. [악튜러스]의 가장 큰 특징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는 스토리다. 게임은 소소한 이벤트를 따라가기 보다는 이야기의 큰 줄기를 짚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메인 시나리오만 해도 원고지 20,000장 분량의 방대한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게임의 5배 이상의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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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아기자기한 그래픽과는 달리 세기말적인 어두운 스토리가 포함하고 있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큰 줄기는 3개의 파트로 나눠진다. 1부는 주인공들의 모험이야기기와 각자의 사연이 소개된다.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들이 어떠한 계기를 통해 서로 만나게 되며, 이때부터 이야기의 규모는 더 방대해진다. 2부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들이 속한 나라가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며, 빠른 속도로 결말로 치닫게 된다. 3부는 종교적, 초자연적인 요소가 가미된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래픽은 아기자기하지만 게임내용은 상당히 진지하고 철학적이다.

악튜러스는 바렌시아 대륙의 모험담을 다뤘다. 그런데 ‘창세기전’이나 ‘영웅전설’같은 거창한 영웅 신화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주인공은 고단하고 비루한 삶을 살고 있는 소시민들이다. 바렌시아 대륙은 현실처럼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곳이다. 위정자들은 사치스런 생활에 빠져 백성들을 착취하고 종교는 성전 건설이란 명분 아래 주민들에게 무리한 헌금을 요구한다. 이런 생활에 환멸을 느낀 ‘마리아’는 어릴 적 친구인 ‘시즈’를 데리고 고향을 떠날 결심을 한다. 주인공의 성격도 일반적인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남자 주인공 시즈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술주정뱅이인 아버지의 학대 속에서 고통스런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자신의 일조차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인물로 그려진다(게임을 해보면 시즈의 답답한 성격에 분통이 터진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던 중 교회로부터 어머니의 묘지마저 빼앗긴 후 마리아와 함께 고향을 뛰쳐나온다. 주인공들의 고향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어머니의 품이 아닌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려야 할 어두운 과거다. 운명을 거부한 주인공들의 모험은 결국 비극적 종말로 치닫게 된다. 게임은 무능과 위선과 종교의 부패, 가정의 붕괴 같은 현실의 부조리를 풍자하고 있다.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던 20세기 끝자락에 만들어진 악튜러스는 그만큼 세기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악튜러스는 비극과 희극을 넘나드는 21세기 묵시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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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두 주인공 시즈와 마리아. 남자인 시즈는 여성스럽고, 여자인 마리아는 남성스럽게 표현하여 캐릭터의 개성을 살렸다.>



2D와 3D의 절묘한 조화

“[악튜러스]는 실험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입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시도를 했죠. [악튜러스]의 이야기는 다중 이벤트보다는 일관된 이야기의 줄기를 따르는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대신 행동의 자유도는 최대한 보장할 것입니다. 3D와 2D 그래픽의 조화를 시도한 것과 독특한 전투 방식에서 여타게임과 차별점이 있습니다.”
-손노리 이원술 대표(피시파워진 인터뷰 중)


시스템적인 측면에서도 [악튜러스]는 혁신적이다. 맵을 리얼타임 3D로 만들었고, 캐릭터는 2D로 구성했다. 2D캐릭터는 8방향으로 표현되어 3D맵과의 이질감을 줄였다. 고전적인 도트그래픽과 최신의 3D 맵이 어울러져 색다른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했다. [악튜러스]는 시점 전환이 자유롭다. 기존의 2D 필드에서는 사물의 측면이나 후면을 볼 수 없었지만 [악튜러스]는 시점전환을 통해 세세한 부분 관찰할 수 있다. 또, 높은 건물에 올라가 보거나, 난로안에 숨고, 나무위로 올라가 가지를 흔드는 등 다양한 행동들이 가능하다. 좀 더 현실감 있는 게임을 위해 지형의 굴곡과 높낮이 개념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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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인 시즈를 여자로 착각하는 사람들. 이런 아기자기한 이벤트들이 게임의 재미를 살린다.>



[악튜러스]의 백미는 전투시스템이다. [악튜러스]는 당시 RPG의 대세였던 턴 방식 전투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턴 방식 전투의 단점은 기다리고 멈춰있는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 당시 [스타크래프트]가 보여준 실시간 전투의 재미에 비해선 턴 방식 RPG는 답답해 보였다. [악튜러스]는 긴박하게 전개되는 전투를 보다 액티브하게 표현하기 위해 하프리얼타임 전투방식을 도입했다. 즉 시간을 멈추는 일이 없다. 전투가 시작되면 적과 아군이 동시에 움직인다.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전투에서 유저는 지형지물을 이용하거나 마법을 구사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투를 치를 수 있다. 화면 하단에 캐릭터의 행동게이지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 게이지를 조절해가며 전투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이런 독특한 아이디어를 가미해 게임을 더욱 생동감 넘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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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타임으로 진행되는 전투방식은 마치 실시간 전략게임처럼 박진감 넘치는 재미를 선사한다.>



창세기전 vs 악튜러스, 시작과 끝의 변주곡

“2000년 겨울, 제 2의 경제대란이 온다고 다들 걱정이다. 암울한 이시대 한국게임들이 무더기로 출사표를 던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악튜러스], [창세기전3 파트2], [킹덤언더파이어] 등 그야말로 별들의 전쟁이다. 침체된 게임 산업을 국산게임들이 앞장서서 되살린다? 과연 혁명은 성공할 것인가”
-피시파워진 서장원 편집장(2000년 12월 피시파워진 칼럼 중)


한국 게임역사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절은 아마도 2000년 겨울이 아닌가 싶다. 불안과 희망이 교차됐던 2000년 12월, 한국 PC패키지 게임들은 화려하게 만개했다. 비록 한국 패키지 게임의 마지막 몸부림일지라도 그때는 정말 찬란한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이 시절 국내 게임업계는 [악튜러스]와 [창세기전3 파트2(이하 창세기전)]의 빅매치로 술렁거렸다. [창세기전]이 챔피언이라면, [악튜러스]는 도전자의 입장일 것이다. 실제로 두 게임은 여러 모로 닮은 듯 다른 점이 많다. 창세기전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산 RPG의 챔피언이다.

매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10만 장 이상 판매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소프트맥스는 창세기전이 대박나면서 게임사로는 드물게 코스닥에 입성했다. [창세기전]은 게임사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주었다. 2000년 겨울에 나올 [창세기전3 파트2]는 언론과 유저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발매됐다. 도전자 입장인 [악튜러스]는 창세기전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아마추어 개발자들을 중심으로 그야말로 ‘헝그리 정신’으로 만들어진 게임이다. 비록 손노리가 합류해 유명세를 타긴 했으나, 그 개발과정을 보면 정말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또, 손노리와 소프트맥스, 두 S사의 자존심 대결도 볼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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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겨울 비슷한 시기에 발매된 [창세기전3 파트2]와 [악튜러스]. 당시 게임업계 최고의 빅매치로 남아있다.>



두 회사는 한국 게임업계의 양대산맥으로 불렸지만 한 번도 같은 시기 맞붙은 적이 없었다. 손노리가 [악튜러스]를 가지고 나오면서, 2000년 12월 두 회사는 사활을 건 한판승부를 벌여야 했다. 당연히 유저들은 두 거물급 개발사의 대결을 숨죽이면서 지켜봐야 했다. 이때는 ‘[악튜러스]냐, [창세기전]이냐’가 게임계의 최대 화두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창세기전]이 조금 더 팔렸지만, 판매량으로 따질 수 없는 패키지게임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사실 악튜러스는 1999년 12월 발매되어 '창세기전3 파트1'과 붙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개발이 1년 연기되면서 파트2와 매치가 성사된 것이다.

필자는 [창세기전]을 했으면 [악튜러스]도 꼭 해볼 것을 권한다. 공교롭게도 [악튜러스]와 [창세기전]은 게임 설정이 상반된다. 두 게임 다 기본적으로 성서를 기반으로 스토리를 만들었다. 창세기전은 제목 그대로 성경의 첫 부분인 ‘창세기’를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악튜러스]는 성경의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을 바탕으로 한다. 내용도 상반된다. [창세기전]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반면 [악튜러스]는 세기말 종말을 주제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세계의 종말을 다룬 ‘요한계시록’의 내용들이 게임에 은연중 내포되어 있다. 1999년에 개발된 [악튜러스]는 당시 우리 사회에 팽배했던 종말론, 휴거 등의 사회불안을 콘텐츠에 고스란히 담았다. 실제로 게임 내에서도 성경구절이 자주 인용되곤 한다. 시작을 의미하는 [창세기전]과 종말을 예고하는 [악튜러스], 2000년 두 게임은 한국 패키지 게임의 시작과 끝을 변주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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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전]이 성경 창세기의 시작을 다뤘다면, [악튜러스]는 요한계시록의 종말을 다뤘다.>



악튜러스, 일본RPG에 영감을 주다!
[악튜러스]는 발매 후 우여곡절이 많았던 게임이다. 먼저 초회 한정판에 추가된 화보집의 그림이 다른 작품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몇 가지 몬스터 설정 그림을 넣었는데 이것이 일본의 피규어 작품을 도용했다는 의혹이다. 손노리와 그라비티는 사실을 인정하고 초회 한정판을 전량 회수하는 등 시작부터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 이후부터 한국게임의 표절문제가 수면 위에 올랐다. 게임성에 대해서도 호불호가 갈린다. 거창하게 시작한 초반부와는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스토리가 꼬이고 버그도 많아져 유저들의 원성을 샀다. 일부 열혈유저들은 게임을 미완성으로 내놨다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게임 종반부로 갈수록 반전과 반전을 거듭하면서 ‘역시, 악튜러스’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게임의 사운드도 인상적이다. [악튜러스]는 한국 게임음악의 산증인 ‘사운드템프’ 팀에서 음악을 맡았다. ‘사운드템프’는 게임음악을 전문으로 만드는 아티스트들의 모임이다. 특히 [악튜러스] OST는 국내 게임음악을 통틀어 몇 안 되는 최고의 명반으로 인정받고 있다. [악튜러스]를 비판하는 유저들도 게임 사운드트랙만은 인정하는 분위기다. 특히 오프닝곡 오픈유어아이스(Open your eyes)는 서정적이고 경쾌한 리듬으로 게임의 분위기를 업그레이드 시켰다. 악튜러스의 오프닝 영상 제작에는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자 피터정이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피터정은 '이온 플럭스', '비비드앤 벗 헤드', '알렉산더' 등 유명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명인이다.

CD 6장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나왔다(사운드트랙까지 합치면 7장 분량). 그야말로 게임패키지의 결정판을 보는듯한 화려한 구성으로 유저들을 흥분시켰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패키지구성에도 불구하고 판매율을 저조했다. 와레즈와 불법복사 탓이다. 10억 원 이상의 개발비를 들여 7만장 정도 팔렸다고 한다. “게임을 해본 사람은 많은데 판매는 저조하다”는 한국 게임업계 불편한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한국 패키지게임의 불법복사와의 기나긴 전쟁은 [악튜러스]부터 시작됐다. 결국 얼마 안가 잡지사 번들과 주얼패키지로 전락하는 신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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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콤이 수입한 일본판 [악튜러스]. [악튜러스]는 팔콤의 이스와 영웅전설 시리즈에도 영향을 주었다.>



[악튜러스]는 해외수출 1세대 게임이다. [악튜러스]는 국내 부진을 매우기 위해 해외에 수출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RPG 명가 팔콤에서 [악튜러스]를 수입해 일본시장에 판매했다. 팔콤은 ‘가가브 트롤리지에 필적하는 장대한 스토리’라고 극찬할 만큼 [악튜러스]의 게임성을 인정했다(가가브 트롤리지는 팔콤의 대표작 영웅전설 3, 4, 5의 이야기를 묶은 연대기다). 실제로 [악튜러스]는 팔콤의 차기작 [영웅전설6]와 [이스6] 개발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동안 일본게임을 우러러 보기만 했던 한국게임이 이제는 일본게임에 영향을 줄만큼의 위치로 올라선 것이다. 이후 [창세기전: 서풍의 광시곡], [라그나로크], [붉은보석] 등 한국RPG는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악튜러스]는 일본게임에 대한 고질적인 열등감을 해소시킨 계기가 됐다.


사람은 떠나지만 게임은 남는다! 악튜러스를 계승한 라그나로크
2000년 여름 즈음. 필자는 잡지사 기자시절 서울 종로구 어디쯤에 위치한 그라비티 사무실을 찾았다. 당시 그라비티는 [악튜러스] 막바지 개발 작업이 한창이었다. 20명 정도 일하는 조그마한 사무실이었다. 김학규 대표와 인터뷰 하던 중 그는 사무실 한쪽에서 개발자 몇몇이 만들고 있는 어떤 게임을 보여주었다. 처음엔 [악튜러스]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다른 게임이었다. 김 대표는 [악튜러스]의 엔진으로 만든 온라인게임이라고 말했다. “처음 보여주는 거니 기사 쓸 생각말라”는 엄포(?)도 함께였다. 나도 ‘이런 게임이 있구나’며 웃어 넘겼다. 훗날 한국과 일본을 주름잡는 MMORPG [라그나로크]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특종을 놓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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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튜러스]의 엔진을 사용해 만든 [라그나로크] 온라인. 일본에 수출되어 성공한 한류게임의 원조.>



얼마 후 그라비티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렸다. 김학규 대표는 투자자와의 갈등으로 자신이 창업한 그라비티에서 물러나게 된다. 회사를 나온 그는 IMC게임즈를 창업하고 MMORPG [그라나도 에스파다]를 만들었다. 김 대표는 회사를 떠났지만 그가 만든 [라그나로크]는 2003년 오픈해 국내 온라인게임 시장에 한 획을 그었다. [라그나로크]는 아기자기한 그래픽과 커뮤니티 기능을 내세워, 게임시장의 블루칩인 여성유저들을 모으는데 일조했다. 또, [악튜러스]처럼 일본에 건너가 일본 온라인게임시장을 평정했다. [라그나로크]로 온라인게임시장에 적응한 ‘그라비티’는 한때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메이저 게임사로 거듭났다. 과거 함께 개발했던 ‘손노리’와는 다른 운명이다. 하지만 그라비티는 [라그나로크] 후속작의 연이은 실패로 지금은 침체국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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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녀주인공의 사랑과 비극적 이야기가 게임의 큰 줄기를 차지한다. 가끔 이런 두근거리는 장면도 등장해 유저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한국게임이 남긴 위대한 유산
감히 말하건대 [악튜러스]는 한국게임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악튜러스]를 시작으로 한국게임은 영광의 시대를 걸었고, [악튜러스]를 끝으로 한국패키지게임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악튜러스]의 엔진을 이용해 [라그나로크]가 나왔고, [라그나로크]는 한국 온라인게임 성장에 일조했다. [악튜러스]는 일본RPG 명가 팔콤에게 새로운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창작의 영감을 주었다. 비록 그 자신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악튜러스]가 남긴 위대한 유산들은 지금도 게임업계 곳곳에서 영향을 주고 있다. 풋내기 학원생들이 모여 만든 이 게임은 한국을 넘어 RPG의 고향 일본유저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것이다. [악튜러스]는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해 가장 높은 곳까지 올랐다. 또,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패키지게임의 뒤안길로 홀연히 사라졌다. [악튜러스]의 삶은 어쩌면 굴곡 많은 한국 게임사와 너무나 닮아있다. [악튜러스]는 시대가 변해도 계속 기억되어야 할 명작이다.

[창세기전], [화이트데이]에 이어 [악튜러스]를 끝으로 한국 게임시장의 여명을 밝힌 패키지게임 3편이 모두 소개됐다. 1990년대가 패키지게임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 이후 한국게임시장은 온라인게임으로 재편된다. 이제 시장은 완전 리셋 됐다. ‘손노리’, ‘소프트맥스’, ‘그라비티’ 같은 패키지시대의 명가들도 온라인게임으로 넘어가기 위해 악전고투한다. 더러는 실패하고 더러는 성공하고, 아직도 도전을 계속하고 있는 회사도 있다. 업계는 온라인게임의 거대한 쓰나미 앞에서 우왕좌왕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악튜러스]가 말한 종말은 바로 패키지 게임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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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해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른 [악튜러스]는 한국게임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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