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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브를 틀면 아이디어가 콸콸 쏟아지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회사이름을 밸브라고 지었다.>


“그녀를 처음보고 손을 잡는 순간 내게는 느낌이 왔어요. 그건 바로 매직이었죠.”

로맨틱영화의 고전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유명한 명대사다. 이 영화는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는 다시 보게 된다는 ‘운명적 만남’에 관한 이야기다. 필자도 어릴 적부터 ‘운명적 만남’을 꿈꿔온 게임사가 있었다. 바로 [하프라이프]와 [스팀]서비스의 주인공 밸브다. 밸브가 만든 [하프라이프]는 필자의 게임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운명 같은 게임이다. 이런 위대한 게임을 만든 사람들을 언젠가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러나 게임업계 생활 10년 동안 밸브를 만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조그마한 게임CD안에서 그들의 게임철학을 느끼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톰행크스’와 ‘맥라이언’이 만날 듯 만나지 못하는 영화 스토리처럼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매직’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도타2] 국내 서비스를 앞두고 밸브부터 초청장이 날아온 것이다. 공교롭게도 밸브가 있는 지역은 영화의 배경인 바로 그 시애틀이다. 필자는 LA에서 E3를 취재를 끝내고 곧바로 시애틀행 비행기를 탔다. 밸브와의 첫 만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영화 마지막 부분, 처음 만난 남녀 주인공의 기분이 이럴까? 2시간 후, 시애틀 공황에 도착했다. 시애틀의 하늘은 유난히 화창했다.


밸브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있다!
시애틀은 ‘실리콘밸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와 함께 세계 IT산업의 중심이다. 빌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시애틀에 있기 때문이다. 공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빌게이츠 사진이 들어간 표지판이다. 이밖에 국제기업 보잉의 본사와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스타벅스 1호점도 시애틀에 있다. 밸브는 공항에서 차로 20분 정도 이동해 도착한 ‘밸뷰’라는 도시에 위치해 있다. 밸뷰는 은행, 관공서, 금융, 호텔 등 서비스 시설들이 밀집해 있는 시애틀의 위성도시다. 도시 곳곳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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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공항에서 본 하늘, 일 년 중 비가 많이 오는 시애틀 날씨도 오늘따라 쾌청하다.>


그러고 보면 밸브와 마이크로소프트는 인연이 깊다. 밸브 창업자 ‘게이브 뉴웰’ 대표가 마이크로소프트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밸브를 창업하기 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13년 간 근무한 MS맨 출신이다. 평소 게임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FPS [둠]의 윈도우 포스팅 작업을 맡으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게임의 매력이 흠뻑 빠진 그는 ‘밸브 코퍼레이션’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하프라이프]라는 희대의 명작을 탄생시켰다. [하프라이프]는 게임사의 흐름 바꾸어 놓을 정도로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그 뒤 [카운터스트라이크], [팀포트리스], [포탈], [레프트포데드], [도타2]까지 개성강한 작품들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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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화려하진 않지만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시애틀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오른쪽 사진은 빌게이츠가 살고 있다는 워싱턴 메디나의 한적한 섬.>


이런 점에서 볼 때 밸브는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DNA를 가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로 IT 역사를 다시 썼다면, 밸브는 인터넷 게임마켓 ‘스팀’을 구축해 게임유통의 새판을 짰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엑스박스’로 콘솔게임시장을 일으켰다면, 밸브는 물리엔진(소스엔진)을 만들어 게임기술력의 혁신을 가져왔다. 두 회사 모두 어느 한 부분에 머물지 않고 전체적인 판을 키우는데 노력했다. 한쪽은 컴퓨터 업계에서, 한쪽은 게임업계에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곳의 선선한 날씨처럼 쿨하고 개성강한 ‘시애틀 스타일’은 세계 IT시장에 영향을 준 두 거인을 배출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중 목적지인 밸브 본사에 도착했다.


밸브에는 ‘자이언트 밸브’가 있다!
밸브가 입주한 ‘스카이라인 타워’는 26층 은행빌딩이다. 밸브는 이 건물에서 6개 층을 쓰고 있다. 다른 층은 주로 은행과 금융회사들이 입주해 있다고 한다. 회사 이름이 ‘밸브’라서 그런지 유독 건물 안팎에 설치되어 있는 밸브들이 눈에 띄었다. 건물 앞에 설치된 큰 소방용 밸브가 이국땅에서 찾아온 낯선 손님을 먼저 맞아주었다. 5층의 로비로 올라가자 이번에도 거대한 밸브가 눈에 띄었다. 로비의 대형 밸브는 ‘자이언트 밸브’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밸브는 사무실을 세 번 이사했는데 그때마다 ‘자이언트 밸브’를 옮기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이밖에 개발실 곳곳에 크고 작은 밸브들을 찾을 수 있다. 직원들의 옷걸이나, 조명도 밸브 모양이다. 벽에도 밸브, 천장에도 밸브, 바닥에도 밸브, 그야말로 밸브 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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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밖에도, 바닥에도, 천장에도, 벽에도, 그야말로 모든 종류의 밸브를 볼 수 있다. 로비에 설치된 자이언트 밸브는 밸브사 대표 게이브 뉴웰의 형이 회사 창립 기념으로 선물해 준 것이라고 한다.>


로비에 들어서자 안내를 맡은 ‘에릭 존슨’씨가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시에라’에서 근무했던 그는 밸브의 창업멤버 중 한 명이다. 일반 회사로 따지면 부사장 정도의 위치다. 차분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모습이 [하프라이프]의 주인공 ‘고든 프리맨’의 느낌이다(외모는 다르지만). 가장 물어보고 싶은 질문부터 했다. “왜 회사 이름이 밸브인가?” 그런데 돌아오는 답이 멋지다.

“그냥 심플해요. 밸브를 틀면 좋은 아이디어가 콸콸 쏟아질 것 같아서죠. 그래서 회사 이름을 밸브라고 지었어요. 굳이 의미를 찾자면 사고를 많이 할 수 있다는 정도? 무엇보다 발음하기가 편해서 좋아요. 밸~브!”

필자가 [하프라이프]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게임보다 로고에 먼저 충격을 받았다. 사람얼굴에 밸브가 박혀 있는 이 기괴한 형상의 로고는 그 자체가 충격이었다. 로고가 너무 엽기적이라며, 불쾌해 하는 사람도 많았다. 개발자가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라는 오해도 샀었다. 밸브의 첫인상은 그만큼 강렬했다. 사무실 곳곳에 설치된 밸브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니 되니 이제야 ‘밸브가 밸브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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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밸브의 로고, 사람 머리에 밸브가 꽂혀 있는 기괴한 형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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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짓궂은 질문에도 여유롭게 받아준 에릭 존슨. 밸브 창업멤버 중 한 명이다.>



밸브에는 ‘황금 빠루’가 있다!
밸브는 AOS게임 [도타2]를 포함해 5개 정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5층에서 내부 계단을 통해 한층 더 올라가 보니, 널찍한 식당과 휴게실이 보였다. 에릭은 아저씨 같은 미소로 “냉장고에 있는 음료수는 무료니까 아무거나 꺼내 마셔도 좋다”며 웃어 보였다. 이발소와 마사지실 등 직원들이 회사 안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다양한 편의시설을 마련해 놓았다(특히 이발소는 80년대 한국 이발소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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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라이프의 주인공 고든 프리맨 피규어. 지금의 밸브를 있게한 장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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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루를 들고 분투하는 고든 프리맨. 자네 때문에 내 게임인생이 즐거웠다~>


무엇보다 이곳은 밸브의 추억이 담겨져 있는 곳이다. 6층 곳곳에는 밸브가 그동안 받았던 각종 상패와 조형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복도 한 편은 팬들이 보내 준 팬픽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팬들이 직접 그린 ‘게이브뉴웰’의 캐리커처와 그들의 사연을 담은 편지, 개발자와 함께 찍은 사진 등 밸브의 추억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밸브 게임에 등장한 다양한 캐릭터 모형들도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하프라이프]에서 가장 무서웠던 몬스터 바니클(천장에 붙어서 혀를 날름거리며 공격하는 몬스터) 모형이 천장에 붙어 있어, 순간적으로 흠칫 했다. 한마디로 게임과 사람이 함께 있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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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면 가득 밸브가 그동안 받은 상들이 진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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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라이프를 해본 사람은 안다! 이 녀석의 무서움을...저걸 보는 순간 흠칫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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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에 나오는 캐릭터. 나름 귀여운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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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포트리스에서 엔지니어가 설치하는 로봇.>


단연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건 ‘황금빠루’였다. [하프라이프]에서 주인공이 들고 다니는 빠루(노루발못뽑이)는 밸브를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다. 설마 했는데 밸브에는 진짜 빠루가 있었다. 그것도 금으로 된 황금 빠루가 아닌가. 밸브가 [하프라이프]를 처음 출시할 때 유통사인 시에라가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황금 빠루는 20년 동안 밸브를 상징하며 지금까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블리자드에선 10년 근속한 사원에게 와우에 나오는 칼과 방패를 준다고 한다. 밸브는 게임 속 가장 유명한 아이템을 회사의 자랑거리로 내세우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유치한 장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들에게 ‘빠루’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부심이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황금빠루’에 얼굴을 가까이 대어봤다. 게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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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자드에 검과 방패가 있다면, 밸브에는 황금빠루가 있다. 황금빠루의 화려한 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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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이 보내온 팬레터들이 벽면 한가득 채워져 있다. 창업자 게이브뉴웰은 후덕한 외모로 게이머들에게 인기가 많다.>



밸브에는 ‘파티션’이 없다!
거침없는 입담의 에릭존슨도 7층부터는 목소리 톤을 낮추었다. 이곳부터는 [도타2] 개발실이 있다. 직원들이 일하는데 방해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익숙한 사무실 풍경과는 왠지 달라보였다. 허전하기도 하고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이사 온지 얼마 안 되어 그런가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밸브 개발실에는 파티션이 없다. 깔끔하게 구역을 정리해 주는 파티션이 이곳에선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내 자리, 네 자리 구분없이 산만하게 책상이 나열되어 있었다. 직원들의 책상과 의자에는 하나같이 바퀴가 달려 있었다. 언제든지 책상을 빼서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는 구조다. 에릭은 “누구와 언제든 의견을 나누고 토론을 할 수 있도록, 사무실을 터놓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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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고 보면 모여서 노는 것 같은 분위기지만, 사실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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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마련했다는 모션캡쳐 작업실. 여기서 어떤 위대한 작품이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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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션이 없는 개발실, 겉으로는 산만해 보이지만 소통하기에 적합한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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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는 장정 몇 명이 함께 걸어도 될 만큼 넓게 구성되어 있다. 널찍널찍한 공간이 밸브의 특징.>


밸브의 개발실 구조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오전에 아트 팀과 협업 할 때는 그쪽으로 책상을 옮겨 함께 작업할 수 있다. 오후에 프로그램 업무를 하려면 책상을 빼서 다시 옮긴다. 책상에는 바퀴가 붙어 있어 자신이 필요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그래서 밸브 사람들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단다. 팀장 자리, 팀원 자리가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 사장이든 말단 직원이든 필요에 따라 자리를 움직인다. 당연히 관리하는 사람도 없다.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을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직원들이 서로 웃고 떠들며 노는 것 같지만, 사실 서로 소통하며 일하는 모습이다. 조용하게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는 한국회사의 분위기와는 다르다. 에릭은 “직원들이 서로 잡담하고 놀면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한다. 이들에게 있어 반듯하게 선을 긋는 파티션 따위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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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어, 직원들이 쉽게 이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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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이 자유롭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휴게실. 여러 가지 책과 조형물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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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에 위치해 있는 다큐멘터리 제작팀. 다양한 아이디어를 실제 프로젝트로 실현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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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모든 책상과 의자는 이동하기 좋도록 바퀴가 달려 있다.>



밸브에는 ‘직원’이 없다
밸브는 매주 목요일마다 전체 사원이 한자리에 모여 토론을 한다고 한다. 조직도 간소하다. QA팀을 따로 두지 않고 모든 직원이 매달려 테스트에 참여한다. 또, 직원들은 자신의 업무량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컨디션이 안 좋은데 억지로 회사 나와서 출근도장 찍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밸브는 도전과 모험에 관대하다. 무언가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바로 프로젝트 팀을 꾸려 실행해 볼 수 있다. 실제로 건물 9층에는 ‘Free to Play’라는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있다. 게임회사에 다큐멘터리 제작팀이냐고 의아해 하겠지만, 직원들이 모여 잡담을 하던 중 우연히 나온 아이디어가 프로젝트로 이어진 사례라고 한다. 아이디어를 낸 직원은 사내에서 팀원을 모집해 다큐멘터리 제작팀을 꾸렸다고 한다. 아이디어가 콸콸 나오게 하는 밸브 역할은 이런 개방된 조직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업무를 직원들의 자유에 맡기면, 조직이 너무 방만해지지 않겠냐고 물었다. 에릭은 “제품의 주인은 직원들이다. 주인은 스스로 자신의 일을 결정하는 사람 아니냐?”고 오히려 나에게 반문했다. 주인은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노예는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들이다. 직원들은 다 같이 자신들을 회사의 주인으로 생각한단다.

밸브가 QA팀을 안두는 이유도 이런 주인정신으로 설명할 수 있다. QA는 게임 테스트를 전담하는 업무다. 자신이 만든 게임은 자신이 직접 테스트해야지 남에게 맡길 순 없다. 자신의 일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도 주인의 몫이다. 상명하복의 한국회사의 관점으로 밸브를 바라보는 것이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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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안에 위치한 조형물 작업대. 머릿속에 구상한 캐릭터들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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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뒤에서 필자를 노려보고 있는 레프트포데드의 괴물좀비. 간 떨어질 뻔 했다.>



밸브에는 ‘신입사원’이 없다!
밸브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게임사 중 하나로 꼽힌다. 또래의 다른 게임사들은 경영악화로 큰 회사에 인수되거나 문을 닫았는데, 밸브는 여전히 20년 전 게임을 만들었던 초심을 잃지 않고 있다. 이정도 규모면 번듯한 사옥하나 장만할 수 있었건만, 그들은 여전히 은행건물에 새들어 살고 있다. “왜 사옥이 없냐”고 묻자 에릭은 “우리가 부동산 회사도 아닌데, 건물이 왜 필요하냐?”고 반문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자유롭게 창작할 ‘공간’이지, 번듯한 ‘건물’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어 “사옥이 필요하면 그때 가서 지어도 늦지 않는다.”고 말했다. 돈만 벌면 강남에 빌딩부터 장만하려는 우리나라 경영자들과는 생각부터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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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목요일마다 전 직원들이 이곳에 모여 정보를 공유한다. 요즘엔 직원 수가 많아져 자리를 넓힐 계획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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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브에는 직급이 없다. 직원들은 수평적 관계에서 자유롭게 소통하며 의사결정을 한다.>


밸브는 효율성을 최선으로 여기는 조직이다. 밸브에는 신입사원이 없다. 동종업계에서 10년 이상 경력자나, 회사를 꾸려본 적이 있는 경험자를 뽑는다. 밸브에서는 ‘대리’, ‘과장’, ‘부장’ 같은 직급도 없다. 그냥 선배와 후배만 있을 뿐이다. 팀에는 ‘장’ 급 책임자가 없다. 직원들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나누며 의사결정을 한다. 처음엔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지금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한다. 실패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 한국 회사에서 실패는 회사에서 쫓겨나는 지름길이지만, 밸브는 그렇지 않다. 에릭은 “실패나 실수에서 무언가를 배우면 되지, 책임을 질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면 프로젝트를 능동적으로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밸브의 작품 중에는 실패작이 없다.


밸브에는 ‘2’는 있고 ‘3’은 없다?
밸브는 20년 전 초심으로 돌아가 ‘도전자’의 입장에 섰다. 그들이 도전해야 할 상대는 [리그오브레전드]다. 알다시피 [리그오브레전드]는 게임 시장을 주름잡은 절대강자다. 밸브는 [도타2]로 [리그오브레전드]가 군림하고 있는 이스포츠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리그오브레전드]와 [도타2]의 빅 매치가 올 가을 게임시장의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에릭 존슨은 “[도타2]의 승부처는 이스포츠 종주국인 한국이 될 것”이라며 “한국 파트너 넥슨과 협조해 반드시 성공 시킬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 한 가지. 밸브가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LOL’이 장악한 시장에 도전할까? 그냥 [하프라이프] 시리즈만 우려먹어도 충분 할 텐데, 왜 다른 장르에 도전할까. 그 대답은 밸브가 내놓은 게임들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밸브는 똑같은 게임을 내놓은 역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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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타2 아트 디자이너 작업대. 고맙게도 취재를 위해 자리를 살짝 비켜 주었다.>


[하프라이프], [카운터스트라이크], [포탈], [팀 포트리스].... 내놓는 게임마다 혁신적인 작품들이다. 시리즈도 남발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유저들로부터 “밸브는 3이라는 숫자를 모른다.”는 원망 아닌 원망을 들을까. 밸브의 선택은 간단하다. 누구나 선택하는 안전한 길은 그들이 가는 길이 아니다. 그들이 한 번도 만들어보지 않았던 AOS 장르를 택한 이유다. 밸브는 [도타2]를 만들기 위해 AOS의 창시자 ‘아이스프로그’를 최고의 조건으로 영입했다(아이스프로그와 도타 3인방은 [리그오브레전드] 편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도타2]가 링으로 올라가는 올 가을, 세계 게임시장은 또 한 번 뜨겁게 달아오를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밸브를 나서는 길, 마지막으로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질문 하나 던졌다.

“밸브 게임은 왜 3편이 없습니까. 진짜 3이란 숫자를 모르나요.”
“그러게요. 저주라도 받은 것 같습니다. 일부러 3을 빼자는 생각은 없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웃음)”

여전히 시애틀의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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