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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순간에 끝나버린 서양식 RPG의 황금기

1980년 초 ‘로그’에서 출발한 서양식 RPG는 1990년이 되자 황금기를 맞았다. 이 시기 PC게임 하면 RPG였고, RPG하면 당연히 서양식 ‘정통’ RPG를 뜻했다. [울티마], [위저드리], [마이트앤매직], [지혜의땅] 등 걸출한 RPG가 매 해 쏟아져 나왔다. 이 당시 서양식 RPG의 영광은 무한할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이 되자 서양식 RPG의 황금기는 한 순간에 끝났다. 최신 기술인 CD-ROM과 3D 그래픽이 충격과 혼란을 몰고 왔다. 플로피디스켓 500배의 용량을 담을 수 있는 CD-ROM은 게임의 역사를 영원히 바꿨다. 또한 ‘서양식 RPG’의 길고 어두운 밤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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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의 버추어파이터]



새로운 기술은 놀라웠다. 이전까진 용량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하던 화려한 3D 그래픽과 고품질 사운드, 동영상을 아낌없이 게임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3D 기술을 앞세운 세가의 대전액션게임 ‘버추어파이터’(1993)와 소니의 콘솔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1994)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이제 모두가 ‘3D’와 ‘CD-ROM’을 마법 주문처럼 읊기 시작했다. 플로피디스켓에 담긴 2D 게임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게이머는 차원이 다른 그래픽과 사운드를 맛볼 수 있는 게임을 원했다. 스퀘어에닉스의 ‘파이널판타지7’(1997)가 대성공하며 이런 분위기는 절정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서양식 RPG는 기술의 발전에 적응하지 못했다. 2D 위주의 어드벤처 게임과 RPG를 찍어내듯 만들던 북미-유럽 게임회사들은 위기를 맞았다. 3D와 CD-ROM이라는 최신 유행을 쫓아가기 위해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장비를 구입하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다.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 시기 제작 중이던 게임 개발 프로젝트의 상당수가 차질을 빚었다. 멀쩡히 진행되던 게임 개발 프로젝트에 3D나 CD-ROM을 적용하기 위해서 프로젝트를 뒤엎는 일이 흔했다. 게다가 3D 기술에는 많은 인력이 추가로 필요했고, 개발기간도 이전보다 길어졌다. 게임 개발비의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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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티마8: 이교도’.]


이전까지 1~2년 주기로 나오던 유명 RPG 시리즈가 1994년을 기점으로 무지막지하게 길어졌다. ‘마이트 앤 매직’은 1993년 ‘마이트 앤 매직5’ 이후 5년만에야 후속작이 출시되었다. ‘울티마’ 역시 1994년 ‘울티마8: 이교도’ 이후 5년이 지난 1999년에야 ‘울티마9: 승천’이 나왔다. ‘위저드리’는 한층 더 심각해 1992년 ‘위저드리7’ 이후 9년이 지난 2001년에야 정식 후속작이 등장했다.


RPG를 만들던 게임회사의 상당수는 RPG를 포기하고 새로운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지금은 잊혀진 SSI도 그랬다. 이 회사는 TRPG ‘어드벤스드 던전 앤 드래곤(Advanced Dungeons & Dragons)’의 라이선스를 얻어 1988년부터 1994년까지 30개가 넘는(!) RPG를 제작했다. 하지만 1994년 이후 RPG 제작을 그만두고 턴 전략 게임으로 방향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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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우드의 ‘지혜의 땅’. 웨스트우드도 90년대 중반 이후 RTS로 갈아탔다.]



1995년에 이르면 PC게임 시장에서 대작 RPG는 사라져버렸다. 베데스다 소프트웍스의 ‘엘더스크롤2: 대거폴’이 거의 유일하게 선전했다. 이 시기 서양식 RPG는 둘 중 하나였다. 프로젝트가 공중분해 됐거나, 아니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개발지연의 덫에 걸려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도 아니라면 회사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콘솔 제국 일본의 등장

한편 1990년대 초반 지구 반대편에서는 ‘일본식 RPG’가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거대한 제국의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서양식 RPG가 비틀거리던 시기에 일본은 ‘파이널판타지7’로 자신들이 세계 게임 시장을 정복했음을 선언했다. 스퀘어에닉스의 3D 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된 ‘파이널판타지7’은 전 세계를 휩쓸었고, ‘일본식 콘솔 RPG가 이제 대세다’라는 인식을 게이머에게 심어주었다.


일본식 RPG가 처음부터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도 1980년대는 혼란의 시기였다. 게다가 일본은 한자입출력 문제 때문에 서양과는 다른 독자 규격 PC를 채택하면서 세계시장에 적응하지 못했다. 일본은 MSX, PC-8801등 고유한 PC를 선호했고 이들은 전용 소프트웨어가 필요했다. ‘위저드리’ 시리즈가 일본에서 특별히 인기가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의 PC에 맞춰 컨버전되었고, 일본어로 번역되어 출시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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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자드리’ 시리즈는 일본어판으로 꼬박꼬박 나왔다.]



일본산 RPG는 PC보다는 콘솔 플랫폼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재미있는 것은 초창기의 일본 콘솔 게임기는 PC시장을 노리고 발매됐다는 것이다. 1983년 등장한 닌텐도의 ‘패미컴’도 사실 ‘Family Computer’가 정식 명칭이었다. 어쨌든 일본 콘솔 게임기는 1983년 ‘아타리 쇼크’ 이후 초토화 된 세계 게임 시장을 정복했다.


일본 게임시장은 1990년대 변화를 맞는다. 90년대가 되자 일본에서 PC게임의 위상은 완전히 추락했다. 80년대 중반부터 말까지 몇몇 PC용 RPG가 흥행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IBM 호환 PC에서 일본어(와 한자)를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PC-9801 같은 독자 규격 PC는 그 의미를 상실했다. 일본식 RPG는 골치 아픈 PC게임 대신 이미 전 세계적으로 잘 나가고 있는 콘솔 게임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가장 빠르게 움직인 회사는 [파이널판타지]로 유명한 스퀘어였다.



역사를 바꾼 일본식 RPG, ‘파이널판타지7’

일본식 RPG는 패미컴과 슈퍼패미컴에서 큰 활약을 했다. 80년대 중반 조악한 모습으로 출발했던 ‘드래곤 퀘스트’와 ‘파이널 판타지’는 90년대 초가 되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게임이 됐다. 일본 콘솔 게임기가 전 세계를 장악하면 할수록, 일본식 RPG의 명성도 높아져 갔다.


1990년 중반이 되자 콘솔 게임 시장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버추어파이터’로 촉발된 3D 게임 열풍과 ‘플레이스테이션’과 ‘세가 새턴’간에 벌어진 콘솔 게임기 전쟁이었다. 이 두 가지 원인으로 인해 콘솔 게임시장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닌텐도는 한동안 뒷방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패미컴, 슈퍼패미컴, 게임보이 등 연이은 성공에 취한 닌텐도는 ‘우리가 하는 방식이 옳다’라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다. 3D가 차세대 게임 기술이 될 것임이 분명했지만, 닌텐도는 여전히 2D 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닌텐도와의 협력 프로젝트 도중 닌텐도에게 뒤통수를 맞은 소니는 게임시장 진출(겸 닌텐도에 대한 복수)을 위해 3D기능을 강조한 차세대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을 1994년 발표했다. 초반 떨떠름한 평가를 받던 ‘플레이스테이션’은 1997년 스퀘어에닉스의 RPG ‘파이널판타지7’의 흥행으로 차세대 게임기 전쟁에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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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바로 그 게임]



‘파이널판타지7’은 콘솔 게임기에서 걸작 RPG 하나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완전한 3D 그래픽과 CD-ROM의 용량을 극한까지 이용한 고화질 동영상, 고품질 음악에 모두가 찬사를 보냈다. 판타지와 SF 요소가 잘 결합된 스토리는 게임의 그래픽, 동영상과 합쳐져 게이머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파이널판타지7’의 성공은 팽팽하던 게임기 전쟁 구도를 뒤엎었다. ‘파이널판타지7’은 900만장 이상 팔렸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진영과 세가의 ‘세가 새턴’ 진영이 대립하던 구도는 ‘파이널판타지7’을 기점으로 소니의 압도적 우세로 기울어졌다. 잘 만든 일본식 RPG 하나가 게임의 역사를 바꾼 것이다.


‘일본 게임 하면 역시 RPG’라며 찬양 하는 게이머도 늘어났다. 이전까지 ‘일본식 RPG는 RPG도 아니다’라고 비아냥거리던 서양식 RPG 광팬도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제한된 일자형 진행 방식을 채택했지만, 게임의 이야기와 캐릭터 묘사는 너무나 훌륭했다.


일본식 RPG는 그 저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오랜 전통과 팬을 거느려온 서양식 RPG는 혹독한 겨울을 지내야 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양식 RPG의 반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글: 김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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