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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를 때려죽이는 게임’

1991년 한 해 동안 이드 소프트웨어는 아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해 이드 소프트웨어는 9개나 되는 게임을 만들었다. 거의 1개월에 한 개씩 게임을 찍어냈다. 연말이 되어서야 존 카멕과 존 로메로를 비롯한 이드 소프트웨어의 멤버들은 한숨 돌릴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은 이제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게임에 도전하려 했다.

 

키워드는 3D였다. 상업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존 카멕은 ‘호버탱크 3D’와 ‘카타콤 3-D’에서 3D 게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어포지 소프트웨어의 스콧 밀러 사장이 나서서 3D 게임 타령을 할 정도였으니 그가 보여준 실력을 알 만 했다. 그렇다면 어떤 3D 게임을 만들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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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슬 울펜슈타인. 코모도어64 버전이다.

 

처음에 톰 홀은 ‘커맨더 킨’ 시리즈처럼 공상과학 세계관의 액션 게임을 주장했지만 시시하다는 이유로 기각 당했다. 이드 소프트웨어 내에서 격론이 오갔다. 돌파구는 존 로메로가 열어주었다. 그는 1981년작 ‘캐슬 울펜슈타인(Castle Wolfenstein)’을 3D로 리메이크하자고 제안했다.

 

‘캐슬 울펜슈타인’은 잠입 게임의 원조(?) 격으로, 포로로 잡힌 주인공이 나치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는 성에서 탈출하는 줄거리의 게임이다. 적을 처치하고 군복을 입수해 위장할 수도 있고, 일반 경비병은 약하고 멍청(?)하지만 엘리트 나치 친위대 병사는 강하고 똑똑(?)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등 당시에는 여러가지로 혁신적인 게임이었다.

 

존 카멕과 톰 홀도 이 게임을 잘 알고 있었다. 울펜슈타인 성의 미로를 돌아다니며 때로는 적을 피해 몸을 숨기고, 때로는 적을 따는 ‘캐슬 울펜슈타인’을 3D로 옮기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이드 소프트웨어의 멤버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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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맨더 킨

 

여기에 그래픽을 맡고 있던 아드리안 카멕도 거들었다. 그는 1991년 한 해 동안 ‘커맨더 킨’ 시리즈를 3개나 작업했고, ‘커맨더 킨’ 시리즈 특유의 유치한 그래픽을 만드는데 질려 있었다. 아드리안은 만드는 김에 아주 피칠갑을 하는 그래픽으로 게임을 만들자고 거들었다. 나머지 팀원도 여기에 찬성했고, 이제부터 그들이 만들 게임은 화끈하고 쿨 한 액션 게임이 되었다.

 

일이 잘 풀리려는 모양이었는지, ‘캐슬 울펜슈타인’을 만들었던 제작사는 이미 게임 사업을 그만둔 지 오래였다.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자신들이 ‘울펜슈타인’이라는 이름을 사용해도 되냐고 묻자 쿨하게 허락해 주었다. 어포지 소프트웨어의 스콧 밀러 사장은 이 새로운 프로젝트 이야기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10만달러를 투자해 주었다.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성공

그리하여 ‘울펜슈타인 3D’ 제작이 시작되었다. 게임의 컨셉은 잠입을 주로 하던 원작보다 더 단순 하고 화끈해졌다. 존 로메로의 표현을 빌자면 “나치를 싸그리 몰살하는 게임”이었다. 로메로는 아드리안 카멕이 말한 것처럼, 사방에 피가 튀기는 액션 게임을 만들 작정이었다. 아드리안 카멕은 후에 ‘울펜슈타인 3D’의 상징이 되는 ‘피가 터지는’ 잔인한 이펙트, 시체, 피칠갑이 된 벽 등을 만들어 냈다.

 

이드 소프트웨어의 모두가 신나서 ‘울펜슈타인 3D’를 만들었다. 존 카멕은 ‘호버탱크 3D’와 ‘카타콤 3-D’에서 사용했던 엔진의 개량을 ‘울펜슈타인 3D’에서 비로소 완성했다. 미로를 돌아다니며 문을 열고 닫고, 빠르게 이동하며 적을 만나면 피떡으로 만드는 ‘울펜슈타인 3D’ 특유의 속도감은 존 카멕이 만든 엔진의 공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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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메로는 ‘울펜슈타인 3D’의 미로와 전투 디자인 등을 설계했고, 톰 홀은 ‘수집 아이템’과 ‘음식 아이템’, 비밀 장소 등을 디자인했다. 둘은 ‘울펜슈타인 3D’의 분위기를 더욱 살리기 위해 독일어 음성과 나치당의 공식 노래였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까지 집어넣었다. 

 

유통은 이전부터 이드 소프트웨어의 3D 액션 게임을 탐내고 있던 어포지 소프트웨어가 맡았다. 이번에도 쉐어웨어 방식으로 판매하기로 했다. 패키지로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에피소드별로 분할해 PC통신망에 올리면 구매자가 게임을 한 번 해 보고 마음에 들면 어포지 소프트웨어에 전화를 걸어 정품코드를 구입하는 방식이다.

 

드디어 ‘운명의 날’인 1992년 5월 5일이 밝았다. 어포지 소프트웨어는 PC통신망에 ‘울펜슈타인 3D’를 업로드했다고 연락해 왔다. 이드 소프트웨어의 멤버들은 ‘울펜슈타인 3D’의 첫 에피소드 출시 이후에도 앞으로 판매 할 추가 에피소드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신나게 ‘울펜슈타인 3D’를 만들기는 했지만, 막상 자신들도 이 게임이 그렇게 크게 성공하리라 예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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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펜슈타인 3D는 첫 달 6만불이 아니라 10만불을 벌었다.

 

이드 소프트웨어의 멤버들이 생각한 ‘울펜슈타인 3D’의 가치는 ‘기왕에 만든 게임, 이걸로 한 6만달러는 벌었으면 좋겠다’는 정도였다. 사무실 임대료만 해도 1년에 5만달러는 들었으니 이 정도면 확실히 좀 더 여유롭게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그랬다. 

 

하지만 ‘울펜슈타인 3D’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출시 한 달 뒤 어포지 소프트웨어가 ‘울펜슈타인 3D’ 로열티 지불에 대해 통보 했을 때 금액은 10만달러였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1992년 내내 ‘울펜슈타인 3D’는 미친듯이 팔려 나갔다. ‘울펜슈타인 3D’는 1992년과 1993년에 걸쳐 북미에서 가장 잘 팔린 쉐어웨어 게임으로 꼽혔다.

 

더 황당한 일은 ‘울펜슈타인 3D’는 처음에는 미국에서만 정식으로 판매했고 해외에는 아무런 홍보를 하지 않았는데도 실제 판매량 중 약 1/5은 해외에서 들어온 주문이었다. 독일에서는 ‘울펜슈타인 3D’에 삽입된 하켄크로이츠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때문에 판매 금지까지 당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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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하고 이런 피가 난무하는 그래픽을 1992년에 구현했으니 난리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울펜슈타인 3D’를 해 본 게이머들은 한결같이 ‘울펜슈타인 3D’의 화끈한 폭력성과 액션을 찬양했다. 무기를 쏘면 적이 확실하게 피떡이 되는 것도 그렇고, 바닥에 떨어진 피나 뼈까지 주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울펜슈타인 3D’의 폭력성은 확실했다. “화끈하게 나치를 죽이는 게임”이라는 컨셉에 너무도 충실했다. 단순 무식하게 전부 쏴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퍼즐 요소도 잘 섞어 놓았다는 점도 돋보이는 ‘울펜슈타인 3D’만의 매력이었다. 정말로 이전까지 이런 게임이 없었다.

 

성공, 또 성공…이드 소프트웨어의 급성장

무명이던 이드 소프트웨어는 ‘울펜슈타인 3D’로 단숨에 가장 촉망받는 게임 회사로 뛰어올랐다. 이미 ‘울펜슈타인 3D’ 개발 과정에서 이 게임의 진가를 알아본 북미 게임 유통사 시에라 엔터테인먼트(Sierra Entertainment)로부터 현금 250만달러의 인수제의가 온 적이 있었다. ‘울펜슈타인 3D’가 성공하자 여기 저기에서 이드 소프트웨어에 투자를 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존 로메로는 이런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시에라 엔터테인먼트의 인수 건은 처음에는 환영했지만 시에라 측의 초청으로 회사에 방문해 보니 이드 소프트웨어와는 기업 문화가 너무 달랐기 때문에 거절했다. 벤처 투자들의 제안은 그런 투자금에 회사가 좌지우지 될 것 같아서 거절했다. 어차피 ‘울펜슈타인 3D’로 어느 정도 여유도 생긴 마당에 굳이 돈에 목을 매달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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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의 창'. 이 괴물들은...

 

1992년 내내 이드 소프트웨어는 ‘울펜슈타인 3D’를 완성하고, 확장팩 ‘운명의 창(Spear of Destiny)’까지 내는 강행군을 거듭했다. 여전히 6명 밖에 없는 회사가 모두 감당하기에는 버거웠지만, 어쨌든 모두 열심히 일했다. ‘울펜슈타인 3D’는 PC를 넘어 온갖 기종으로 이식되었고, 더욱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렇게 성공을 거뒀지만, 존 카멕은 여전히 자신의 게임엔진에 불만이 있었다. ‘울펜슈타인 3D’로도 그의 목표를 충족하지는 못했다. ‘운명의 창’ 완성 직후 다른 멤버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존 카멕은 다이어트 콜라를 쌓아 두고 새로운 3D 엔진 개량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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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펜슈타인 3D의 표현 방식

 

존 카멕이 이렇게 게임 엔진에 집착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울펜슈타인 3D’는 완전한 3D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최대한 3D처럼 보이게 만든 2D였다. 시대의 한계 때문에 완벽한 3D를 구현하는게 당장은 어렵더라도, 존 카멕은 그래도 최대한 3D에 가까운 게임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천재의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었다.

 

뇌를 비우고 할 수 있는 액션 게임

한편 ‘운명의 창’이 완성된 후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갈렸다. 하나는 당시 흥행하고 있던 영화 ‘에일리언’의 라이선스를 기반으로 한 게임이었다. 이를 위해 20세기 폭스사와 협상을 벌였고 몇몇 부분에서 실제로 합의를 봤지만, 자유롭게 게임을 만들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곧 중단했다.

 

‘울펜슈타인 3D’같은 리메이크나 영화 ‘에일리언’ 라이선스를 이용한 게임 대신, 그냥 독자적으로 게임을 만들기로 했다. 정말로 제멋대로인 게임이었다. 영화 ‘에일리언’, ‘이블 데드2’, 심지어 TRPG인 ‘던전 앤 드래곤’에서 했던 캠페인까지 자기들이 즐겼던 온갖 매체에서 ‘쌈마이’ 한 요소를 한 데 섞어 넣은 그런 게임에서 ‘둠(Doom)’ 프로젝트는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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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소프트웨어의 멤버들은 각자 하나씩 거들었는데, 예를 들면 존 카멕은 ‘악마 vs 기술’을 컨셉으로 하자 주장했다. 존 로메로는 자기가 즐기던 ‘스트리트 파이터2’처럼 ‘대전’ 요소를 게임에 넣자고 주장했다. 게임 디자이너인 톰 홀은 나머지 멤버와는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 취향이던 공상과학을 바탕으로 치밀한 스토리와 배경설정이 들어간 액션 게임을 제안했다.

 

톰 홀의 이 제안에 존 카멕이 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존 카멕의 “게임에서 스토리란 포르노의 그것과 같다”는 명언(?)은 톰 홀과의 논쟁에서 비롯된 말이다. 존 카멕은 속된 말로 스토리 따윈 장식품인 액션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게임을 원하고 있었고, 치밀한 스토리와 배경설정 및 온갖 정교한 장치가 가미된 톰 홀의 제안은 액션 게임과 어울리지 않는다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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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마초마초한 우주해병 같은 설정은 톰 홀의 아이디어였다.

 

두 사람의 논쟁에서 승리한 쪽은 존 카멕이었다. 존 로메로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도 존 카멕의 손을 들어주었다. 최종적으로 ‘둠’은 액션에 치중한 게임으로 결정되었고, 톰 홀은 질린 나머지 이드 소프트웨어를 떠나고 말았다. (톰 홀과의 이런 불화는 몇 년 뒤 있을 존 카멕과 존 로메로가 벌일 갈등의 서곡이기도 했다.)

 

존 카멕은 ‘둠’에 한층 더 개량된 게임 엔진을 사용했다. ‘둠’이 만들어지는 동안 PC통신과 인터넷에서는 존 로메로가 “울펜슈타인 3D보다 훨씬 끝내준다”라고 이야기 하고 다니는 이 게임에 대한 토론이 끓어 올랐다. 온갖 루머가 돌아다녔고,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만들던 개발 단계의 버전이 인터넷에 유출되는 소동도 있었다.

 

“둠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였다”

1993년 12월 10일, ‘둠’의 공개 버전이 PC통신망과 위스콘신 주립대학교 메디슨 캠퍼스의 FTP 서버에 업로드 되었다. ‘둠’을 받기 위해 몰려드는 이용자로 서버는 몸살을 앓았다. 제발 여유를 가지고 ‘둠’ 파일을 받으라고 공지가 올라올 정도였다. 

 

‘울펜슈타인 3D’의 경험으로 이드 소프트웨어멤버들은 이제 ‘둠’의 성공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성공은 그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범위였다. 이 날은 게임 역사에 있어 영원히 기억될 날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고 지금도 즐기고 있는 모든 FPS는 바로 이 날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둠’은 그런 게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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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3D 그래픽, 뇌를 비우고 즐길 수 있는 화끈한 액션과 특유의 잔인성, 음산한 분위기까지 ‘둠’이 아니면 절대 맛볼 수 없는 요소들이 한 데 모여있였다. 여기에 네트워크를 통한 ‘데스매치’는 ‘둠’을 전설의 자리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이었다. ‘둠’ 멀티플레이 때문에 기업의 인트라넷과 대학 전산망이 다 같이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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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이드 소프트웨어가 그래픽과 멀티플레이를 더욱 강화한 ‘둠2’를 내놓자 북미는 말 그대로 전부 둠에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인텔이나 마이크로소프트, 카네기 멜론 대학처럼 첨단 기술을 다루는 기업과 대학 연구소에서 ‘둠’ 데스매치는 하나의 종교나 다름없었다. 존 로메로는 “둠 때문에 전 세계 직장의 생산성이 떨어질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그 말 그대로였다. 

 

이런 둠의 인기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이끌던 빌 게이츠가 한탄할 정도였다. 레드몬드에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본사는 ‘캠퍼스’로 불렸는데, 그 놈의 ‘둠’ 때문에 캠퍼스 전체가 난리통이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업무시간에 ‘둠’ 하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려왔지만 ‘캠퍼스’의 마이크로소프트 직원들은 그런 거 없이 미친듯이 ‘둠’을 즐겼다. 엑셀(Excel) 팀에서는 ‘엑셀95’에 이스터에그로 둠 스테이지를 모방한 이스터 에그를 집어넣었을 정도다.

 

▶ Windows 95 Gaming Promo Featuring Bill Gates and Doom. (1995, Microsoft)

 

심지어 ‘둠’ 시리즈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95’보다도 보급률이 높다는 이야기마저 돌았다. 빌 게이츠는 ‘윈도우95’ 판매 진작을 위해 아예 이드 소프트웨어를 인수해 ‘윈도우95용 둠’을 내놓는 계획까지 세웠다. MS의 인수 계획 자체는 무산되었지만, ‘둠’의 윈도우95 이식에 양사가 합의했다.

 

‘둠’을 두고 내린 빌 게이츠의 이 결정은 한 명의 인생과, 게임 역사까지 바꿔 놓았다. ‘둠’의 윈도우95 이식 책임자를 맡은 마이크로소프트의 고참 엔지니어가 한 명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게이브 뉴웰(Gabe Newell)이었다. 게이브 뉴웰은 ‘둠’의 윈도우95 이식을 계기로 게임에 눈을 떠(?) 1996년 마이크로소프트를 퇴직해 자신만의 회사를 세운다. 밸브(Valve)라는 이름의 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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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이브 뉴웰도 '둠' 때문에 인생이 바뀐 사람 중 하나다.

 

지난날의 동지에서 오늘날의 적으로

마치 하나의 종교라고 묘사할 정도로 1990년대 중반 ‘둠’은 다른 게임이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위치에 올랐다. 1991년 6명에서 시작한 이드 소프트웨어는 이제 북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게임 기업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 성장의 중심에는 두 천재, 존 카멕과 존 로메로가 함께 있었다.

 

존 카멕이 기술적인 면에서 이드 소프트웨어를 지탱했다면, 존 로메로는 이제 프로그래밍이 아니라 게임의 맵 디자인이나 다양한 아이디어 (예를 들면 ‘데스매치’의 도입 등) 등으로 공헌하고 있었다. 사람 만나길 싫어하던 존 카멕을 대신해 홍보, 언론의 인터뷰나 행사에 참석하는 것도 존 로메로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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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드 소프트웨어의 또 다른 걸작은 결국 두 천재 '존'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러나 ‘둠’ 개발 과정에서 회사를 뛰쳐나간 톰 홀에 이어 존 로메로도 서서히 불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존 카멕과 존 로메로, 두 사람은 서로 근본적으로 다른 인물이었다. 나는 컴퓨터와 다이어트 콜라만 있으면 된다고 말할 정도로 일에 외골수인 존 카멕과, 인생은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며 놀기 좋아하는 존 로메로는 언젠가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지난날의 동지에서 오늘날의 적이 될 때 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드 소프트웨어가 절정에 올라 있던 1996년의 어느 여름날, 존 카멕은 존 로메로에게 “당신은 프로젝트도, 회사도 망치고 있는 존재야!”라는 고함과 함께 지난날의 ‘스승’에게 결별을 고한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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