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a Form

 

동서양을 모두 통일한 게임제국, 닌텐도…그러나

1970년대 말, 막대한 빚에 짓눌려 앞날이 어둡던 닌텐도는 ‘게임&워치’를 시작으로 불과 10여년만에 전 세계 게임 시장을 장악하며 게임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 중심에는 독재자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결단이 있었다. 요코이 군페이, 우에무라 마사유키, 미야모토 시게루 등 닌텐도를 이끄는 핵심 인재를 발굴한 것도, 놀라운 ‘직감’으로 회사를 이끈 것도 야마우치 사장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닌텐도가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던 그 때, 몇 가지 실책이 이 카리스마 사장과 회사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그가 빛나는 직감으로 회사를 이끌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실책 역시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몫이었다.

 

01.jpg

 

첫 번째 실책은 ‘슈퍼패미컴’ 개발 과정에서 벌어졌다. ‘패미컴’의 뒤를 이을 차세대 가정용 게임기 계획은 이미 패미컴 출시 2년차인 1986년부터 세워져 있었다. 1987년에는 교토신문을 통해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이 ‘슈퍼패미컴’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밝히고 있었고, 1988년에는 닌텐도가 정식으로 ‘슈퍼패미컴’ 계획을 발표했다. 당초 발매 예정일은 이듬해(1989년) 7월이었다.

 

그러나 ‘슈퍼패미컴’ 개발은 여러 이유로 난항을 겪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패미컴’과의 하위호환 기능 확보였다. 이는 야마우치 사장의 고집이었다. 패미컴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잘 팔리고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런 패미컴과의 완전한 결별은 위험부담이 컸다. 이 때문에 야마우치 사장은 우에무라 마사유키에게 패미컴 게임과의 하위호환을 확보할 것을 지시했다.

 

처음에는 이 하위호환 문제를 ‘슈퍼패미컴’의 주변기기인 ‘패미컴 어댑터(가칭)’로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이 패미컴 어댑터 계획은 다른 조건과 정면 충돌했다. 바로 가격 문제였다. ‘패미컴 어댑터’가 추가되는 순간 ‘슈퍼패미컴’의 원가는 확 뛰어올랐다. 게다가 닌텐도는 ‘기존 패미컴 보유자의 패미컴과 이 패미컴 어댑터를 1:1로 교환’이라는 엄청난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단기간에 판매량을 증진시키려는 계획이었지만, 비용 면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우에무라도 이번만큼은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는 야마우치 사장을 찾아가 하위호환과 가격 중 둘 중 하나는 포기할 수 밖에 없다고 진언했다. 고심 끝에 야마우치는 이 의견을 받아들였다. 하위호환 기능은 취소되었고, 귀중한 예산과 시간만 날리고 말았다.

 

02.jpg

▶ 세가가 내놓은 16비트 가정용 게임기 '메가드라이브'는 초기에 전 세대 게임기인 닌텐도 패미컴에도 밀리는 굴욕을 겪었다.

 

닌텐도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패미컴의 엄청난 성공 때문에 해이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패미컴은 경쟁사들의 신형 16비트 게임기마저 압도하고 있었다. 1987년 10월, NEC와 허드슨은 16비트 가정용 게임기 ‘PC엔진’을 내놓았다. 이어 세가는 1988년 10월 ‘메가드라이브’를 일본에 내놓았다. 하지만 두 게임기 모두 패미컴에도 밀리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닌텐도는 일본과 북미 시장을 모두 장악했고, 당연하다는 듯 게임 유통을 비롯해 시장을 아예 대놓고 움직이고 있었다. 닌텐도에 밉보이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야마우치 사장의 철학이기도 했다. 야마우치는 슈퍼패미컴 개발이 지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원할 때 16비트 가정용 게임기로 승부에 나선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출시되었어야 할 1989년 7월, 닌텐도는 ‘슈퍼패미컴’의 발매가 ‘최소 1년’ 이상 늦춰진다고 발표했다. 닌텐도는 여전히 걱정이 없었다. 1989년 봄에 내놓은 휴대용 게임기 ‘게임보이’가 폭풍처럼 팔려 나가며 다시 한 번 닌텐도의 힘을 과시했다. 이제 정말로 닌텐도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자만을 틈탄 세가의 일격

닌텐도와 야마우치 사장이 그렇게 자만하고 있는 사이, 또 다른 독재자 한 명이 복수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세가의 나카야마 하야오 사장이었다. 그 역시 야마우치 만큼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경영인으로 유명했다. 세가는 1980년대 내내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 닌텐도에 밀리고 있었다.

 

세가가 겪은 굴욕의 절정은 1988년 10월 가정용 게임기 ‘메가드라이브’ 일본 출시 과정에서 벌어졌다. 세가는 ‘메가드라이브’를 두고 세계 최초의 ‘진짜’ 16비트 가정용 게임기라며 열심히 홍보했다. 그러나 ‘메가드라이브’는 초반 흥행에 실패했다. 비슷한 시기 닌텐도가 내놓은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3’가 훨씬 큰 주목을 받았다.

 

03.jpg

▶ 1983년부터 1998년까지 세가의 사장을 맡았던 나카야마 하야오. 그 역시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심혈을 기울여 내놓은 최신 가정용 게임기가 닌텐도의 일개 게임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자 나카야마 사장은 이를 박박 갈기 시작했다. 그는 임원 회의 때 마다 세가 중역들에게 다 함께 “천 만 대!”를 외치도록 했다. 당장 나가서 ‘메가드라이브’ 천만대를 팔고 오라는 압력이었다. 그런 구호에도 불구하고 일본 시장에서 승부는 이미 초장부터 나 있었다.

 

나카야마 사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훨씬 더 큰 규모를 자랑하는 북미 시장에서 ‘메가드라이브’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나카야마 사장도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가 통제하려 드는 지독한 독재자였지만, 이번만큼은 각오가 남달랐다. 북미 정복을 위해 전문 경영인 마이클 캐츠를 영입하고, 그에게 북미 사업의 모든 권한을 주었다.

 

1989년 8월, 세가는 북미에 ‘메가드라이브’를 ‘제네시스’라는 이름으로 출시했다. 닌텐도는 여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메가드라이브’가 별 힘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 북미라고 별 수 있겠냐는 태도였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일본에 있는 점잖은 세가가 아니라, ‘용병’을 영입해 의욕에 불타고 있는 세가 아메리카였다.

 

▶ Genesis Does What NintenDON'T [ HD ]

 

세가 아메리카는 ‘제네시스’ 홍보를 위해 게임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광고전에 나섰다. “제네시스는 닌텐도 NES가 못하는 것을 한다.”는 노골적인 내용의 광고였다. 닌텐도 아메리카의 임원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가의 이 공세에 큰 충격을 받았다. 소비자의 충격은 더 했다. ‘제네시스’가 대체 무엇인데 천하의 닌텐도도 못하는 것을 한단 말인가?

 

나카야마는 이 정도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곧 마이클 캐츠의 뒤를 이어 토마스 칼린스키가 세가 아메리카의 새로운 사령관이 되었다. 토마스 칼린스키는 더욱 공격적으로 나왔다. 닌텐도가 꾸물거리고 있는 사이 북미 시장을 몽땅 쓸어 놓겠다는 기세였다. 가격 인하 공세, ‘소닉’을 앞세운 청소년층 공략, ‘닌텐도는 애들 게임기다’라는 프로파간다까지 그야말로 범죄 빼고는 뭐든 했다.

 

닌텐도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북미에서 세가는 ‘제네시스’ 2천만대 이상을 팔아 치우며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한 때 절대군주로 군림하던 닌텐도는 1991년 8월 북미에 ‘SNES(슈퍼패미컴의 북미 버전)’를 출시하는 시점에는 이미 ‘도전자’ 입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땅 짚고 헤엄치던 좋은 시절은 순식간에 끝났다.

 

새로운 적을 스스로 만들다

닌텐도는 1990년 11월 ‘슈퍼패미컴’을 일본에 출시했다. 원가 절감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2만 5천엔이라는 비싼 가격이 되었지만, 일본에서 ‘슈퍼패미컴’의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야쿠자가 슈퍼패미컴 운송 트럭을 탈취할 것이다”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며 출시 당일 일본 전역에서 ‘슈퍼패미컴’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일본에서 닌텐도 ‘슈퍼패미컴’은 같은 16비트 게임기(?)인 세가의 ‘메가드라이브’나 NEC-허드슨의 ‘PC 엔진’을 순식간에 쓸어버렸다. 그러나 북미와 유럽에서는 세가의 ‘제네시스’와 처절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1992년 북미 게임 시장에서 세가 제네시스는 16비트 가정용 게임기 시장의 60%를 장악하며 닌텐도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04.png

▶ 사고뭉치 엔지니어 쿠타라기 켄은 닌텐도와 소니 모두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한편 이 시기, 닌텐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두 번째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닌텐도와 손을 잡고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 기웃거리던 소니의 뒤통수를 치기로 한 결정이다. ‘슈퍼패미컴’ 개발 과정에서 소니의 괴짜 엔지니어 쿠타라기 켄이 끼어들었다. 쿠타라기는 직접 설계한 사운드칩을 납품해 주겠다며 적극적인 구애(?)에 나섰다.

 

소니 내부에서도 쿠타라기 켄을 이상한 사람 취급 하고 있었지만, 닌텐도는 결국 쿠타라기 켄의 열정에 손을 들고 그의 사운드칩 납품 제안을 받아들였다. 쿠타라기 켄의 애정공세는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슈퍼패미컴 CD-ROM 어댑터를 만들자며 닌텐도를 들들 볶았고, 1989년 1월 닌텐도와 소니는 CD-ROM 플랫폼 공동 개발에 합의했다.

 

05.jpg

▶ 소니와 닌텐도가 공동개발하던 '닌텐도 플레이 스테이션' 프로토타입으로 추정되는 사진

 

그러나 1991년 봄 세계 가전 제품 박람회(Consumer Electronics Show)를 앞두고 닌텐도는 소니와 더 이상 공동개발을 지속하지 않겠다는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뒤통수를 쳤다. 당연히 이 결정은 야마우치 사장이 직접 내린 결정이었다. 닌텐도 아메리카의 아라카와 미노루 사장이 교토까지 날아와 매체의 주도권을 빼앗기면 게임 사업도 빼앗긴다고 진언한 결과였다.

 

‘모든 것을 우리가 통제’해야 하는 야마우치 사장의 입장에서 아라카와의 말대로 소니와의 합작은 결국 닌텐도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낳을 것처럼 보였다. 닌텐도는 소니의 경쟁사인 필립스를 끌어들이는 형식으로 계약을 날려버렸다. 순진한(?) 가전제품 회사인 소니가 게임 사업에서 이렇게까지 엿을 먹으면 순순히 손을 떼고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전략적 뒤통수’였다.

 

하지만 이 뒤통수는 야마우치 사장의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소니 오가 노리오 사장은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며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고, 쿠타라기 켄이 최고 경영진 회의에서 보여준 교묘한 화술에 힘입어 소니는 본격적으로 가정용 게임기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이미 북미에서 세가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닌텐도는 소니라는 새로운 적을 만들고 말았다.

 

기나긴 고난의 시작

두 번의 치명적인 실수 이후에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여전히 카리스마로 회사를 통치하고 있었지만, 닌텐도는 점점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다. 야마우치 사장은 세 번째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슈퍼패미컴’을 이을 차세대 게임기인 ‘닌텐도64’에서도 롬 카트리지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야마우치 사장이 내린 이 결정에 나름 이유는 있었다. 이 ‘롬 카트리지’는 패미컴부터 이어져 온 닌텐도 매출의 원천으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문제는 롬 카트리지 자체가 이미 시대를 역행하는 매체였다는 점이다. 화려한 3D 그래픽, 동영상, 고품질 사운드를 롬 카트리지에 담아내는 건 역부족이었다.

 

소니는 물론 세가도 대용량 CD-ROM을 매체로 채택한 마당에, 닌텐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이 보여준 이 황소고집에 서드파티들은 할 말을 잃었다. 당장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를 만들던 스퀘어부터 반발하고 나섰다. 차세대 ‘파이널 판타지’를 구현하기 위한 ‘닌텐도64’의 3D 성능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롬 카트리지의 용량에는 문제가 있다며 설득에 나섰다.

 

06.jpg

▶ 그 놈의 롬 카트리지가 문제였다

 

서드파티들의 아우성에도 닌텐도는 요지부동이었고, 그 사이 소니는 서드파티들에게 ‘플레이스테이션’에 채택한 CD-ROM 매체의 우수성과 저렴한 로열티를 무기로 내세우며 공략에 나섰다. 야마우치의 고집은 닌텐도에게 있어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다. 1996년 1월, 스퀘어는 ‘파이널판타지’ 신작을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내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패미컴부터 슈퍼패미컴까지 닌텐도의 가장 친밀한 서드파티로 여겨져 왔던 스퀘어의 이탈은 큰 충격이었다. 닌텐도는 특유의 강압적인 태도 때문에 최대의 서드파티 중 하나였던 남코를 이미 소니에 빼앗긴 상태였는데, 스퀘어까지 이탈하자 눈치를 보던 에닉스 등 나머지 서드파티도 대탈주에 나섰다.

 

07.jpg

 

게다가 스퀘어는 닌텐도 서드파티에서 그냥 탈주한 것이 아니라 닌텐도를 대놓고 조롱하고, 독자적인 게임 유통회사를 설립하며 닌텐도가 장악했던 게임 유통까지 위협하고 나섰다. 야마우치 사장은 “이제 닌텐도 게임기로는 절대 스퀘어 게임을 내주지 않겠다”며 화를 냈지만 그 뿐이었다. 소니 진영으로 이적한 스퀘어는 얼마 뒤 닌텐도 보란듯이 ‘파이널판타지7’로 대성공을 거둔다.

 

닌텐도는 1996년 6월, 뒤늦게 문제의 ‘닌텐도64’를 발매하며 차세대 게임기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서드파티가 모두 도망간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1996년 한 해 동안 ‘닌텐도64’로 출시된 게임은 단 4개뿐이었다. 일본 내 판매량은 ‘플레이스테이션’에 밀려 바닥을 기고 있었다.

 

08.jpg

▶ 닌텐도64

 

▶ 닌텐도64는 북미에서는 꽤 인기 있는 게임기였다. 닌텐도64를 선물받고 기뻐하는 꼬마들.

 

그래도 북미 시장에서 ‘닌텐도64’는 2천5백만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북미 시장에서 숨을 헐떡거리던 세가 새턴을 쓸어버리고, 전작인 ‘SNES’만큼의 판매량은 달성했으니 체면은 간신히 살렸다. ‘슈퍼 마리오 64’, ‘마리오 카트64’나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 ‘007 골든아이’ 같은 걸작 게임도 여럿 배출했다.

 

지친 독재자

닌텐도는 90년대 중반 이후 안팎으로 고난을 겪어야 했다. 이 고난의 시기에 닌텐도의 핵심 인물인 요코이 군페이도 불운을 겪었다. 3D 스펙 경쟁에 불만을 갖고 있던 요코이는 ‘남들이 따라 할 수 없는 재미의 본질을 추구하겠다’며 1995년 가상 현실 휴대용 게임기 ‘버추어 보이’를 내놓았지만 처참한 실패를 겪었다.

 

요코이 군페이는 버추어 보이의 실패 직후 ‘자신의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며 1996년 여름 닌텐도를 떠났고, 반다이와의 합작으로 휴대용 게임기 ‘원더스완’을 개발하던 도중 1997년 가을 비극적인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들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없으니 고성능에만 집착한다”며 일갈하던 거장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09.jpg

 

10.jpg

 

▶ '자칭' 휴대용 가상현실 게임기 버추어 보이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런 고난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내내 닌텐도는 계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땅 짚고 헤엄치듯 돈을 긁어 모으던 패미컴 시절의 위세는 없었지만, 닌텐도는 역시 닌텐도였다. ‘포켓몬스터’를 발굴해 수명이 끝나가던 ‘게임보이’를 되살리는 등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몇 가지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지만, 닌텐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직감은 여전히 유효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미야모토 시게루가 제작을 지휘하고 있던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에는 거의 무제한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인력과 자원이 투입되었다. 그만큼 야마우치 사장이 미야모토와 ‘시간의 오카리나’의 가치를 인정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 준 것이다.

 

11.jpg

▶ 게임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시간의 오카리나'

 

야마우치 사장은 여전히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닌텐도가 닌텐도로 남아있게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야마우치 사장도 이제 예전 같지 않았다. 1927년생인 그는 점점 힘이 다해가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야마우치 사장은 입버릇처럼 “21세기가 오면 나도 은퇴하겠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남은 것은 후계자 문제였다. 누가 이 카리스마 독재자의 뒤를 이어 닌텐도를 이끌 것인가? 우리나라처럼 일본도 창업주의 직계 후손이 대를 이어 회사 경영을 이어가는 일은 흔하다. 당장 야마우치 히로시 자신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닌텐도의 사장이 되었다.

 

실제로 닌텐도 내에 그의 뒤를 이을 만한 인척도 있었다. 닌텐도 아메리카에서 온갖 고생을 한 사위 아라카와 미노루도 있었고, 장남인 야마우치 요시히토도 1995년 닌텐도에 입사해 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닌텐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마지막 선택은 회사를 넘어 일본 사회도 깜짝 놀란 위대한 결단이었다.

 

카리스마 독재자, 야마우치 히로시의 위대한 은퇴

2002년 6월 1일, 야마우치 히로시는 반 세기만에 닌텐도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뒤를 이어 닌텐도의 사장에 오른 사람은 사위도 장남도 아니었다. 당시 42세의 이와타 사토루가 새로운 닌텐도의 사장이 되었다. 그는 닌텐도의 자회사인 ‘HAL 연구소’ 출신으로, 천재 프로그래머이자 파산 위기에 몰렸던 ‘HAL 연구소’를 부활시킨 인물이었다.

 

보수적인 대기업은 물론 게임 기업조차도 대를 이은 경영이 흔한 상황에서 야마우치 히로시가 내린 결정에 모두가 놀랐다. 말 그대로 그가 평생을 바쳐 일군 닌텐도를 직계 혈연이나 사위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었다. 여기에 이와타 사토루를 비롯해 다케다 겐요와 미야모토 시게루 등 총 6명이 대표이사에 취임하며 닌텐도를 집단경영체제로 바꾸었다.

 

12.jpg

▶ 야마우치의 뒤를 이어 닌텐도 사장이 된 故이와타 사토루. 안타깝게도 지난 2015년 암으로 5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해야 성이 차는 이 ‘카리스마 독재자’는 진작부터 혈연이 아닌 후계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닌텐도의 서드파티였던 HAL연구소는 1992년 경영 위기를 맞았다. 야마우치 히로시는 HAL연구소의 경영에 개입해 닌텐도가 자금지원을 해 주는 대가로 이와타 사토루가 경영진에 취임할 것을 요구했다.

 

HAL연구소의 천재 프로그래머로 명성이 높던 이와타 사토루의 능력을 야마우치 히로시는 진작부터 탐내고 있었고, HAL연구소의 경영위기를 맞아 그를 게임 경영인으로 키우기로 결정했다. 이와타 사토루의 지휘 하에서 HAL연구소는 ‘커비’ 시리즈와 ‘MOTHER2’ 등을 내놓으며 재기에 성공했다.

 

이와타 사토루는 온화한 독서가로 독단적인 결정이 아닌, 대화와 합의를 중시하는 성격이었다. “된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카리스마 독재자 야마우치 히로시와는 정 반대의 성격이다. 그런 그가 야마우치 히로시의 후계자가 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야마우치는 단순한 혈연이 아닌, 자신이 닌텐도를 경영하던 철학을 이어받을 사람을 선택했다.

 

13.jpg

▶ NDS 탄생의 배경에는 야마우치가 준 '화면 2개 달린 휴대용 게임기'라는 화두, 그리고 이와타 사토루의 '더 많은 사람에게 게임을'이라는 철학이 담겨 있다.

 

야마우치가 닌텐도를 이끌어온 철학의 중심에는 ‘오락’이 있다. 닌텐도는 근본적으로 오락을 제공하는 회사다. 새로운 즐거움을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어야 한다. 게임을 잘 즐기지 않던 야마우치가 “된다!”라는 일갈로 많은 성과를 일군 것도 거기에 ‘즐거움’이 담겨있다는 것을 한 눈에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사장이 된 이와타 사토루 외에도 공동 대표이사가 된 다케다 겐요와 미야모토 시게루 등은 모두 야마우치 히로시의 그 철학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사람들이었다. 노쇠한 야마우치는 이제 닌텐도 경영에서 물러나지만, 그의 의지를 이어 나갈 ‘제자’들이 힘을 합친다면 닌텐도의 미래는 영원하리라 보았다.

 

14.jpg

▶ 故야마우치 히로시. 그는 지난 2013년 9월,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야마우치 히로시는 이와타 사토루에게 “절대 게임 외의 사업에 손대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마지막 제안을 남기고 닌텐도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80년대 요코이 군페이가 만들었던 스크린 2개 달린 ‘게임&워치’를 참고해 새로운 휴대용 게임기를 한 번 만들어 보라는 제안이었다. 나머지는 이제 ‘제자들’의 몫이었다.

 

이 시기 ‘플레이스테이션2’로 승승장구하던 소니는 “게임기 전쟁은 이제 끝났다.”며 닌텐도를 비웃었지만, 이와타 사토루가 이끄는 새로운 닌텐도는 휴대용 게임기 닌텐도DS와 가정용 게임기 위(Wii)로 멋지게 부활했다. 반세기 동안 파란만장한 일을 겪으며 닌텐도를 이끌었던 카리스마 독재자 야마우치 히로시의 마지막 도박은 성공을 거뒀다.



댓글 0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