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a Form

 

열 받은 사장님

1980년 말, 미국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닌텐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노발대발했다. 무엇이 이 ‘야쿠자’ 사장님을 화나게 만들었을까? 전화를 건 사람은 닌텐도 아메리카의 아라카와 미노루 사장으로 다름 아닌 야마우치 사장의 사위였다. 아라카와는 닌텐도가 얼마 전 미국으로 보낸 아케이드 게임기 ‘레이더 스코프’ 2천여대가 몽땅 재고행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01.jpg

▶ 전 닌텐도 아메리카 사장 아라카와 미노루. 야마우치는 사위의 실수에도 자비가 없었다.

 

야마우치 사장은 사위를 사정없이 질책했다. 닌텐도의 미국 진출이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뭘 하지도 못 한 채 망할 생각이냐며 펄펄 뛰었다. 사실 아라카와도 할 말은 있었다.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엘리트 샐러리맨 코스를 밟던 아라카와를 갑자기 교토로 불러 굳이 닌텐도 아메리카를 맡아 달라고 설득한 사람은 바로 야마우치 사장 자신이었다. 그게 1980년 초의 일이었다.

 

아라카와에게 북미 사업의 전권을 준 것도 야마우치 사장이었다. 게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아라카와는 북미 게임 시장을 배우기 위해 아내와 함께 열심히 노력했다. 아라카와 사장이 처음 선택한 방법은 동네 오락기 앞에 죽치고 앉아 도대체 꼬맹이들이 무슨 오락기에 돈을 집어넣나 하루 종일 관찰하는 일이었다.

 

02.jpg

▶ 닌텐도의 초창기 아케이드 게임 '레이더 스코프'. 일본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미국에 가는 동안 유행이 끝나버렸다.

 

아라카와는 당시 북미에서 한창 번성하고 있던 아케이드 시장이 꽤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닌텐도가 만든 슈팅 게임인 ‘레이더 스코프’를 보내주면 북미에서 잘 팔릴 것 같다고 보고했다. 미국에 몇 대 시범적으로 설치해 본 ‘레이더 스코프’는 그럭저럭 괜찮은 반응을 얻었다. 아라카와는 자본금을 ‘올인’해 ‘레이더 스코프’를 전부 보내 달라고 요청했고, 야마우치 사장은 ‘레이더 스코프’ 3천대를 미국으로 보냈다.

 

하지만 아라카와 사장에게는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일본에서 미국까지 ‘레이더 스코프’ 3천대가 오는 동안 슈팅 게임 열풍은 급격히 식어버렸다. 어떻게 어떻게 천 대를 팔고 나니 판매가 뚝 끊겼다. ‘레이더 스코프’ 기계에는 먼지가 쌓여갔다. 장인 어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아라카와 사장은 고민 고민 끝에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호된 질책이 날아왔다. 

 

야마우치 사장도 당장 노발대발하긴 했지만 이대로 ‘레이더 스코프’를 미국의 창고에서 썩힐 수는 없었다. 이 기계는 대당 100만엔에 달하는 것으로 팔지 못하고 계속 창고에 처박아 두면 닌텐도 아메리카는 이대로 끝장이었다. 

 

뭔가 방도를 찾아야 했다. 야마우치는 이 골치 아픈 일을 맡아줄 사람을 찾아봤지만 공교롭게도 닌텐도 개발부는 모두 바빴다. 닌텐도의 ‘에이스’인 요코이 군페이는 ‘게임&워치’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우에무라 마사유키도 바빴다. 아라카와는 욕을 먹을 것을 알면서도 계속 전화를 걸어 도와 달라고 요청했지만 야마우치도 당장 뾰족한 수가 없었다.

 

폭탄돌리기와 불량 디자이너

요코이 군페이가 야마우치 사장에게 재미있는 제안을 했다. 당장 개발팀에는 여유 있는 인력이 없으니, 차라리 닌텐도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사내 공모전을 통해 재활용 게임을 만들자고 했다. 사실 베테랑 엔지니어는 모두 바빴으니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폭탄돌리기’나 다름 없었다. 엔지니어 없이 어떻게 게임을 만드나?

 

결국 짬 순으로 밀리다 보니 이 폭탄은 껄렁껄렁한 신참 디자이너에게 돌아갔다. 머리는 장발에 청바지를 입고 회사에 출근하는 또 다른 불량사원 이었다. 그의 반응은 “결국 내가 하게 될 줄 알았지.”였다. 3년전 닌텐도가 간당간당 할 때 아버지의 빽을 써서 들어온 그 디자이너의 이름은 미야모토 시게루였다.

 

03.jpg

▶ 미야모토 시게루

 

폭탄이 돌아온 꼴이었지만 미야모토 시게루는 겉모습과는 달리 성실하게 개발에 들어갔다. 친구들에게 3개월간은 바쁘니까 찾지 말라고 엄명(?)을 내릴 정도였다. 처음에는 만화 ‘뽀빠이’의 캐릭터를 사용해 ‘레이더 스코프’를 재활용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뽀빠이’의 저작권을 가진 회사와의 협상이 결렬되며 졸지에 미야모토 시게루는 ‘오리지널’ 게임을 만들어 내야 했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자신이 ‘공모전’에 냈던 기획안을 한 데 합쳐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냈다. ‘뽀빠이’의 악당 대신 얼간이 고릴라가 악역으로 나오고, 주인공이 그 고릴라에게 잡혀간 히로인을 구출한다는 내용의 퍼즐 게임이었다. 기존 ‘레이더 스코프’를 최대한 재활용할 수 있도록 조작은 기계를 개조하지 않고도 그대로 할 수 있게 만들었다.

 

04.jpg

▶ '재활용 게임'

 

3개월만에 ‘재활용 게임’이 완성되었다. 미야모토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속도였다. 어떻게 게임을 완성했지만 미야모토 시게루는 자신이 없었다. 기술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만든 첫 게임이었는데, 과연 이게 먹힐까 하는 불안감이 컸다. 어쨌든 게임을 완성했으니 간부들을 불러 시연을 시작했다.

 

미야모토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갔다. 게임을 시연해 본 간부들은 대부분 그저 그렇다는 반응을 보였다. 장인의 연락을 듣고 일본으로 날아온 아라카와 미노루 사장도 미야모토 시게루가 설명하는 게임 내용을 듣고는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좌절했다. “이런 평가를 듣는 게임이 팔릴 수 있을까?”

 

하지만 요코이 군페이 만큼은 그렇게 고민해서 만든 게임이니 후회없이 마음껏 해 보라며 미야모토 시게루를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이 있었다. 야마우치 사장은 하필 미야모토가 자리를 비운 사이 찾아와 게임을 쓱 훑어보고는 무뚝뚝하게 “이건 된다!”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가 버렸다.

 

05.png

▶ 동키콩. 위의 레이더 스코프 기기와 비교해보면 왜 재활용 게임인지 알 수 있다.

 

미야모토 시게루나 다른 간부들이 뭐라 생각하든 이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야마우치 사장이 된다고 하면 되는 것이었다. ‘동키콩(Donkey Kong)’이라는 이름의 이 재활용 게임은 곧 미국으로 보내 졌다. 창고 임대료도 내지 못해 쩔쩔매던 아라카와 사장은 드디어 일본에서 구세주가 온다는 소식에 환호했다.

 

재고 때문에 위기를 겪었던 닌텐도 아메리카는 ‘동키콩’ 하나로 기사회생했다. 처음 일본에서 온 ‘동키콩’을 받아 들었을 때는 닌텐도 아메리카 직원들도 본사의 간부들과 비슷한 떨떠름한 반응이었지만, ‘동키콩’은 구세주가 맞았다. 창고에서 썩어가던 ‘레이더 스코프’ 2천대를 모두 처리한 것은 물론, 추가로 ‘동키콩’ 5만여대를 북미에 판매했다.

 

“반도체 300만개를 주문한다.”

요코이 군페이가 ‘게임&워치’를 만들고, 미야모토 시게루가 ‘동키콩’을 만드는 동안 우에무라가 이끄는 개발팀은 또 다른 비밀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야마우치 사장은 ‘컬러TV 게임’의 경험을 통해 가정용 게임기가 가진 잠재력을 눈치챘다. 우에무라 마사유키도 ‘컬러TV 게임’ 개발 과정에서 여러 노하우를 쌓았고, 이제 그 능력을 발휘할 때였다.

 

야마우치 사장은 우에무라에게 난제를 내놓았다. 또 다시 ‘1만엔’에 맞춰 가정용 게임기를 내놓으라는 명령이었다. 1980년대 초 ‘PC게임’의 가격이 1만엔에 달했는데, 1만엔짜리 가정용 ‘게임기’를 내놓으라는 사장님의 명령에 우에무라는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불가능 해 보이는 조건이었지만, 우에무라는 이번에도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06.jpg

▶ 완구업체인 반다이는 1982년 마텔의 '인텔리비전'을 수입해 일본에 내놓았지만, 게임기 본체의 가격은 49800엔에 달했다.

 

처음에는 강력한 성능을 갖춘 최신 16비트 CPU를 사용하려 했다. 그런데 이 CPU를 사용하면 도저히 단가를 맞출 수 없었다. 우에무라는 낡고 느리지만, 안정적이고 저렴한 8비트 CPU를 장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모자라는 성능은 닌텐도 엔지니어들이 두뇌를 최대한 가동해 만든 보조 반도체를 이용해 채우기로 했다.

 

하루에 18시간씩 가정용 게임기 개발에 매달리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피로에 지친 나머지 실수로 전원을 뽑아 개발하던 내용을 날려 먹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우에무라가 이끄는 개발팀은 차츰 가정용 게임기의 꼴을 갖춰 나갔다. 1만엔에 맞추라는 야마우치 사장의 조건은 너무나 가혹했지만, 엔지니어들에게는 도전해 볼 만한 과제였다.

 

야마우치 사장은 단가 문제로 고민하던 우에무라에게 쓸데없는 부분은 모조리 들어내라고 지시했다. 우리가 만들려는 기계는 가정용 게임기이지, PC가 아니니까 키보드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모뎀 같은 쓸데없는 주변기기는 붙일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가정용 게임기는 최대한 ‘장난감’에 가까운 냄새를 풍겨야 한다고 주문했다.

 

07.jpg

▶ 패미컴의 주변기기 '광선총'. 이후 패미컴의 장난감틱한 디자인과 더불어 북미 진출의 발판이 된다.

 

설계가 끝나갈 무렵 또 다른 난제가 우에무라의 앞을 가로막았다. 반도체 칩의 공급이었다. 여기저기 반도체 업체를 찾아다녔지만 대부분 닌텐도의 생산 계약을 거절했다. 문제는 또 가격이었다. 야마우치 사장은 우에무라에게 반도체 칩 단가가 개당 2천엔을 넘기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했고, 이런 가격을 맞춰줄 업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리코(Ricoh)였다. 리코는 반도체 사업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고, 닌텐도가 발주한다는 반도체 칩 생산에 관심을 보였다. 닌텐도 쪽에서 설계 변경이 필요하면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받아냈다. 그러나 2천엔이라는 단가만큼은 리코도 선뜻 맞춰 주기 어려웠다.

 

이번에도 야마우치 사장의 직감이 빛을 발했다. 우에무라에게 가서 2년동안 300만개의 반도체를 주문하겠다고 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실로 터무니없는 물량이었다. 당시 일본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린 가정용 게임기도 판매량은 고작 40만대에 불과했다. 그런데 닌텐도가 2년동안 300만개의 반도체 칩을 소화한다고? 리코도 우에무라도 황당했지만 그렇게 반도체 생산 계약은 체결되었다.

 

이 색이 좋겠군

닌텐도가 내놓을 새로운 가정용 게임기에는 ‘패밀리 컴퓨터’라는 이름이 붙었다. 비용 절감을 위해 야마우치 사장의 명령대로 필요 없는 기능은 다 떼어 냈지만, 딱 하나 ‘쓸데 없어 보이는’ 기능이 붙어 있었다. 앞으로 밀면 게임 카트리지가 통 하고 튀어나오는 레버였다. 이 레버는 요코이 군페이의 아이디어였다. 아이들이 좋아할 기능이었다.

 

패밀리 컴퓨터 특유의 십자키가 붙은 컨트롤러도 요코이 군페이가 만들어 주었다. 이 컨트롤러는 원래 ‘게임&워치’에 사용했던 것인데, 양손으로 컨트롤러를 쥐고 엄지 손가락만으로 조작할 수 있어 아주 편리했다. 그리고 반은 장난삼아 미래에 게임에 활용하도록 컨트롤러에 마이크가 부착되었다. (이 마이크를 활용한 대표적인 패미컴 게임으로는 ‘젤다의 전설’이 있다)

 

08.jpg

▶ 닌텐도 패밀리 컴퓨터

 

재미있게도 게임기의 도색은 야마우치 사장이 직접 골라주었다. 어느 날, 우에무라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던 야마우치 사장은 빨간색 간판을 가리키며 저런 색이 좋지 않겠냐고 이야기했다. 다음날에는 빨간색 목도리를 가져오더니 우에무라에게 보여주며 이 색이 좋다고 강조했다. 무뚝뚝한 사장님의 이상한 고집에 우에무라는 흰색과 적색 투 톤을 사용하기로 했다.

 

우에무라는 최대한 생산비용을 절감하는 설계를 했지만 결국 야마우치 사장이 제시한 조건인 1만엔은 맞출 수 없었다. 최종 소비자 가격은 14800엔으로 결정했다. 이 정도도 다른 가정용 게임기나 PC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싼 가격이었다. 발매 한 달 전인 1983년 6월에는 도매상을 위한 설명회를 열었다. 가격을 듣고 도매상들은 깜짝 놀랐다.

 

닌텐도는 도매상들에게 ‘패밀리 컴퓨터’가 싼 가격이지만, 일단 출시만 되면 엄청나게 팔려 나가 큰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설득했다. 지금 닌텐도를 도와주면 앞으로 게임기나 게임을 팔 때 그만한 보답을 해 주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반응은 다양했다. 외면한 도매상도 있었지만, 닌텐도를 믿고 15000대나 주문한 도매상도 있었다. 소비자가로 치면 2억엔 이상의 물량이었다.

 

1983년 7월 15일, 닌텐도는 가정용 게임기 ‘패밀리 컴퓨터’를 일본 시장에 내놓았다. 같은 날 아케이드 게임의 고참인 세가도 가정용 게임기 ‘SG-1000’을 내놓으며 선전포고했다. 닌텐도는 ‘게임&워치’로 확보한 ‘실탄’을 써서 대대적인 마케팅에 나섰고, 2개월만에 50만개를 판매하며 가정용 게임기 판매량 신기록을 세웠다.

 

전부 거둬들여라

닌텐도 패밀리 컴퓨터는 6개월도 되지 않아 첫 번째 암초를 만났다. 불량 문제였다. 패밀리 컴퓨터의 불량을 이유로 반품을 요구하는 건수가 갑자기 증가하고 있었다. 패미컴의 개발 책임자인 우에무라 마사유키와, 닌텐도 최고참인 요코이 군페이, 그리고 총무부장 이마니시 히로시가 사장실로 소환되었다. 반품의 원인을 최대한 빨리 찾아내 보고하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엔지니어들이 미친듯이 매달린 결과 불량의 원인은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회로 설계에 문제가 있어 특정 게임을 실행하면 게임기에 이상이 생겼던 것이다. 다시 사장실로 세 명이 소환되었다. 하필 최대 대목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는 중요한 시기였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곧 격론이 벌어졌다.

 

우에무라는 문제가 되는 설계를 최대한 빨리 수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요코이는 더 문제가 커지기 전에 시중에 풀린 패미컴을 몽땅 수거하고, 신제품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마니시는 경영의 관점에서 모든 게임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아니고, 대목인 연말 시즌에 반품과 재출시를 실시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다. 

 

09.jpg

▶ 패미컴의 내부 구조 (출처: http://www.retrogarden.co.uk/features/famicom-teardown/ )

 

세 사람의 토론을 듣고 있던 야마우치 사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야마우치 사장은 실수에 자비가 없는 스타일이었다. 사위인 아라카와조차 ‘사고’를 치면 온갖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했다. 하물며 연말 대목을 앞둔 시기에 이런 사태가 터졌으니, 곧 이어 쏟아질 야마우치 사장의 불벼락에 세 사람은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야마우치 사장은 특유의 무뚝뚝한 톤으로 지시를 내렸다. “문제가 있는 제품을 당장 거둬들여라.” 그것으로 토론은 끝이었다. 시중에 풀려 있던 패밀리 컴퓨터가 모두 닌텐도 공장으로 회수되었다. 닌텐도 내부에서도, 도매상도 깜짝 놀랐다. 문제를 스스로 인정하고 1년 중 가장 대목인 연말 시즌을 포기하는 짓은 자살행위였다.

 

회수와 재포장을 위해 닌텐도 전 직원이 휴일을 반납해야 했다. 우에무라는 회로를 수정한 새로운 패밀리 컴퓨터를 내놓았지만, 닌텐도는 결국 그 해 연말 대목을 놓치고 말았다. 제품 회수와 연말 대목을 놓친 대가로 닌텐도는 막대한 손실을 보아야 했다. 다행히 ‘게임&워치’로 쌓아 놓은 자본으로 버틸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이건 된다!”

야마우치 사장의 결정으로 닌텐도는 당장 막대한 손실을 보았지만, 패밀리 컴퓨터의 판매량은 절대 꺾이지 않았다. 이듬해인 1984년이 되자 일본 시장에서 패밀리 컴퓨터를 따라올 경쟁자는 더 이상 없었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기웃거리던 가전제품 회사들은 손해만 입고 철수해야 했다. 패밀리 컴퓨터는 이제 황금이 열리는 나무로 추앙 받기 시작했다.

 

서드파티 1호 허드슨의 ‘로드러너’는 170만장이 팔려 나갔다. 남코의 ‘제비우스’는 150만장이 팔렸다. 이전까지 일본 게임 시장의 주류이던 PC게임 시장에서는 볼 수 없던 어마어마한 매출이었다. 유명 게임 회사들이 앞다투어 닌텐도에 찾아왔다. 닌텐도는 엄격한 조건을 제시했지만, 모두들 서드파티가 되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10.jpg

▶ 남코의 제비우스

 

한 손에 ‘게임&워치’, 다른 손에 ‘패밀리 컴퓨터’를 들고 있었지만 닌텐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아직 성이 차지 않았다. ‘패밀리 컴퓨터’의 더욱 폭발적인 흥행을 이끌 게임이 필요했다. 야마우치 사장은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가 다 통제해야 하는 성격이었고, 그런 게임은 당연히 닌텐도 스스로가 만들어 내놓아야 했다.

 

새로운 개발정보부 과장이 사장실로 호출되었다. 야마우치 사장은 ‘100명의 평범한 사람보다 1명의 천재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야마우치가 고른 천재는 닌텐도 입사 6년만에 과장의 자리에 오른 미야모토 시게루였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야마우치 사장은 미야모토에게 난제를 던져주었다.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해 지금까지 없었던 게임을 만들어 오게.”

 

11.jpg

▶ 사실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바둑 정도를 제외하면 게임을 거의 즐기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건 된다!"는 엄청난 '적중률'을 발휘했다.

 

닌텐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번 “이건 된다!”라는 말을 던지게 된다. 지금까지 야마우치 사장의 “이건 된다!”는 여러 번 성공을 거뒀지만, 이번에는 그 성공의 크기가 달랐다. 게임 산업, 아니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역사에 영원히 남을 ‘세기의 된다’였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댓글 0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