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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에서 시작된 가정용 게임기 프로젝트

이야기는 다시 197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코이 군페이가 가져온 물건을 보고 야마우치 히로시가 “된다!”라고 하면 양산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이 시기의 닌텐도는 체계적이기 보다는 주먹구구에 가까운 방식으로 개발 및 양산을 하고 있었다.

 

요코이 군페이뿐 아니라 닌텐도 직원 누군가 개발 아이디어를 들고 오면 야마우치 사장이 직접 보고 양산을 결정했다. 10만대나 팔려 나간 닌텐도의 ‘간이복사기’도 그런 결과물이었다. ‘간이복사기’에 고무된 닌텐도 직원들은 이번에는 당시 핫 아이템이던 ‘전자계산기’ 생산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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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P가 1974년 발매한 전자 계산기 HP-65. 이 계산기 역시 닌텐도의 운명을 바꿔놓은 주역(?)중 하나다. 후에 닌텐도의 사장까지 오른 이와타 사토루가 이 HP-65로 처음 프로그래밍에 입문했다.

 

그러나 계산기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에 가까웠고, 닌텐도 계산기의 발매 계획은 무산되었다. 대신 닌텐도가 선택한 길은 엉뚱하게도 가정용 게임기였다. 오일쇼크 때문에 실패한 닌텐도 광선총 사격장 사업에는 대기업 미쓰비시도 관련되어 있었는데, 이 미쓰비시가 닌텐도의 운명을 다시 한 번 바꾸어 놓았다.

 

1970년대 중반, 미쓰비시는 게임기용 반도체를 개발하고 있었다. 본래 다른 업체와 협력해 가정용 게임기를 내놓는다는 전략이었지만, 정작 게임기용 반도체를 완성하자 그 업체가 도산해 버리고 말았다. 난처해진 미쓰비시가 새로운 협력 업체로 찾은 것이 광선총 사격장 사업에서 알게 된 닌텐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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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에무라 마사유키. 샤프 출신의 엔지니어로 요코이 군페이의 스카우트로 닌텐도에 입사, 이후 '패밀리컴퓨터' 제작의 주역이 되는 개발 제2부의 부장으로 승진한다.

 

미쓰비시는 전자 장난감 제작으로 유명한 닌텐도에 이번에는 가정용 게임기를 만들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닌텐도 내부에서는 토론이 벌어졌다. 우에무라 마사유키는 미쓰비시의 제안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본래 샤프 출신으로, 요코이 군페이가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에게 스카우트를 제안해 1971년 닌텐도에 합류한 엔지니어였다.

 

우에무라 마사유키는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에게 미쓰비시의 제안을 받아들여 가정용 게임기 개발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오일쇼크의 여파로 여전히 회사가 허덕이고 있었지만 야마우치 사장은 우에무라의 과감한 계획을 승인해 주었다.

 

야마우치 사장이 던진 난제

사실 닌텐도는 ‘컬러 TV 게임’ 시리즈를 개발하기 전까지 가정용 게임기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닌텐도는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 후발주자였다. 1972년 미국 마그나복스(Magnavox)사가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오딧세이(Odyssey)’를 내놓은 이후 1970년대 내내 시장에서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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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그나복스가 1972년 내놓은 오딧세이. 가정용 게임기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퐁’을 만든 아타리가 1975년 가정용 ‘홈 퐁(Home Pong)’을 OEM 방식으로 내놓았고, 일본의 장난감 기업인 에폭(Epoch)사도 1975년 테니스 게임기를 내놓았다. 미국 가죽 가공 업체였던 콜레코도 이 시기 가정용 게임기 사업으로 전환해 1976년 가정용 게임기를 내놓았다. 심지어 반도체 회사인 페어차일드도 가정용 게임기 사업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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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체 회사 페어차일드(Fairchild Semiconductor)가 1976년 내놓은 '페어차일드 채널 F' 게임기.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미쓰비시가 가정용 게임기 반도체를 가져와서 합작하자고 해도 그게 성공할 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우에무라 마사유키는 미쓰비시의 제안이 “된다”고 생각했고,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도 마찬가지로 “된다”고 생각하고는 가정용 게임기에 회사의 운명을 걸어 보기로 했다.

 

야마우치 사장은 이 가정용 게임기 프로젝트를 이끌게 된 우에무라에게 어려운 조건을 붙였다. 1만엔 이하의 소비자 가격으로 게임기를 내놓으라는 조건이었다.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논리는 이러했다. “이미 에폭의 가정용 게임기가 19500엔에 나와있다. 경험도 없는 후발주자인 우리는 가격으로 승부할 수 밖에 없다. 무조건 1만엔 이하에 내놓아라.”

 

닌텐도는 이전까지 게임기 개발 경험이 없었지만, 미쓰비시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개발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계산해 봐도 야마우치 사장이 제시한 1만엔 조건만큼은 맞출 수가 없었다. 우에무라가 야마우치 사장에게 찾아가 원가를 맞출 수 없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야마우치는 단호했다.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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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폭이 1975년 내놓은 일본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테레비테니스(テレビテニス)'. 19500엔의 가격이었다. (출처: http://www.geocities.co.jp/Playtown-Bingo/9639/mario2.html )

 

난제를 멋지게 해결하다

우에무라는 궁리 끝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들고 갔다. ‘무조건 1만엔이라는 조건은 도저히 맞출 수 없다. 대신 같은 게임기를 1만 5천엔짜리 ‘고급형’과 9800엔짜리 ‘염가형’으로 분리해 발매하자. 저가형은 고급형에 있는 일부 기능을 막아서 발매하면 생산 원가도 절감할 수 있고, 야마우치 사장이 말한 가격승부도 될 것이다.’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우에무라의 이 전략에 만족했고, 양산 허락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1977년 닌텐도는 미쓰비시와의 합작을 통해 만든 첫 가정용 게임기를 내놓을 수 있었다. 이것이 ‘컬러 TV 게임6’과 ‘컬러 TV 게임15’다. 둘은 사실상 동일한 하드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컬러TV 게임6’은 ‘컬러 TV 게임15’에 있는 기능을 일부러 막아 염가형으로 발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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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닌텐도가 미쓰비시와의 합작으로 내놓은 가정용 게임기 컬러TV 게임6

 

‘컬러TV 게임6’은 9800엔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의 가정용 게임기로 화제가 되었다. 이 시기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 진입하려던 일본 가전업체들은 ‘컬러TV 게임6’의 가격을 보고 망설였다. 우에무라가 골치를 썩었듯, 그 가격에 가정용 게임기를 내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가전업체들은 가정용 게임기 시장 진입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정작 판매량 자체는 15000엔짜리 ‘컬러TV 게임15’쪽이 훨씬 높았다. ‘컬러TV 게임6’은 일종의 미끼상품 역할을 했다. 일단 9800엔이라는 저렴한 가격을 보고 소비자들이 ‘컬러TV 게임’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찾아보니 고급스러운 외형과 더 많은 게임을 제공하고 있는 ‘컬러TV 게임15’도 있었다. 이 시점에서 15000엔 정도면 나름 합리적인 가격으로 여겨졌고, 많은 소비자가 결국 고급형을 구입했다. 전체 판매량 중 약 70%가 고급형 ‘컬러TV 게임15’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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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급형' 컬러TV 게임 15.

 

닌텐도, 그리고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도박은 성공을 거두었다. ‘컬러TV 게임’ 시리즈는 생산종료까지 최소 150만대, 최대 300만대까지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두 가지로 분리해 발매한다는 우에무라의 전략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컬러TV 게임’ 시리즈의 성공은 우에무라의 기발한 전략도 전략이지만, “10000엔 이하가 아니면 안 된다.”던 야마우치 사장의 고집이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광선총 사격장’의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던 닌텐도에게 ‘컬러TV 게임’ 시리즈는 새로운 돌파구였다. 사실 ‘컬러TV 게임’ 자체가 무조건 닌텐도를 살려줬다고 보긴 어렵다. 이 제품은 어디까지나 미쓰비시와의 합작으로 만들었고, 우에무라가 ‘묘안’을 짜낼 정도로 제품의 가격을 낮췄기 때문에 이익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닌텐도는 당장의 이익보다 더욱 귀중한 것들을 얻었다. ‘컬러TV 게임’ 시리즈 개발 과정에서 닌텐도 엔지니어들은 가정용 게임기 제작에 필요한 여러 노하우를 미쓰비시에서 배웠다. ‘컬러TV 게임’의 성공을 통해 닌텐도가 이제 전자 게임기를 만든다는 시장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고집인 “본체가 저렴해야 한다”가 옳다는 교훈도 얻었다.

 

야마우치가 자동차 안에서 결정한 ‘역전의 발판’

1977년 닌텐도에 입사한 미야모토 시게루는 당시 닌텐도의 상태를 두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겠다 싶어 입사했는데, 실제로는 회사가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라고 회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컬러TV 게임’에 이어 역전의 발판이 되어줄 또 다른 ‘아이디어 상품’은 이미 닌텐도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구원투수는 역시 요코이 군페이였다.

 

‘컬러TV 게임’이 시장에 나올 무렵, 요코이 군페이는 출장 때문에 신칸센을 타고 있었다. 이 기차 여행의 와중에서 요코이 군페이는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근처 좌석에 타고 있던 점잖은 샐러리맨이 지루함을 이기려고 휴대용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리며 놀고 있었다. 

 

이 안쓰러운 모습(?)을 보고 요코이의 머리를 스친 아이디어가 있었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신칸센에서도 꺼내 즐길 수 있는, 휴대용 계산기만큼 작은 크기의 게임기를 만들 수는 없을까?’ 요코이가 품은 이 막연한 아이디어는 우연한 기회를 통해 현실이 되고, 닌텐도를 ‘거물’로 만들어주는 역전의 발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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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에서 돌아온 얼마 뒤, 요코이 군페이는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차를 대신 운전하게 되었다. 차 안에서 사장과 이런 저런 잡담을 하다가 요코이는 얼마 전 자신이 신칸센에서 본 풍경과, 그 풍경을 보고 영감을 얻은 신제품 컨셉에 대해 이야기했다.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요코이의 말에 대단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음, 그렇지.” 정도였다.

 

그러나 그 날 요코이 군페이는 야마우치 사장의 행동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요코이가 운전하던 차에서 내린 야마우치 사장은 모임에 참석했는데, 여기에 함께 참석한 샤프의 사장에게 즉석에서 요코이의 휴대용 게임기 컨셉을 이야기하고 샤프가 액정을 공급해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야마우치 사장 특유의 직감, “이건 된다”를 또 한 번 발휘한 것이다.

 

때마침 시기도 적절했다. 샤프는 휴대용 계산기 액정 생산을 위해 공장을 증설했다가, 계산기 시장 포화로 재고가 쌓여 골치를 썩던 상황이었다. 그 액정을 닌텐도가 구입해 주겠다고 제안하니 반길 수 밖에 없었다. 닌텐도로 돌아온 요코이 군페이는 즉시 이 새로운 휴대용 게임기의 개발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닌텐도 역전의 발판, 휴대용 게임기 ‘게임&워치’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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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프가 1971년 내놓은 휴대용 계산기 EL-8.

 

전권이 주어지다

요코이 군페이는 1979년 닌텐도 개발 제1부의 부장으로 승진했다. 심심해서 장난감을 만들던 불량 사원은 이제 닌텐도의 미래를 책임질 핵심 인재로 성장해 있었다.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요코이 군페이가 진행하는 휴대용 게임기 개발에 힘을 실어주었다. 요코이 군페이가 ‘게임&워치’개발에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다른 부서에서 사람을 끌어올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요코이 군페이는 닌텐도의 각 부서에서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등 온갖 인재를 끌어왔다. ‘컬러TV 게임’ 개발과 마찬가지로 닌텐도는 이전까지 휴대용 게임기 경험이 없었기에 액정과 칩을 공급해 줄 샤프에 엔지니어를 보내 기술을 배워오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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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워치 개발과정에서 제작한 수제 '프로토타입' (출처: http://trendy.nikkeibp.co.jp/article/special/20080929/1019225/ © Nikkei Business Publications)

 

그런데 샤프의 엔지니어들은 닌텐도 엔지니어들이 제안한 컨셉에 난색을 표했다. 휴대용 계산기 정도의 액정 수준이나 칩의 처리 능력으로는 그런 컨셉을 기술적으로 실현하기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요코다 군페이와 엔지니어 오카다 사토루가 짜낸 묘안은 직접 손으로 프로토타입 모형을 만든 다음, 샤프 엔지니어에게 보여주고 ‘이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냐?’ 설득하는 방법이었다.

 

원래 신칸선 안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비즈니스 맨을 겨냥한 상품이었던 ‘게임&워치’의 컨셉은 개발 과정에서 설명서 없이 누구나 바로 즐길 수 있는 간단한 휴대용 게임기로 바뀌었다.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이번에도 가격 제한선을 두었다. 5000엔이었다. 이를 위해 ‘게임&워치’에 들어가는 부품은 기존에 양산되던 것 중 최대한 저렴한 것으로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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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 1980년대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는 사진이다.

 

“더 작게, 더 저렴하게 만들라고 할 줄 알았는데 반대로 더 큰 화면의 게임&워치를 내놓으라는 야마우치 사장의 지시를 받았다.” – 요코이 군페이

 

남들과는 정 반대로 가라, 독재자 사장님의 이상한 지시

1980년 4월, 닌텐도의 첫 휴대용 게임기 ‘게임&워치 볼(Ball)’이 일본에 발매되었다.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이 제시했던 가격 기준인 5000엔은 결국 달성하지 못했고, 5800엔의 가격으로 발매되었지만 이 정도도 저렴한 가격이었다. ‘워치’라는 이름답게 전자식 시계 기능도 들어 있었다. 

 

요코이 군페이는 ‘게임&워치’가 한 10만개 팔리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첫 해 60만개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게임&워치’가 히트하자 곧 비슷한 휴대용 게임기가 잇달아 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완구 업체, 계산기 업체, 심지어 소련에서도 ‘게임&워치’의 짝퉁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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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워치 Ball

 

오리지널 닌텐도 ‘게임&워치’에 대항해 경쟁자들이 내세운 전략은 ‘게임&워치’에 비해 액정의 크기를 작게 만들고 가격을 내리는 것이었다. 이에 어떻게 대항해야 할 지 골머리를 앓던 요코이 군페이에게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이 내린 지시는 엉뚱했다. 가격을 약간 더 올리더라도, 화면을 더 크게 해 차별화 하라는 지시였다. 경쟁사들의 공세와는 정 반대 방향이었다.

 

1981년 닌텐도 ‘게임&워치’ 와이드 버전이 등장했다. 이 모델은 기존 ‘게임&워치’에 비해 가격은 조금 더 비싸지만, 양 옆으로 화면의 크기를 더 길게 만들었다. 와이드 버전이 히트한 후에도 야마우치 사장의 엉뚱한 지시는 또 이어졌다. 요코이 군페이에게 이번에는 화면이 두 개인 ‘게임&워치’를 만들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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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워치 와이드 스크린 버전

 

요코이 군페이는 고심 끝에 두 개의 스크린을 사용하는 ‘게임&워치’인 ‘게임&워치 오일 패닉’을 1982년 내놓을 수 있었다. 이어 닌텐도의 아케이드 게임을 이식한 ‘게임&워치 동키콩’도 멀티스크린으로 내놓았다. 경쟁자들은 잇달아 신제품을 내놓는 닌텐도를 쫓아올 수 없었다. ‘게임&워치’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며 닌텐도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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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워치 오일 패닉. 멀티스크린 아이디어도 야마우치 사장의 지시였다.

 

자동차 안에서 들은 요코이 군페이의 이야기를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즉석에서 “이건 된다!”며 결정한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직감은 놀라운 성과를 냈다. 빚에 쪼들리던 닌텐도는 ‘게임&워치’ 하나로 빚을 모두 청산함은 물론 막대한 현금을 보유하게 되었다. 야마우치 사장의 ‘게임&워치’ 개량 지시는 판매량에 더욱 불을 붙였다. 1982년 닌텐도의 매출은 661억엔에 달했다. 전 해의 3배에 달하는 실적이었다.

 

‘게임&워치’는 시작에 불과했다. 게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정용 게임기와 게임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된다!” 한 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아케이드 게임 ‘동키콩’, 가정용 게임기 ‘패밀리 컴퓨터’, 그리고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다. 후에 ‘게임의 신’으로 추앙 받는 미야모토 시게루의 성장 뒤에는 닌텐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무뚝뚝한 지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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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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