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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독재자’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라는 유명한 격언도 독재자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게임의 역사에서 이 ‘독재자’라는 말은 게임 기업을 키워낸 경영인의 뚝심을 비유하는 말로 쓰일 때도 있다. 닌텐도의 3대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山内 溥, 1927~2013). 그야 말로 ‘위대한 독재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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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닌텐도를 본격적인 게임 기업으로 일군 故야마우치 히로시(山内 溥, 1927~2013)

 

“나 말고는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었다.” – 야마우치 히로시

 

망나니 도련님, 하루 아침에 사장이 되다

닌텐도는 1889년 야마우치 후사지로의 화투가게에서 시작된 회사다. 1대 사장 야마우치 후사지로는 일본의 개화기를 틈타 자신이 디자인한 화투를 파는 ‘임천당골패’라는 회사를 세웠다. 입소문을 타고 성장하던 ‘임천당골패’는 일본 정부의 화투 단속 때문에 위기를 맞았다. 그러자 후사지로는 화투 대신 트럼프를 팔며 위기를 극복했다.

 

후사지로의 뒤를 이은 2대 사장 야마우치 세키료는 직계 후손이 아니라 데릴사위였다. 세키료 역시 아들이 없어 대를 잇기 위해 다시 데릴 사위를 데려왔는데, 그가 야마우치 시카노조로 야마우치 히로시의 아버지다. 하지만 야마우치 시카노조는 닌텐도의 대를 잇지 않고 다른 여성과 사랑의 도피를 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 불행을 겪었지만 조부모는 야마우치 히로시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주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했지만, 야마우치 가문과 히로시에게 그런 건 남의 일이었다. 풍족한 환경에서 놀기 좋아하던 도련님은 ‘도쿄에서 놀고 싶다’라는 이유로 도쿄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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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닌텐도의 옛 명판. 본업이었던 '플레잉 카드'라는 단어가 대문짝만하게 새겨져 있다.

 

야마우치 히로시가 학업을 핑계로 고향을 떠나 도쿄의 단독주택에서 당구를 치며 와인을 마시는 망나니 생활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야마우치 히로시는 자기가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사실, 정확하 말하면 ‘화투’를 싫어했다. 화투로 도박중독자나 양산한다며 비난하는 이야기까지 들어야 했으니 반발심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도련님 생활은 갑자기 끝났다. 1949년 2대 사장 야마우치 세키료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본래 세키료의 뒤를 이었어야 할 아버지가 도망쳤기 때문에 남은 후계자는 야마우치 히로시 뿐이었다. 그는 좋든 싫든 22세의 나이로 갑자기 가업을 이어야 했다. 야마우치 히로시는 다른 친척이 절대 경영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워 3대 대표이사 겸 사장으로 취임했다.

 

야마우치 히로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회사명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가 회사를 물려받을 당시 이름은 주식회사 마루후쿠(丸福)라는 이름이었다. 1951년, 3대 야마우치는 회사 이름을 다시 원래의 ‘임천당골패’, 즉 닌텐도로 바꾸었다. 이전까지 수작업으로 하던 화투 및 트럼프 생산도 점차 기계화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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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닌텐도는 일본 최초로 플라스틱 카드의 양산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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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닌텐도가 내놓은 '디즈니 트럼프'

 

젊은 야마우치 히로시는 예상 외로 회사를 잘 이끌어 나갔다. 1953년에는 일본 최초로 플라스틱 트럼프 카드의 양산에 성공하고, 1959년에는 디즈니의 라이선스를 얻어 ‘디즈니 트럼프’를 발매해 큰 인기를 얻었다. 이 ‘디즈니 트럼프’의 성공을 계기로 젊은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와 닌텐도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이전까지 닌텐도가 만들던 화투나 트럼프는 어른들이 도박 할 때 쓰던 도구에 지나지 않았지만, ‘디즈니 트럼프’는 특이하게도 아이들을 겨냥해 놀이도구로 발매된 제품이었다. 도박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진짜 ‘카드놀이’의 설명서가 동봉되어 발매되었고, 큰 성공을 거뒀다. 플라스틱 트럼프 카드와 디즈니 트럼프의 잇단 히트로 닌텐도는 1962년 오사카 및 교토 증권 거래소에 상장하는데 성공했다. 농땡이 도련님은 불과 10여년만에 젊고 능력 있는 경영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나는 절대 트럼프 카드 공장으로 끝나지 않겠다”

야마우치 히로시의 야망은 생각보다 컸다. ‘디즈니 트럼프’도 회사를 다른 방향으로 키우기 위한 새로운 시도 중 하나였다. 1958년 야마우치 히로시는 당시 북미 최대의 카드 제조 회사인 United States Playing Card Company를 방문했다. 이 곳은 1867년에 설립된 닌텐도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카드회사였다. 

 

야마우치는 이 회사를 방문해보고 충격을 받았다. 북미 최대 규모로 전 세계에 수출하는 카드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무실도 공장도 상상외로 소박했다. 그보다 더 좁은 시장인 일본에서 노는 닌텐도의 미래는 뻔했다. 야마우치가 일본으로 돌아와 디즈니와 협업을 통해 ‘디즈니 트럼프’를 내놓은 것은 화투나 카드에서 벗어나 더 큰 물에서 놀겠다는 발버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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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오하이오주 노우드(Norwood)에 있는 USPC의 옛 공장. 이 회사는 지금도 직원수가 채 1000명이 되지 않는다.

 

그는 일본 내 자동차 보급 열풍에 편승해 1960년 택시회사인 ‘다이야 교통’을 설립하고, 1961년에는 섬유회사 오미켄시와 합작해 ‘뜨거운 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밥’을 생산하는 식품회사를 설립했다. 1963년에는 회사 이름에서 골패를 빼고 현재의 ‘닌텐도 주식회사’로 고쳤다. 이제 ‘골패’같은 작은 물에서만 놀지 않고 종합회사를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심지어 러브호텔업까지 손을 댔을 정도로 야마우치 사장의 거침없는 사업확장은 1960년대 내내 계속되었다. 온갖 회사에 들어간 자본금은 닌텐도의 주식으로 충당했다. 닌텐도의 주가는 한 때 980엔까지 올랐다. 화투가 싫은 화투 업체의 3대 사장님, 야마우치 히로시의 야망은 그렇게 실현될 것처럼 보였다. 

 

어떤 불량사원과 사장님의 이상한 명령

하지만 곧 야마우치 히로시가 손을 댔던 거의 모든 사업이 망했다. 식품사업은 광속으로 망했다. 그가 내세운 ‘즉석밥’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지금이야 그럭저럭 갓 지은 밥에 버금가는 맛을 낼 수 있지만, 1960년대의 기술로는 무리였다. 1965년 야마우치 히로시는 4년만에 식품사업을 청산했다.

 

택시 사업은 그럭저럭 돈이 됐지만 노동쟁의가 잇달아 불거지며 야마우치의 속을 썩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닌텐도 승계 과정에서 노동문제 때문에 골치를 썩었는데 이번에는 택시 회사까지 그러고 있으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나마 식품회사보다는 오래 버텼다.

 

야마우치 히로시가 그렇게 한 눈을 팔고 있는 사이 닌텐도는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다. 닌텐도의 본업이던 트럼프 카드 판매가 196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점차 침체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닌텐도의 주가는 60엔까지 추락했다. 전성기의 1/10도 안되는 가격이었다. 그제서야 야마우치 히로시는 정신을 차리고 본업인 카드와 화투에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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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코이 군페이(横井 軍平, 1941~1997).

 

닌텐도가 위기를 겪고 있던 1965년, 신입 사원 하나가 입사했다. 그는 당시 가장 인기 있던 학과인 전자공학과를 졸업했지만 성적이 좋지 않아 지원했던 회사에서 모조리 물을 먹었다. 마지막으로 집어넣은 곳이 닌텐도라는 회사였다. 다행히 닌텐도는 이 불량해 보이는 신입 사원을 받아주었다.

 

이 신입사원의 이름은 요코이 군페이였다. 요코이가 닌텐도를 지원한 이유나 닌텐도가 요코이를 뽑은 이유나 한심했다. 요코이는 하도 대기업 입사에서 낙방한 끝에 그냥 집 근처에 있는 아무 회사나 집어넣었고, 거기가 닌텐도였다. 닌텐도는 다시 화투짝(?)에 전념하고 있었고, 사실상 생산공장에 불과한 이런 회사에 공학부를 졸업한 번듯한 대졸 신입사원이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기에 그를 기꺼이 뽑아주었다.

 

아무튼 대졸은 대졸이었기에 요코이 군페이는 생산장비의 유지 보수를 담당하는 중간관리자가 되었지만, 불량한(?) 기질은 어디 가지 않았다. 어차피 맨날 돌아가는 장비가 고장 날 일은 별로 없었기에 요코이는 업무시간에 남는 재료로 장난감을 만들기 시작했다. 요코이는 날마다 온갖 장난감을 만들며 농땡이에 몰두했고, 결국 공장을 시찰하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에게 걸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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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코이 군페이의 첫 작품, '울트라핸드'. 괴상한 이름은 야마우치 사장이 붙여주었다.

 

만들던 장난감을 들고 사장실로 따라 오라는 말을 남기고 야마우치 사장은 돌아갔다. 사장실로 불려간 요코이에게 엄격한 인상의 야마우치 사장은 엉뚱한 말을 던졌다. 요코이가 만들던 장난감을 가리키고는 그걸 상품화 할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요코이는 얼떨떨했다. 그 장난감은 늘어났다 줄었다 하는 집게 팔로 그리 복잡한 구조는 아니었고, 요코이 군페이는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그 장난감에 ‘울트라 핸드’라는 괴상한 이름을 붙여주었고, 다른 간부인 이마니시 히로시를 붙여줄 테니 둘이 머리를 맞대고 올해 크리스마스(1966년 말)까지 상품화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재자 사장님의 예리한 직감

야마우치 사장의 명령대로 요코이와 이마니시는 1966년 연말 ‘울트라 핸드’를 상품화 하는데 성공했고, 120만개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오늘 내일 하던 닌텐도는 ‘울트라 핸드’ 하나로 기사회생했다. 야마우치 사장은 참으로 제멋대로였다. ‘울트라 핸드’가 성공하자 요코이를 다시 불러 이마니시와 함께 ‘개발부’라는 새로운 부서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요코이 군페이와 이마니시 히로시 두 명으로 시작한 ‘개발부’가 맡은 일은 희한했다. 요코이는 새로운 장난감 아이디어를 짜내고, 이마니시는 그 장난감을 실제 상품화하고 마케팅하는 역할을 맡았다. 요코이가 장난감 시제품을 만들어 야마우치 사장에게 들고가면, 야마우치 사장이 즉석에서 “이건 된다”고 하면 이마니시가 바로 상품화에 들어갔다.

 

요코이 군페이의 농땡이를 두고 내린 야마우치 사장의 결정은 사실 고심 끝에 나온 결과물이었다. ‘아무거나 하나 걸려라 화투만 아니면 된다’라는 식으로 시작했던 잡다한 사업이 연이어 수렁에 빠지자 야마우치 사장은 생각을 바꿨다. 화투나 카드만 고집하는 것은 여전히 싫지만, 그렇다고 잘 모르는 사업에 함부로 손을 대면 큰일난다는 교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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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닌텐도가 내놓은 '러브 테스터'. 전류계의 양 끝을 잡으면 자칭 '사랑의 깊이'를 측정해 준다는 요상한 물건이었지만, 큰 인기를 끌었다. 요즘도 비슷한 원리의 물건이 유원지 등에 설치되어 있다.

 

대신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원래 하던 화투나 카드의 방향을 조금 바꿔 놀이 쪽으로 가보면 어떨까 하며 고심하고 있었다. 예전에 흥행했던 ‘디즈니 트럼프’처럼 좀 색다른 놀이도구를 개척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뭘 만드냐 였는데, 이런 와중에 정말 적절하게도 심심풀이로 장난감을 만들던 요코이 군페이가 그의 마수(?)에 걸려들고 말았다.

 

요코이 군페이는 온갖 아이디어를 다 짜내서 시제품을 들고 왔고, 야마우치 사장은 비상한 직감을 발휘했다. 그는 법학부 출신으로 공학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요코이가 들고 온 시제품을 두고 요코이에게 다음에는 이런 부분을 고쳐보면 어떻겠냐고 제안도 했고, 마지막으로 그가 “된다”고 한 마디 하면 정말로 됐다.

 

독재자 사장님의 예리한 직감은 본격적으로 작두를 타기 시작했다. 야마우치 사장은 언제나 독재자였다. 남에게 이러쿵 저러쿵 의견을 구하지 않았다. 요코이가 가져온 시제품을 보고 자기 마음에 든다 싶으면 “된다”라는 한 마디를 던졌다. 더 말이 필요 없으니 이대로 양산하라는 지시였다. 그러면 이마니시가 구체적인 생산 일정과 마케팅에 들어갔다.

 

1960년대 후반 닌텐도가 히트한 장난감들이 다 이런 식이었다. 요코이 군페이는 잇달아 미니 피칭머신 ‘울트라 머신’, 자칭 사랑측정기 ‘러브테스터’, ‘광선총’ 등 다양한 장난감을 개발해 냈다. 요코이는 별로 특이할 것 없는 기술을 응용해 ‘최첨단’ 장난감을 만들어 내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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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요코이 군페이가 만든 광선총은 후에 사진에 있는 '닌텐도 패미컴용' 광선총으로 리메이크(?)되어 북미 진출에 톡톡한 역할을 했다.

 

닌텐도를 강타한 지구 반대편의 전쟁

1969년 택시회사를 처분하며 닌텐도는 카드 및 화투 생산과 장난감을 제외한 다른 사업에서 대부분 손을 털었다. 이제 닌텐도의 주력은 전자 장난감이었다. ‘울트라 머신’은 1년만에 70만대가 팔려 나갔다. 닌텐도는 트럼프 카드와 화투로 기본 체력을 갖추고, 독특한 전자 장난감으로 돈을 버는 알짜 업체로 명성이 높아져 갔다. 바닥을 치던 주가도 다시 회복했다.

 

야마우치 사장의 “된다”는 다소 엉뚱한 상품도 낳았다. 닌텐도는 1971년 간이 복사기를 만들었는데, 10만대를 출하하며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이 역시 닌텐도 내부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보고 야마우치가 한 마디 한 결과였다. 자신감이 붙은 야마우치는 이제는 본업(?)으로 여기는 전자 장난감 사업을 좀 더 큰 규모로 확대해 보려 했다.

 

그는 1973년 자회사인 ‘닌텐도 레저 시스템’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엄밀히 말해 닌텐도의 본업에서 벗어난 회사는 아니었다. 한 물 간 일본 전국의 볼링장 건물주들과 계약해 요코이 군페이가 만든 ‘광선총’을 좀 더 크게 확대한 전자 클레이 사격장을 운영하려는 계획이었다. 광선총을 장난감에서 차세대 놀이 문화로 만들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야마우치의 예상대로 계약이 잇달았고, 전자 사격장 사업은 점차 몸집을 불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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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10월 7일,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수에즈 운하를 도하하는 이집트군. 엉뚱하게도 이 전쟁의 나비효과는 지구 반대편의 닌텐도까지 닿았다.

 

그러나 야마우치 사장의 이 야심은 엉뚱하게도 지구 반대편에서 시작된 전쟁과 함께 무너졌다. 1973년 10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하며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초반에는 이집트가 우위를 잡았지만, 곧 이스라엘이 반격에 나섰다. 그러자 아랍 지역의 석유 수출 국가들이 이스라엘이 점령지역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원유 수출 감산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제4차 중동전쟁은 1973년 10월 25일 참전국들이 휴전에 동의하며 끝났지만, 아랍 원유 수출 국가들은 실제 행동에 나서 12월에는 원유 가격을 일방적으로 인상했다. 1월 대비 4배가 오른 가격이었고, 곧 전 세계 경제에 파장이 번졌다. 이것이 일명 ‘제1차 오일쇼크’로 불리는 사태다. 한창 경제성장을 거듭하던 일본에도 오일쇼크의 여파는 그대로 밀어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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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일쇼크의 여파는 국가를 가리지 않았다.

 

제1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일본 물가가 출렁거렸고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산업은 된서리를 맞았다. 야마우치가 기획한 ‘광선총 사격장’도 여기에 끼어 있었다. 전력 낭비를 막겠다며 NHK의 심야방송까지 중단되는 마당에 전기 먹는 하마인 광선총 사격장이 설자리는 없었다. 계약 취소가 이어졌다.

 

닌텐도는 두 번째 위기를 맞았다. 1977년, 닌텐도의 명성에 낚여(?) 미야모토 시게루가 입사할 당시 회사의 채무는 70억엔에 달했다. 한 때 알짜 기업으로 꼽히던 닌텐도는 이제 감당하기 어려울 수준의 빚을 지고 오늘 내일 하는 기업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빽’을 이용해 구태여 닌텐도에 들어온 미야모토 시게루는 회사 꼴을 보고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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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모토 시게루는 하필 닌텐도가 제일 어려운 시기 '낙하산'으로 회사에 들어왔다.

 

다시 찾아온 위기 앞에서 닌텐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새로운 결단을 내려야 했다. 막대한 채무가 회사를 짓누르고 있었다. 닌텐도의 3대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는 회사를 구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그의 결정 하나가 90여년을 이어온 닌텐도를 끝장낼 수 있었다. 고심 끝에 야마우치가 찾아낸 새로운 사업은 이번에도 엉뚱했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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