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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타라기 켄의 새로운 야망

2001년에 접어들자 플레이스테이션2의 전 세계 판매량은 2300만대에 달했다. 이미 승부는 결정 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소니는 불과 10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두 차례의 가정용 게임기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도 그냥 승리가 아닌, 소니 사상 최대의 매출을 기록할 만큼의 기록적인 승리였다. 

 

쿠타라기 켄은 다음 야망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PS2를 발판으로 한 그의 다음 구상은 ‘브로드밴드(광대역, Broadband)’, 즉 초고속 인터넷을 이용한 서비스였다. 2001년 11월, 쿠타라기 켄은 일본 최대의 통신업체인 NTT와의 브로드밴드 제휴를 발표했다. ADSL 등 초고속 인터넷 망을 통해 PS2를 위한 콘텐츠를 공급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브로드밴드라는 말은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 아니었다. 이미 1999년 ‘PlayStation Meeting 1999’ 자리에서 쿠타라기 켄은 ‘브로드밴드를 통한 콘텐츠의 전달’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 ‘브로드밴드’라는 말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여전히 모뎀이 주된 통신 환경이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세가의 ‘드림캐스트’ 역시 모뎀이 장착되어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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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소니 최고경영자 이데이 노부유키

 

재미있게도 쿠타라기 켄 말고도 소니 내에서 ‘브로드밴드’로 향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사람이 또 있었다. 1995년 소니 6대 사장으로 취임한 이데이 노부유키였다. 그는 사장 취임 이전부터 인터넷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소니가 인터넷을 이용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었다.

 

이데이 노부유키는 사장 취임 이후 본격적으로 콘텐츠와 네트워크를 융합한 사업의 추진에 나섰다. 2001년 가을, 소니가 스웨덴의 통신 장비 회사인 에릭슨과 손을 잡고 모바일 전문 기업인 ‘소니-에릭슨’을 설립한 것도 그런 행보 중 하나였다. 이데이 노부유키가 쿠타라기 켄의 새로운 야심을 어떻게 생각 했을 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같은 해 봄 소니는 도시바 그리고 IBM과 양해각서를 교환했다. ‘광대역 시대를 향한 새로운 병렬 프로세서’의 공동 개발 및 연구에 대한 합의였다. 이 합의 과정에서도 쿠타라기 켄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이 병렬 프로세서는 Cell Broadband Engine, 일명 CELL칩으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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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타라기 켄

 

쿠타라기 켄의 야망은 놀라웠다. 이 초고속 인터넷을 이용해 장기적으로는 소니가 전 세계 가전시장을 재패하고 디지털 혁명까지 일으키겠다는 거창한 꿈이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을 처음 만들 때 만큼이나 거창한 계획이었지만, 당시와는 달리 이제 쿠타라기 켄의 계획에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쿠타라기 켄은 소니의 알짜 사업인 ‘플레이스테이션’을 이끄는 수장이자, 소니를 이끌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고 있었다. 1999년 SCE 사장에 이어 2000년에는 소니 이사로 취임했다. 게다가 쿠타라기 켄이 내세우는 비전은 소니 최고경영자인 이데이 노부유키의 의지와 일치했으니 그를 막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소니에 드리워진 암운

플레이스테이션2는 승승장구 하고 있었고, 쿠타라기 켄의 야망은 멈출 줄 몰랐다. 소니도 신이 났다. 소니 관계자가 2002년 “이제 게임기 전쟁은 끝났다.”라는 도발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닌텐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소니의 이 발언에 대해 “게임 비즈니스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내일은 누가 이길지 모른다.”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니 그 자체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2003년 4월 24일, 증시 마감 직후 소니는 2002년 실적을 발표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소니는 표면상으로는 이익을 기록했지만,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소니는 2003년 1월부터 3월까지 심각한 부진을 겪으며 불과 3개월 동안 1650억엔의 적자를 기록했다.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소니는 실적 발표를 통해 앞으로도 큰 폭으로 이익이 감소할 것이라 전망했다.

 

4월 25일, 증권시장 개장과 함께 소니 주가는 밑바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소니 주식 매물이 너무 많아 거래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였고, 일본 닛케이 지수는 이 여파로 20년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소니는 3일동안 연속으로 하한가를 기록했고, 일본 닛케이 지수도 함께 붕괴했다. 일본에서 ‘소니 쇼크’라 부른 사건이다.

 

최고경영자 이데이 노부유키의 리더십이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덩치를 줄이겠다며 소니 그룹 전체에 구조조정이 실시된 후 채 1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위기에 빠진 소니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사람은 쿠타라기 켄이었다. ‘소니 쇼크’가 벌어진 그 달, 쿠타라기 켄은 소니 부사장 겸 가전제품, 게임,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COO(Chief Operating Officer)로 취임했다.

 

이어 쿠타라기는 2003년 5월 14일 E3 행사장에서 플레이스테이션 10주년을 기념해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PlayStation Portable)’을 곧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그가 내세운 PSP의 슬로건은 ‘21세기의 워크맨’이었다. 휴대용 게임은 물론, 영화와 음악까지 모두 포괄하는 미래지향적 멀티미디어 휴대 플랫폼으로 닌텐도 최후의 보루인 휴대용 게임기 시장까지 장악하겠다는 선전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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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X

 

쿠타라기 켄의 공세는 멈출 줄을 몰랐다. 5월 28일에는 소니 경영 방침 설명회에 참석해 자칭 ‘새로운 홈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인 PSX를 시연했다. PSX는 PS2에 하드디스크와 DVD레코더를 결합한 형태의 기기로, 그가 내세운 ‘전자제품과 콘텐츠가 융합한’ 슬로건을 상징하는 제품이었다. 일본 가정을 겨냥해 기존 비디오 녹화기기를 대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6월에는 PS2의 주변기기인 PlayStation BB Unit을 발매했다. 네트워크 어댑터와 하드디스크가 결합된 BB유닛은 2001년 말 있었던 ‘브로드밴드’ 제휴의 결과물이었다. 원래 BB유닛은 ‘브로드밴드’ 기능을 내세우지 않고 외장 하드디스크 기능을 강조해 게임 로딩 시간 감소 등을 내세우며 조용히 판매되어 왔지만, ‘소니 쇼크’ 직후 네트워크 컨텐츠 기능을 강조하며 소매점 등에서 본격적인 판매가 시작되었다.

 

“우리 가족은 PSX를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 쿠타라기 켄

 

수렁에 빠지다

상황은 쉽지 않았다. 쿠타라기 켄의 시도는 수렁에 빠지고 있었다. 첫 타자는 그가 직접 ‘홈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이라 이야기하며 개발을 주도했던 PSX였다. 2003년 12월, PSX가 일본에 발매되었지만 그의 호들갑과는 달리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가장 큰 문제는 가격이었다. PSX 160GB 하드 모델의 초기 가격이 79800엔으로 PS2의 두 배 반 가격이었다. 사실 공중파 영상의 DVD 녹화 혹은 하드디스크 녹화가 가능하며, PS2 기능까지 되는 기기 치고는 그렇게 까지 비싸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일단 절대적인 가격이 너무 높았다. 250GB 하드가 장착된 모델의 가격은 99800엔에 달했다.

 

소니는 발매 1년도 되지 않아 PSX의 가격을 4만엔까지 떨궈야 했다. 그제서야 PSX의 판매가 ‘싼 맛에’ 반짝 늘었지만 그냥 그 뿐이었다. 대부분의 가정은 PSX에 관심을 갖지 않고, 저렴한 VTR을 계속 사용했다. 결국 PSX는 채 2년을 버티지 못했다. 소니는 2005년 2월에 PSX의 생산종료를 발표했고, 자칭 ‘차세대 홈 엔터테인먼트 플랫폼’ PSX는 그렇게 초라하게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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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B유닛

 

쿠타라기 켄이 내세운 또 하나의 ‘비전’인 PS BB유닛도 부진을 겪고 있었다. 초고속 인터넷을 통해 컨텐츠를 전달하겠다는 야심만큼은 시대를 앞선 것이었지만, 정작 PS BB유닛의 기능을 제대로 활용하는 게임이 많지 않았다. BB유닛 지원이 ‘의무사항’도 아니었고, 스퀘어의 ‘파이널판타지11’ 같은 극소수의 게임을 제외하면 대부분 게임회사들은 BB유닛을 소 닭 보듯 했다.

 

여기에 BB유닛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일으켰다. 원래 BB유닛에 장착되어 있는 하드디스크는 컨텐츠를 저장하거나, ‘정품’ PS2 게임의 데이터를 설치해 로딩시간을 줄이는 기능이었다. 그런데 이를 개조해 하드디스크에 PS2 게임 이미지를 담아 구동하는 ‘하드플스’가 등장했다. 한 번 뚫리기 시작한 불법복제는 막을 길이 없을 정도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BB유닛은 애물단지가 되었다. BB유닛을 지원하는 PS2 게임은 많지 않은데, 그 ‘브로드밴드’를 이용해서 전달하는 컨텐츠도 매우 한정적이었고, BB유닛을 악용한 불법복제까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BB유닛은 이 BB유닛을 필수로 하는 PS2 게임이 극소수나마 있었기에 PSX보단 조금 더 오래갔지만, 거의 숨만 헐떡이는 수준이었다.

 

최강의 셀 칩

이제 쿠타라기 켄에게 남은 마지막 카드는 셀 칩과, 셀 칩을 이용한 최초의 기기가 될 차세대 플레이스테이션 이었다. 차세대 셀 칩으로 완벽한 플레이스테이션을 내놓아 디지털 혁명을 이끌겠다는 야심만큼은 여전했다. 셀 칩은 칩 하나로 CPU뿐 아니라 GPU까지 모두 포괄하는 강력한 성능을 통해 장기적인 비용절감까지 함께 이루려는 목표가 있었다.

 

여기에 쿠타라기 켄은 플레이스테이션3에 셀 칩, 그리고 차세대 광매체인 ‘블루레이’를 탑재해 진정한 멀티미디어 기기로 만들 생각이었다. 플레이스테이션2에서 그랬던 것처럼, 플레이스테이션3에는 하위호환 기능도 적용되었다. 초고속 인터넷 시대를 맞아 ‘플레이스테이션3’을 위한 새로운 인터넷 서비스도 선보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플레이스테이션3은 초장부터 쉽지 않았다. 핵심이 될 ‘셀 칩’의 개발은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다. 2001년 양해각서 교환 이후 셀 칩의 개발 완료까지 4년이 걸렸다. 이러니 가장 먼저 플레이스테이션3의 CPU와 GPU를 셀 칩 하나로 해결하겠다는 야심에 찬 계획부터 수정되었다. 소니는 그래픽카드 제조사인 엔비디아와 계약을 맺고 플레이스테이션3에 들어갈 GPU를 별도로 공급받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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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ELL

 

당초 플레이스테이션은 2005년 말에 나왔어야 했다. 수렁에 빠지고 있는 소니에서 그래도 꾸준히 흥행 가도를 이어 나가고 있는 제품이 플레이스테이션2였다. 앞서 전략병기로 내놓았던 PSX와 BB유닛이 내리막을 탄 이상, 너무너무 잘 팔리고 있는 플레이스테이션2의 기세를 이어 플레이스테이션3이 나와야 한 숨을 돌릴 판이었다.

 

이는 쿠타라기 켄의 장기적인 로드맵이기도 했다. 쿠타라기 켄은 2002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2005년이나 2006년 즈음에는 PC에 한계가 오리라 본다.”고 밝혔다. 그 한계를 뛰어 넘어 온 집을 네트워크로 묶기 위한 프로젝트가 바로 셀 칩이었고, 셀 칩을 사용한 플레이스테이션3은 쿠타라기 켄의 ‘디지털 혁명’의 선봉이 될 예정이었다. 이제 그 계획은 꼬여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소니 아니 쿠타라기 켄이 ‘셀 칩’을 쓰겠다는 계획을 뒤엎을 수도 없었다. 소니는 ‘셀 칩’ 개발에만 총 4억달러 이상을 쏟아 부었고, 실패는 곧 죽음이었다. 꾸역꾸역 셀 칩을 만들어 양산해야 플레이스테이션3을 만드는데, 개발이 지연되니 양산 체제 구축도 덩달아 지연되고 있었다.

 

“드디어 슈퍼 컴퓨터에 필적하는 연산 능력을 가진 Cell을 탑재 한 차세대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플레이 스테이션 3'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 쿠타라기 켄, 2005년 5월 E3에서

 

위기의 쿠타라기 켄

플레이스테이션3의 지연과 더불어 PSX, BB유닛 등 쿠타라기 켄이 내놓았던 전략병기가 고전을 겪으며 그의 입지는 다시 좁아져 가고 있었다. 2005년 3월, PSX의 부진 등을 이유로 쿠타라기 켄은 소니 부사장직을 사임하고 ‘플레이스테이션’ 사업을 책임지는 SCE 경영에 전념하기로 했다.

 

2005년 5월, 쿠타라기 켄은 E3에서 ‘플레이스테이션3’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쿠타라기 켄은 보도자료를 통해 “드디어 슈퍼 컴퓨터에 필적하는 연산 능력을 가진 Cell을 탑재 한 차세대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플레이 스테이션 3'의 시대가 시작 되려 하고 있다.”라며 거창한 포부를 밝혔다. 발매 예정일은 2006년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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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E3에 쿠타라기 켄이 들고나온 PS3은 빈 깡통이었다.

 

그렇게 화려하게 발표했지만 제대로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플레이스테이션3의 두뇌가 될 셀 칩은 2005년 2월에 들어서야 간신히 시제품을 공개할 수 있었다. 쿠타라기 켄이 그 E3 회장에 들고나온 플레이스테이션3은 빈 깡통이었다. 소니 그룹은 여전히 수렁에 빠져 있었다. 한 때 시대를 초월한 비전을 가진 경영자로 칭송 받던 이데이 노부유키는 이제 소니를 망친 역적으로 몰렸다.

 

안팎으로 비난을 듣던 이데이 노부유키는 압력이 거세지자 실적 개선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2005년 6월 소니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뒤를 이어 하워드 스트링거가 새로운 소니의 최고 경영자로 취임했다. 이데이가 사라진 이상, 이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플레이스테이션3’을 내놓지 않으면 그 다음은 쿠타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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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소니 최고경영자로 취임한 하워드 스트링거. 언론인 출신으로 소니 최고경영자 자리까지 올랐다.

 

아직 플레이스테이션2이 잘 팔리고 있었기에 게임 부문이 버틸 수 있었지만, 4억달러나 들어간 셀 칩, 그 셀 칩을 사용한 플레이스테이션3이 흥행하지 못하면 쿠타라기 켄도 이데이 꼴이 날 것이 분명했다. 플레이스테이션3의 운명과 그 자신의 생존(?)을 건 쿠타라기 켄의 두 번째 심리전이 시작되었다. 또 한 번 그의 호쾌한 입심이 발휘되었다.

 

“플레이스테이션3의 강력한 하드웨어는 마치 페라리 엔진을 얹은 BMW와 같다.” – 2005년 5월, 플레이스테이션3 발표 직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하지만 이제 쿠타라기 켄의 입심은 먹혀 들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외쳤던 ‘브로드밴드’, 즉 초고속 인터넷의 발달로 게이머들은 더 이상 쿠타라기의 애매하게 과장된 발언에 속지 않았다. 커뮤니티에 모인 게이머들이 역으로 쿠타라기 켄의 과장된 발언을 ‘발굴’해 올리거나, 비난 하는 등 역풍을 맞는 일이 잦아졌다. 

 

한편 소니의 빈 자리를 노리고 마이크로소프트가 덤벼들었다. 쿠타라기 켄이 ‘플레이스테이션3’을 발표한 바로 그 달, MS는 차세대 게임기 ‘엑스박스360’ 광고를 대대적으로 벌이며 공세에 나섰다. MS도 ‘엑스박스360’ 양산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2005년 11월 ‘엑스박스360’을 북미에 발매하며 기선제압에 나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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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엑스박스360

 

이 시기 쿠타라기의 위안은 MS의 ‘엑스박스360’ 양산체제가 여전히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심각한 물량 부족을 겪고 있다는 점과, 일본 시장에서는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못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욕을 하든 뭘 하든 일본 게이머의 관심은 역시 ‘플레이스테이션3’에 쏠려 있었다. 그렇지만 MS도 이번에는 독기를 품고 덤벼들고 있었다.

 

꼬이고 꼬이고 또 꼬이는 플레이스테이션3

일은 계속 꼬이고 있었다. 2006년 봄으로 예정되었던 플레이스테이션3의 발매는 핵심 부품의 양산 차질로 또 한 번 연기되었다. 일단은 가을로 예정된 두 번째 발매 예정일까지 약간의 시간을 벌었지만, 그 때 가서도 제대로 양산 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그 사이 엑스박스360은 북미와 유럽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플레이스테이션3의 시장을 먹어가고 있었다.

 

쿠타라기 켄이 플레이스테이션3을 통해 추구한 ‘완벽한 게임기’라는 이상은 이제 스스로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셀 칩에 들어간 막대한 비용과 차세대 매체 블루레이 탑재는 플레이스테이션3의 가격을 무지막지하게 높여 놓았다. 소니는 2006년 5월 PS3 20GB 모델의 발매 가격을 62790엔으로 발표했다. 이는 과거 가격 때문에 망한 게임기인 3DO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가격이었다.

 

쿠타라기 켄은 이를 두고 가격 발표 직후 “성능에 비하면 플레이스테이션3 가격은 싼 편이다.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것과 직원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이 같은 가격일 수 있느냐?”라고 인터뷰했다가 호된 비난을 들어야 했다. 소니는 울며 겨자 먹기로 초기 발매 가격을 49980엔으로 인하한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이조차 MS ‘엑스박스360’에 비하면 훨씬 높은 가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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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니는 2005년 E3에 황당한 모양의 컨트롤러를 내놓았다가 욕을 먹고 저 유명한 'Sixaxis' 컨트롤러를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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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xaxis 컨트롤러. 저작권 분쟁으로 진동이 빠져 있었고, 김빠진 콜라라는 야유를 받았다. (흔히 쿠타라기 켄의 발언으로 알려져 있는 "진동은 구세대의 유물이다."라는 말은 실제로 그가 한 말은 아니다.) 2007년 저작권 분쟁을 해결한 후 진동기능이 탑재되어 있는 '듀얼쇼크3'을 발매했다.

 

소니는 꾸역꾸역 플레이스테이션3의 양산체제를 갖춰가고 있었지만, 발매를 반 년 넘게 연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당초 예정된 생산대수를 맞출 수 없었다. 결국 출하대수는 400만대에서 200만대로 하향되었고, 유럽 발매는 2007년 3월로 다시 한 번 연기되었다. 이런 소식이 들려 올 때 마다 게이머들의 반응은 점점 더 냉소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2006년 11월 11일에야 플레이스테이션3이 일본에서 발매되었다. 이어 11월 17일에는 북미 출시가 시작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발매했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스테이션3은 예전만한 호응을 얻지 못했다. 경쟁 기기인 엑스박스360과 비교했을 때 플레이스테이션3이 가진 압도적 우위가 없었다.

 

멍청하게 생긴 본체 디자인, 부실한 게임 라인업과 블루레이 컨텐츠, 저작권 분쟁으로 진동 기능이 빠져버린 게임패드, 100달러나 비싼 가격까지… PS3의 자랑인 셀 칩 역시 슈퍼컴퓨터에 쓰일 정도로 강력한 성능임은 확실했지만, 그게 곧 게임 퀄리티로 이어지진 않았다. 오히려 “개발이 너무 지저분하다”는 개발자들의 불평만 잔뜩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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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닌텐도 위. 쿠타라기는 닌텐도의 이 새로운 도전에 대해 "작고 귀여운 경차?"라고 비꼬았지만...

 

엑스박스360이 또 다시 일본 시장에서 외면당했기에 일본 게임 시장에서는 그럭저럭 흥행할 수 있었다. 반면 북미와 유럽에서는 스포츠 게임과 FPS 게임을 다수 확보한 엑스박스360이 초반 우위를 점했다. 게다가 엑스박스360만 덤벼든 것도 아니었다. 닌텐도도 ‘위(Wii)’를 내놓으며 선전포고했다.

 

“도전을 그만두면 진화는 멈추고, 미래를 만들 수 없다.” – 쿠타라기 켄, 2007년 6월 퇴임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의 아버지, 소니를 떠나다

한편 쿠타라기 켄이 ‘21세기의 워크맨’이라며 2004년 내놓은 PSP도 2006년에 접어들자 결국 닌텐도의 아성을 넘지 못함이 드러났다. 닌텐도의 휴대용 게임기 DS는 사양으로만 보면 PSP보다 한참 아래였지만, 일반인을 겨냥하고 ‘게임 인구 확대’를 모토로 내세운 결과 ‘국민 게임기’로 불릴 정도로 흥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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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타라기 켄은 PSP-2000 개발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2006년 한 해 동안 소니 게임 부문은 2천억엔 넘는 적자를 기록했다. 쿠타라기 켄은 여전히 “플레이스테이션3 1억대를 팔겠다”며 자신만만했고, 적자에 대해서 “이 비용은 초기투자다”라고 일축했지만 소니 경영진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소니는 2천억엔 정도의 적자는 쉽게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소니 최고경영자인 하워드 스트링거는 2006년 12월 히라이 카즈오를 SCE 사장 겸 COO로 임명했다. 히라이 카즈오는 소니의 엔터테인먼트 사업 등을 거쳐 북미에서 소니 게임 사업을 총괄해 온 전문 경영인으로, 표면적으로는 쿠타라기의 동의를 얻은 인사였지만 실제로는 쿠타라기 켄의 실책에 대한 경고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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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라이 카즈오. 쿠타라기 켄의 뒤를 이어 SCE의 최고경영자가 되었고, 2012년 소니 최고경영자가 되었고 현재까지 직위를 유지하고 있다.

 

히라이 카즈오가 SCE 사장으로 승진하며 쿠타라기 켄은 명목상으로는 SCE의 ‘회장’으로 승진했다. 쿠타라기 켄은 여전히 SCE CEO직을 유지했지만 개발 일선에서는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쿠타라기가 이 인사로 소니를 떠날 것이라는 이야기가 안팎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2007년 4월 26일, 쿠타라기 켄은 소니 이사회에 사표를 제출했다. 같은 해 6월 쿠타라기 켄은 명예직인 SCE 명예회장과 기술고문역을 제외한 모든 임원직에서 물러났다. 1975년 입사 후 32년 동안 말단 연구직부터 ‘해결사’ 엔지니어, 소니 부사장까지 파란만장한 경력을 쌓은 쿠타라기는 그렇게 소니를 떠났다.

 

쿠타라기 켄은 은퇴 후 여러 기업의 사외이사나 객원교수 직을 맡으며 야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병렬 처리 컴퓨팅 등 최신 기술을 연구하는 회사를 하나 설립해 대표이사로 취임하기도 했다. 온 세상의 게이머가 ‘플레이스테이션의 아버지’로 영원히 기릴 말썽쟁이 엔지니어 쿠타라기 켄의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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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타라기 켄은 소니를 떠났지만, 여전히 '플레이스테이션의 아버지'로 존경받고 있다. 지난 2014년 GDC에서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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