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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타라기 켄이 플레이스테이션을 들고 왔을 때 밀어준 경영진은 나 밖에 없었다.” - 소니 오가 노리오 회장

 

소니의 두 번째 게임기 전쟁

소니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첫 가정용 게임기 전쟁에서 멋지게 승리했다. 세가 새턴은 그 자체로도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에 뒤쳐진다는 인상을 주었고, 세가는 소니와의 계속된 가격전쟁에서 버틸 체력이 이제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닌텐도는 지난 세대의 영광에 취한 나머지 너무 늦게 뛰어들었고, 마찬가지로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에 패배했다.

 

그러나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두 번째 가정용 게임기 전쟁이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세가의 선공이었다. 세가는 1998년 11월 27일, ‘드림캐스트(Dreamcast)’를 일본에 발매하며 포문을 열었다. 드림캐스트는 세가가 새턴의 패배를 딛고 일어서,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만든 가정용 게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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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가 드림캐스트

 

세가는 동맹으로 마이크로소프트를 끌어들였고, 막 태동하고 있던 네트워크 환경에 중점을 두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가는 드림캐스트의 홍보를 위해 130억엔을 투입했다. 드림캐스트 일본 발매 당일, 전국에서 드림캐스트가 매진되며 세가의 저력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드림캐스트 물량이 수요를 쫓아가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정도였다.

 

이제 소니의 차례였다. 소니, 그리고 쿠타라기 켄은 플레이스테이션 때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쇼와 함께 반격에 나섰다. 1999년 3월 2일, 소니는 도쿄에서 ‘PlayStation Meeting 1999’을 개최하고 차세대 플레이스테이션의 컨셉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는 소니 회장인 오가 노리오(그는 1995년 소니 회장으로 승진했다), 사장인 이데이 노부유키 등 주요 인사가 참석했다.

 

과거 미운 오리였던 플레이스테이션은 이제 소니의 최고 효자로 꼽히고 있었다. 오가 노리오 회장은 “예전에 쿠타라기 켄이 플레이스테이션 이야기를 들고 왔을 때 밀어준 경영진은 나 뿐이었다.”며 자랑스럽게 감회를 밝혔고, 이데이 노부유키 사장도 “오늘은 새로운 콘텐츠 산업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날이며, 새로운 플레이스테이션은 게임기를 초월했다”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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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쿠타라기 켄이 등장해 새로운 플레이스테이션의 핵심 기능에 대해 소개했다. 그가 강조한 차세대 플레이스테이션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모션 엔진(Emotion Engine)으로 불린 전용 CPU의 강력한 성능이었다. 도시바와의 공동개발로 탄생한 이모션 엔진은 당시 소니의 발표에 의하면 최신 CPU인 펜티엄3의 몇 배에 달하는 성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차세대 플레이스테이션은 EE와 GPU인 ‘그래픽 신디사이저’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기존 가정용 게임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력한 그래픽을 선보일 것처럼 보였다. 쿠타라기도 “EE는 최신 CPU인 펜티엄3의 몇 배에 달하는 성능을 발휘한다”며 강력함을 어필했다. 이 날 행사에서는 CG 데모도 공개되었고, 과거 플레이스테이션 시연회와 같은 충격을 주었다.

 

다른 하나는 놀랍게도 하위호환이었다. 쿠타라기 켄은 “차세대 플레이스테이션에서도 기존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이 작동한다고”고 밝혔다. 그는 자신만만했다. 발표회 직후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하위호환에 대해 “처음부터 차세대 플레이스테이션은 하위호환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엔지니어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도전이었다.”고 밝혔다.

 

“플레이스테이션2는 슈퍼컴퓨터에 버금가는 성능이다.”

 

교묘한 심리전

소니의 차세대 플레이스테이션 발표는 엄청난 화제가 되었지만, 세가의 드림캐스트도 만만치 않은 적수였다. 세가는 1999년 9월 9일, 드림캐스트를 북미에 발매하며 두 번째 선제 공격에 나섰다. 세가는 정말 목숨을 걸고 있었다. ‘제네시스(메가드라이브)’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재현할 생각이었다. 북미 지역 마케팅에 천문학적인 액수를 쏟아 부었고, 정가를 9로 인하했다. ‘99년 9월 9일에 9’로 발매해 인상을 주기 위한 마케팅 전략이었다.

 

세가의 노력은 그만한 빛을 발했다. 북미에서 드림캐스트는 발매 전 30만대 이상의 선주문이 들어온 상태였고, 북미 발매 24시간 동안 22만대 이상의 드림캐스트가 팔려 나가며 9800만달러의 이익을 거뒀다. 세가는 재빨리 “세가 역사상 단 하루 동안 이처럼 많은 매출을 기록한 일은 없었다”며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이후 2주동안 세가는 북미에서 드림캐스트 50만대를 팔아 치웠다.

 

세가 드림캐스트의 흥행에 맞서 소니가 내놓은 전략은 심리전이었다. 소니에서 그러한 심리전을 가장 잘 벌일 수 있는 사람은? 그렇다. 쿠타라기 켄 본인이었다. 쿠타라기는 1999년 3월 ‘PlayStation Meeting 1999’ 직후부터 일본 주요 언론과 잇달아 인터뷰를 가졌다. 쿠타라기가 발표한 그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했는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놓는 이야기는 더욱 어마어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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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니가 PlayStation Meeting 1999에서 공개한 각종 그래픽 데모들

 

애초에 차세대 플레이스테이션의 CPU에 ‘이모션 엔진’이라는 거창한 명칭을 붙인 그 자체가 심리전을 위한 포석이었다. 쿠타라기 켄은 인터뷰를 통해 “이제 단순한 수치 경쟁으로는 의미가 없다. 우리는 게임기를 뛰어 넘어 ‘정서 합성’을 차세대 플레이스테이션의 컨셉으로 제안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흔히 알려진 대로 플레이스테이션2에서는 인간의 감성도 시뮬레이션 가능하다는 뜻인가? 이것이 쿠타라기 켄 심리전의 본질이고, 실로 교묘했다. 잘 보면 애매한 이야기지만, 충분한 공학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성능을 자랑하는 플레이스테이션2’라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후에 유명한 거짓말로 꼽힌 “플레이스테이션2는 슈퍼 컴퓨터에 버금가는 성능이다”라는 말도 제대로 읽으면, “어떤 부분에서 플레이스테이션2의 성능은 슈퍼 컴퓨터의 그것과 버금가는 것도 있다” 정도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글을 읽는 사람에게는 ‘플레이스테이션2은 슈퍼컴퓨터만큼 강력하다!’는 인상이 남는다. 이 정도면 게임 역사상 가장 교묘한 심리전이라 부를 만 했다.

 

되돌아보면 플레이스테이션2 개발 초기 나온 이야기들이 다 이랬다. ‘PlayStation Meeting 1999’에서 소니 고위 경영진이 극찬한 부분, 예를 들어 “차세대 플레이스테이션은 게임기를 뛰어 넘어 AV 기기까지 초월한다”는 이데이 노부유키의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쿠타라기 켄이 발표회에서 한 “영화, 음악, 컴퓨터를 융합한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를 창조하겠다”는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이런 말잔치는 따지고 보면 대부분 별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재미있게도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 초기에는 이와 정 반대의 행보를 벌였다. 몇 년 전 플레이스테이션을 처음 발표할 당시, 쿠타라기 켄은 “플레이스테이션은 멀티미디어 기기입니까?”라는 질문에 딱 잘라 “게임기입니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은 멀티미디어 기기가 맞았다. 음악CD의 재생이 가능했고, 일부 기종은 비디오 CD까지 재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임까지 가능하니 당연히 멀티미디어 기기가 맞았지만, 쿠타라기 켄은 플레이스테이션을 두고 무조건 “게임기다.”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하고 다녔다. 오직 게임 만을 위한 기기라는 이미지를 확실하게 심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플레이스테이션2 발표를 계기로 이런 입장은 180도 선회했다. 초기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2 홍보는 ‘게임 외적인’ 것에 상당히 치중하고 있었다. CPU인 이모션 엔진의 강력함, 차세대 엔터테인먼트의 창조, 인간 감정의 시뮬레이션 등등. 쿠타라기 켄은 플레이스테이션2가 나올 때까지 특유의 말빨로 경쟁자들의 발목을 잡는 악역을 기꺼이 맡았다.

 

“플레이스테이션2의 하위호환은 엔지니어라면 당연히 도전해 보아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 쿠타라기 켄

 

세가 드림캐스트의 최후

그렇다고 단지 쿠타라기 켄의 말빨 때문에 드림캐스트가 무너졌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플레이스테이션2 출시 전까지 쿠타라기 켄을 필두로 소니는 심리전에 한창이었지만, 어차피 그런 심리전 자체는 게임 산업에서 드문 일도 아니었다. 세가도, 닌텐도도 다 하던 일이었다. 심리전만으로 무너질 만큼 가정용 게임기 시장이 만만한 곳도 아니다.

 

불행하게도 (그리고 소니와 쿠타라기 켄 입장에서는 운 좋게도) 세가는 새턴의 치욕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내놓았다는 드림캐스트에 들어서도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확실히 드림캐스트는 새턴보다 기세 좋게 출발했고,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북미 시장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드림캐스트의 이면에는 여전히 온갖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새턴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가격경쟁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세가는 1999년 드림캐스트 북미 발매를 앞두고 정가를 24800엔에서 19900엔으로 내렸다. 마케팅 효과와 가격 인하를 통한 판매량 상승을 노린 정책이었지만, 결국은 제 살을 깎아 먹는 결과로 돌아왔다.

 

새턴보다는 원가 절감에 많이 신경 썼지만, 드림캐스트도 파격적인 가격경쟁을 할 만큼 비용 절감이 가능한 가정용 게임기는 아니었다. 세가가 소니처럼 대규모 자본을 투자해 전용 공장을 설립할 여건도 아니었고, GD-ROM 같은 부품은 세가 혼자 쓰는 독자 매체나 다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른 가격인하에 들어간 것은 치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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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D-ROM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드림캐스트 한 대당 많게는 만 엔 가량 손해를 보며 팔아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그렇다고 드림캐스트가 내린 가격만큼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고 있었다. 안 팔 수는 없고, 막상 팔자니 드림캐스트 원가절감이 어려워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었다.

 

드림캐스트는 시작부터 꼬이고 있었다. 분명 초반 기세는 좋았다. 일본 전국에서 드림캐스트 초회 물량이 동 날 정도였다. 하지만 세가는 초반 수요를 맞추기 위한 드림캐스트 추가 공급에 실패했다. 드림캐스트의 GPU인 PowerVR2의 생산이 지연되었고, 그 여파로 드림캐스트의 생산도 크게 지연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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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림캐스트의 메인보드

 

드림캐스트 생산 차질은 다시 드림캐스트 게임 개발의 차질을 불러왔고, 드림캐스트는 곧 게임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쉔무’ 같은 기대작은 도대체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몇 번씩 발매가 연기되고 있었다. 간간히 할 만한 게임이 나오는 애매한 상태로 초반의 기세를 살릴 기회를 그대로 놓쳐버렸다.

 

이어진 소니의 ‘차세대 플레이스테이션’ 발표도 시기가 아주 절묘했다. 드림캐스트가 초반 기세를 잡지 못하고 게임이 부족한 상태에서 쿠타라기 켄이 ‘플레이스테이션 하위호환’을 내세우고 본격적인 심리전에 들어가자 게이머들은 순식간에 관망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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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쉔무. 70억엔에 이르는 막대한 개발비로 개발자인 스즈키 유는 '역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지만, 사실 그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본래 세가 새턴으로 개발되던 게임을 갑자기 뒤집어 엎고 드림캐스트로 만들라고 했으니 말이다.

 

한 번 꼬이기 시작한 드림캐스트는 계속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시대를 앞서간 기능으로 평가 받는 ‘인터넷’ 기능도 잘 뜯어보면 시궁창이었다. 드림캐스트가 발매되던 시기 인터넷 접속은 대부분 모뎀을 이용한 전화접속이었다. 드림캐스트에도 기본으로 모뎀이 장착되었는데, 모뎀을 이용한 인터넷은 전화요금 부담이 매우 컸다.

 

이러니 드림캐스트의 인터넷 기능은 초반에는 개점휴업 상태나 다름 없었고, 세가는 2000년에 들어서야 드림캐스트 전용 ‘전화요금 포함 정액제’ 서비스를 실시했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이 시기에는 초고속 인터넷이 도입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초고속 인터넷 이용자를 위해 LAN 어댑터를 발매했지만 너무 비싼 가격으로 외면 받았다.

 

“플레이스테이션2의 하위호환 기능은 처음부터 정해 놓았기에 논쟁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 쿠타라기 켄

 

쿠타라기 켄이 준비한 두 가지 비장의 무기, 하위호환과 DVD

쿠타라기 켄이 드림캐스트를 겨냥해 ‘뻥’만 치고 다니지는 않았다. ‘플레이스테이션2’에서도 쿠타라기 켄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밀어붙인 것 중 하나는 바로 하위호환이었다. 쿠타라기의 말처럼 하위호환은 엔지니어의 입장에서도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닌텐도나 세가 같은 가정용 게임기 고참들도 하위호환 기능을 옛날에 포기했다. 문제만 많고 비용상승도 부담스럽기 때문이었다.

 

쿠타라기 켄은 처음부터 플레이스테이션2에 하위호환을 넣자고 주장했다. 쿠타라기 켄의 말에 따르면 “처음부터 정해 놓았기 때문에 논쟁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하위호환으로 노린 부분은 게임기 출시 후 1~2년간의 공백이었다. 드림캐스트처럼 생산 차질이라도 벌어지면 초반 게임 부족은 피할 수 없고,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부를 수 있었다.

 

초반 게임 부족으로 순식간에 몰락해 버린 가정용 게임기는 수두룩했다. 다행히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은 지난 몇 년 간의 흥행으로 풍부한 게임을 쌓아 두었다. 차세대 플레이스테이션에 하위호환 기능을 넣는다면 초반 게임 부족 같은 ‘만약의’ 사태에도 버틸 수 있는 체력을 확보하는 셈이었다. 

 

또 하나 소니가 하위호환 기능 추가에 있어 닌텐도나 세가보다 유리했던 것은 게임기의 근본적인 설계부터 생산까지 모두 도맡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소니는 스스로 설계를 개량해 비용 절감을 하고, 자체 공장을 통해 더욱 더 비용 절감을 할 수 있었다. 플레이스테이션도 여러 번의 개량을 거쳐 비용절감이 가능했다. 쿠타라기 켄의 판단으로는 하위호환 기능 추가로 인한 약간의 비용 상승은 공정 개선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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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이스테이션2의 메인보드

 

쿠타라기 켄이 하위호환 기능 확보를 위해 선택한 방식은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기본적으로 플레이스테이션2 자체의 강력한 성능을 이용해 플레이스테이션을 에뮬레이팅하고, 플레이스테이션 CPU도 플레이스테이션2에 탑재해 이를 보정하도록 설계했다. 생각보다 많은 수의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이 문제 없이 작동했고, 비용 상승도 적었다.

 

다른 하나는 DVD였다. 이는 쿠타라기 켄의 의지라기 보다는, 소니 자체의 의지였다. 소니는 DVD 규격을 주도한 DVD포럼의 핵심 멤버였고, CD와 마찬가지로 DVD를 차세대 매체로 밀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회장이 된 오가 노리오는 이미 사장시절부터 엔터테인먼트에 집중적인 투자를 했고, 이데이 노부유키 사장 역시 이 시기 컨텐츠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방을 차지할 ‘플레이스테이션2’에 DVD매체를 채용해 고용량 게임은 물론, DVD영화까지 한 번에 평정하겠다는 쿠타라기 켄과 소니 경영진의 생각이었다. ‘오로지 게임기’라는 모토를 내세운 플레이스테이션과 달리, ‘플레이스테이션2’는 만능 엔터테인먼트기기라는 컨셉을 내세운 것도 이런 이유였다.

 

소니의 선전포고…그러나

2000년 봄으로 예정된 플레이스테이션2의 발매를 앞두고 기대감은 갈수록 커져갔지만, 한 편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었다. 게임기 발매는 코앞인데, 발매와 함께 플레이스테이션2의 성능을 보여줄 게임이 너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플레이스테이션2가 초반 고전을 겪다가 몰락하리라는 예측도 나왔다.

 

2000년 3월, 드디어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2를 일본에 발매했다. 발매가격은 39800엔으로 비싼 편이었고, 소니가 출하한 플레이스테이션2 물량도 98만대에 달했지만 모두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3월 한 달 동안 소니는 일본에서 140만대 이상의 플레이스테이션2를 판매했다.

 

전작의 명성을 잇는 순조로운 출발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니 역시 세가와 똑같은 문제를 겪기 시작했다. 먼저 ‘플레이스테이션2’ 게임이 너무나 부족했다. ‘릿지레이서5’나 ‘철권 태그 토너먼트’ 같은 괜찮은 게임이 있었지만, 나머지 PS2 게임들은 여전히 개발 중이거나 발매를 연기하고 있었다. 적어도 1년은 게임 없는 게임기 꼴로 지내야 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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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벌어진 사태는 역시 물량 부족이었다. 일본 국내에서도 물량이 넉넉하다 할 수 없는 편이었지만, 북미는 더욱 심각했다.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2의 북미 출시를 2000년 10월로 잡고 있었다. 문제는 북미 출시 직전 플레이스테이션2 주요 부품의 공급 부족이 벌어졌고, 소니는 어쩔 수 없이 북미 지역의 초기 출하량을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북미에서는 플레이스테이션2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난장판이 벌어졌다. 출시 당일 플레이스테이션2를 구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섰고, 인터넷에서는 프리미엄이 붙어 발매 가격의 두 배가 넘는 가격에 거래되기도 했다.

 

언뜻 보기에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플레이스테이션2의 가격은 세가 드림캐스트의 두 배에 달했고, 게임은 부족했으며, 그 마저도 물량이 모자라 온갖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가는 북미에서 드림캐스트로 공세에 나섰다. 149달러로 드림캐스트 가격을 인하하고, 온라인 서비스 ‘세가넷’을 앞세워 밀어붙였다.

 

이런 와중에 또 다른 경쟁자도 등장했다. 2000년 3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엑스박스(Xbox)’를 발표했다. 빌 게이츠 회장이 직접 나서 MS가 만든 차세대 게임기를 소개했다. 절치부심하던 닌텐도도 2000년 8월 기자간담회를 열고 차세대 가정용 게임기인 ‘게임큐브(GameCube)’를 출시할 예정이라 발표했다.

 

가정용 게임기 역사상 최대 승리

소니가 플레이스테이션2를 내놓았지만 세가는 북미에서 마지막 힘을 짜내 덤벼들고 있었고, 닌텐도와 마이크로소프트도 각각 가정용 게임기를 내놓으며 소니를 추격하려 하고 있었다. 약 1년여의 시간 동안 플레이스테이션2가 주도권을 잡지 못하면 가정용 게임기 전쟁은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쿠타라기 켄이 플레이스테이션2에 준비한 비장의 무기 두 가지가 큰 효과를 발휘하며 상황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플레이스테이션2는 초반 게임 부족으로 ‘깡통’이라는 비아냥을 들었지만, 하위호환 기능이 있었기에 게임 부족은 생각처럼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백 만 장 이상 팔려 나간 명작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이 수두룩했고, 플레이스테이션2의 하위호환기능은 생각 외로 뛰어나 대부분의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을 그대로 돌릴 수 있었기 때문에, 플레이스테이션 추가 수요자를 그대로 플레이스테이션2에 흡수하는 효과까지 낳았다. 구형 플레이스테이션을 굳이 사느니 당장 게임은 없지만 플레이스테이션2를 사면 된다는 계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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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이스테이션2는 이외에도 '세울 수 있는' 가정용 게임기로 만들어졌다.

 

두 번째로 ‘저렴한 DVD 플레이어’라는 점도 큰 무기가 되었다. 영화 ‘매트릭스(Matrix)’의 흥행으로 DVD 플레이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398달러(후에 299달러로 인하)짜리 DVD 플레이어인 플레이스테이션2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가격 경쟁력이 있었다. 엉뚱하게도 플레이스테이션2는 게임이 없는 상태에서도 저가 DVD 플레이어 시장에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게임이 아니더라도 플레이스테이션2을 그냥 저렴한 DVD 플레이어로 사용하기 위해 구매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DVD 플레이어로 쓰다 자연스럽게 PS2 게임 기능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소비자층의 확대로 이어졌다.

 

한 때 심각했던 플레이스테이션2 물량부족은 공장 증설로 곧 해결되었다.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 시절부터 플레이스테이션을 생산하기 위한 전용 공장을 세워왔고, 생산 노하우도 충분했다. 세가의 북미 공세는 결국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세가는 2000년 한 해 동안 북미에서 드림캐스트 500만대 판매를 목표로 잡았지만 실제 판매량은 2/3도 안되는 수준이었다. 

 

세가에게 이제 더 이상 버틸 체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드림캐스트는 악성재고로 쌓여가고 있었고, 회사는 위기에 몰려 있었다. 세가는 1997년 이후 4년 연속 적자상태였고, 2001년도 손실액은 517억엔에 달했다. 2001년 1월, 세가는 드림캐스트의 생산 중단과 가정용 게임기 사업의 포기를 선언했다. 창고에 악성재고로 남아 있던 드림캐스트는 9900엔에 떨이(?)로 팔려 나갔다.

 

다른 경쟁자들도 소니를 위협하지 못했다. 2001년 발매된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는 첫 가정용 게임기 치고는 그럭저럭 북미 시장 진입에 성공했지만,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외면 받았다. 같은 해 등장한 닌텐도의 게임큐브는 엑스박스에도 밀리는 굴욕(?)을 겪었다. 드림캐스트, 엑스박스, 게임큐브를 모두 합쳐도 플레이스테이션2 판매량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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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는 또 한 번 승리를 거뒀다. 그냥 승리도 아니고 가정용 게임기 역사상 최대의 승리였다. 플레이스테이션을 이끄는 쿠타라기 켄은 이제 ‘미래를 내다보는 선각자’라는 칭송까지 받았다. 2003년 4월, 쿠타라기 켄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소니 본사 이사 및 부사장 직위로 승진했다. 소니의 핵심 사업인 가전, 게임, 반도체를 모두 총괄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자리였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쿠타라기 켄이 이렇게까지 성장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를 시작 할 때만 해도 중간관리자들이 우수한 직원을 그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방해했다. 그러던 쿠타라기가 이제 소니의 핵심사업을 책임지는 엘리트로 성장해 있었다. 쿠타라기 켄은 플레이스테이션2로 최고의 영광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의 내리막도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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