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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사람은 아마 소니에서 블랙리스트 맨 꼭대기에 있었을 것이다.” – 쿠타라기 켄

 

플레이스테이션을 위해 모인 사람들

드디어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에 시동이 걸렸다. 최고 경영회의에서 GO를 선택한 이상 이제 회사 내에서 방해할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오가 노리오 사장은 쿠타라기 켄과 플레이스테이션 팀원을 소니 뮤직에 차린 별도의 사무실로 보내주었다. 소니 내부의 방해는 신경 쓰지 말고 따로 떨어진 사무실에서 어디 한 번 마음껏 해 보라는 최고의 지원이었다.

 

이미 지난 몇 년 동안 회사 내에서 쿠타라기 켄의 강렬한 주장은 여기 저기서 충돌을 일으켰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 초기 중간관리자들이 쿠타라기 켄의 팀으로 자신들의 인재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속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그렇지만 쿠타라기 켄의 입심에 매력을 느끼고 끌린 인재들도 많았다. 쿠타라기 켄은 ‘괴짜들의 리더’로 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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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루야마 시게오(丸山 茂雄)

 

쿠타라기 켄의 괴짜 팀에 든든한 원군이 합류했다. 마루야마 시게오다. 그는 1941년생으로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 당시 이미 50세의 나이였지만 소니 내에서 괴짜 경영자로 유명했다. 양복을 입지 않고 청바지 차림으로 출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의 전신인 CBS Sony의 이사를 거쳐 후에 소니 뮤직의 사장 자리에 오르는데, 유망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발굴하는 일에 능숙했다.

 

마루야마는 진작부터 게임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소니 내에서 ‘패미컴’ 게임 개발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마루야마의 꿈을 뒷받침해 줄 개발 인력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충 만든 게임은 그렇게 대충 망해버렸다. 이러니 마루야마의 실패를 본 소니 경영진이 날뛰는 쿠타라기 켄을 보고 진저리를 칠 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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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카모토 신이치(岡本伸一)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쿠타라기 켄 본인도 우수한 엔지니어였고, 그의 휘하 ‘플레이스테이션’ 팀에는 여러 우수한 엔지니어가 합류했다. 상사에게 말 그대로 쌍욕을 먹으면서까지 이적한 오카모토 신이치도 그랬다. 그는 쿠타라기 켄과 함께 ‘플레이스테이션’ 개발의 주역을 맡았고, 이후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의 CTO까지 올랐다.

 

마루야마는 비서를 거치지 않고 오가 노리오 사장에게 직접 이야기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임원이었다. 마루야마 시게오는 쿠타라기 켄이 그런 자신의 위치를 충실하게 ‘이용’해 오가 사장과의 소통 창구로 활용(?)했다고 후에 회고했다. 경영 전문가 마루야마 시게오와 기술 전문가 쿠타라기 켄, 그리고 엔지니어들이 만나 드디어 플레이스테이션이 착착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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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쿠나가 테루히사(徳中 暉久) 그는 후에 소니 CFO 자리에 오른다. (ⓒ Impress Corporation)

 

그 다음에 합류한 사람이 토쿠나가 테루히사였다. 토쿠나가는 법무팀에서 일하다가 전략 기획 팀으로 옮겨 여러 활약을 했다. 소니의 8mm 비디오가 캠코더 시장을 장악한 것이나, 소니 픽처스를 인수한 것도 토쿠나가의 활약이 컸다. 토쿠나가는 쿠타라기가 벌이는 모험의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쿠타라기의 요청으로 플레이스테이션 팀에 합류했다.

 

“세가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 토쿠나가 테루히사

 

세가가 구원해 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가정용 게임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게임 그 자체다. 소니는 좀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초짜 소니가 직접 게임을 만들기 보다는, 게임을 만들어 줄 노련한 동맹군을 최대한 확보하겠다는 전략이었다. 1993년 초부터 쿠타라기 켄을 비롯한 플레이스테이션 팀은 일본 전역의 게임 회사를 방문하고 다녔다.

 

그러나 대부분의 게임 회사들은 소니의 제안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닌텐도가 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래가 불확실한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에 선뜻 참여하겠다는 업체는 거의 없었다. 소니 측은 플레이스테이션의 3D 성능을 강조했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그런 3D 그래픽이 10년 안에 실현되기는 하겠나?”

 

처음에는 낙관하고 있던 플레이스테이션팀은 낙담할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게임 회사들이 플레이스테이션팀에게 “이 바닥은 만만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소니라도 지금 가정용 게임기에서 손을 떼는 것이 낫다.”며 만류하는 판이었다.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충고였다. “일단 플레이스테이션 300만대를 팔면 참여를 고려해 보겠다”는 정도가 그나마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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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러니하게도 세가의 버추어 파이터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을 구원했다.

 

진퇴 양난에 처해있던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팀을 구원해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세가였다. 세가는 1993년 8월 말 게임쇼를 통해 3D 격투 게임 ‘버추어 파이터(Virtua Fighter)’의 시연 버전을 공개했다. 전 세계 게이머와 게임회사가 ‘버추어 파이터’의 등장에 큰 충격을 받았다. 10년은 걸린다던 3D 게임은 바로 눈 앞에 다가와 있었다.

 

게임회사들에 비상이 걸렸다. 이제 미래는 3D 게임의 시대였다. 3D 바람이 불자 플레이스테이션팀은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300만대는 팔아야 참여를 고려하겠다던 게임 회사들이 갑자기 소니와 손을 잡고 싶다며 앞다투어 나섰다. “3D 게임을 돌릴 수 있는 가정용 게임기가 뭐가 있지?” “얼마 전에 다녀간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이 있잖아!” 이런 식이었다.

 

게임 회사들은 소니에게 더 이상 300만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플레이스테이션의 3D 성능은 어떠냐, 매체는 무엇이냐, 로열티는 얼마냐, 게임 유통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기 시작했다. 이게 다 ‘버추어 파이터’ 덕분이었다. 그러니 토쿠나가가 “세가에 감사한다”는 이야기를 할 만 했다.

 

쿠타라기 켄의 예측이 옳았다

1992년 6월 ‘운명의 날’ 회의 때 까지만 해도 쿠타라기 켄이 열렬하게 주장한 3D 기술의 실현이 정말 가능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3D 그래픽 기술은 최첨단이고, 또 엄청나게 비싼 기술이었다. 초고가의 워크스테이션을 동원해서 겨우 실현할 수 있는 그런 기술로 취급 받았기에 쿠타라기 켄이 “3D를 앞세운 가정용 게임기로 닌텐도를 꺾을 수 있다!”고 했을 때 모두가 비웃었다.

 

쿠타라기 켄조차 당시에는 “어쩌면 그런 그래픽을 실현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라고 했지만, 사실 쿠타라기는 기술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이 있었다. 당장은 어렵더라도, 기술의 발전 속도는 충분히 빠르니 곧 ‘합리적인 가격으로’ 3D 기술을 실현할 수 있다는 엔지니어의 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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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이스테이션의 메인보드

 

플레이스테이션 개발 과정에서 쿠타라기 켄은 엔지니어로의 실력을 다시 한 번 발휘했다. 플레이스테이션은 최대한 단순한 구조여야 했고, 또 특수한 장치를 사용하는 일이 없어야 했다. 심플한 구조로, 3D에 특화된 가정용 게임기가 쿠타라기 켄이 추구한 플레이스테이션의 목표였다. 그는 이런 어려운 과제를 훌륭하게 디자인 해 냈다.

 

쿠타라기 켄의 이런 철학은 후에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이 우위를 잡을 수 있는 또 다른 요인이 되어준다. 비슷한 시기 세가가 개발한 ‘세가 새턴’은 겉으로 보기에는 CPU 2개에 비디오 프로세서가 2개 달려 있어 강력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복잡한 구조 때문에 개발자들은 이런 세가 새턴의 성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게다가 비용 절감 면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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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가 새턴의 메인보드

 

또한, 플레이스테이션의 성공을 위해서는 반도체의 안정적인 공급도 필요했는데 쿠타라기 켄은 삼성전자를 방문해 반도체 생산에 대한 동향을 직접 물어볼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쿠타라기 켄은 반도체 생산 기술의 진보 속도도 빠르며, 플레이스테이션 양산 시기가 되면 충분한 반도체 공급이 가능하리라 추측했고 이 역시 옳았다.

 

“아니, 왜 아무 반응도 없지?” – 쿠타라기 켄

 

충격의 플레이스테이션 시연회

‘버추어 파이터’ 이후 쏟아져 들어오는 게임회사들의 문의에 플레이스테이션 팀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일본 전역을 돌며 얻은 게임 회사들의 연락처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가을에 직접 시연회를 가질 테니 참석하라고 초대장을 보냈다. 

 

1993년 10월 28일, 소니는 도쿄에서 ‘플레이스테이션 시연회’를 가졌다. 오가 노리오 사장이 직접 참여해 ‘플레이스테이션’에 게임 회사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서드파티 하나 없는 가정용 게임기에 게임 회사들의 참여를 호소하는 사장의 연설은 기묘한 모습이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참석자들의 반응은 의외로 냉랭했다. 

 

그러나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쿠타라기 켄이 무대에 올라와 플레이스테이션 프로토타입으로 3D 데모를 시연했다. 화면에 3D 티라노사우르스가 나와 쿠타라기 켄의 컨트롤러 조작에 따라 이리 저리 움직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연이 모두 끝났는데 청중들의 반응이 없었다. 행사가 끝나자 참석자들은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서 퇴장했다.

 

 

쿠타라기 켄은 의아해 했다. ‘이렇게까지 데모를 보여줬는데 왜 반응이 없는 것인가? 실패인가?’ 아니었다. 정 반대였다. 참석자들은 플레이스테이션 데모에 너무나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초고급 워크스테이션이 아니라, 고작 가정용 게임기 프로토타입에서 훌륭하게 3D가 돌아갔다. 얼마 전까지 10년은 있어야 실현되리라 봤던 3D 게임이 정말 눈 앞에 다가와 있었다.

 

시연회는 대성공이었다. 다음날, 소니에 문의 전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플레이스테이션 프로토타입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려 달라며 게임회사들이 아우성을 쳤다. 300만대를 팔면 생각해 보겠다며 냉랭한 반응을 보이던 게임회사들은 시연회를 기점으로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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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이스테이션 1호 게임(SLPS-00001)은 남코의 '릿지레이서'였다.

 

한 번 시작된 흐름은 남코의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진영 참여선언으로 더욱 거세졌다. 남코는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서드파티 1호가 되었다. 남코도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의 3D 성능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고, 소니 오가 노리오 사장이 남코 나카무라 마사야 회장을 직접 만나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의 활약에 남코가 꼭 필요하다”고 정중하게 부탁까지 했다. 더 이상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남코는 3D 레이싱 게임 ‘릿지 레이서(Ridge Racer)’를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내놓기로 했고, 남코의 서드파티 참여에 대한 사례(?)로 ‘릿지 레이서’는 플레이스테이션 1호 게임이자 동시 발매작이 되었다. 남코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참여를 선언하자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수많은 게임 회사가 소니 진영에 참여하겠다고 나섰다.

 

치명적인 무기, CD-ROM

이 과정에서 쿠타라기 켄이 내세운 무기가 또 하나 있었다. 바로 CD-ROM 매체였다. 쿠타라기 켄은 닌텐도와의 합작 시절부터 CD-ROM을 선호했는데, 쿠타라기가 닌텐도를 들쑤시고 다닐 때 까지만 해도 게임기에서는 역시 롬 카트리지고 CD-ROM은 속도가 느려서 영 못 쓸 물건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쿠타라기 켄은 이런 인식을 반박하고 나섰다. 확실히 CD-ROM이 롬 카트리지보다 데이터를 읽는 속도가 느린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CD-ROM은 훨씬 고용량이고, 다양한 데이터를 한 데 담아낼 수 있고, 플레이스테이션의 구조상 CD-ROM의 느린 속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장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게임회사에 더 많은 이익을 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이 개념은 오가 노리오 사장과 마루야마 시게오 이사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얻은 다년간의 경험에서 유래했다. 소니는 음반산업의 ‘음악CD’ 생산 및 유통 개념을 그대로 플레이스테이션에 옮겨오려 했고, 당연히 매체는 CD-ROM외에는 있을 수 없었다.

 

쿠타라기 켄이 고용량이라는 CD-ROM 매체 자체의 장점을 봤다면, 오가 사장과 마루야마 이사는 CD-ROM 매체의 유통 방식에 주목한 셈이다. 이런 면에서 CD-ROM의 강점은 제작비용이 매우 저렴하고, 추가 생산이 용이하다는 것에 있다. 소니는 이 점을 내세워 매우 낮은 로열티 비용을 게임회사에 제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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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이널판타지6 롬 카트리지. (by Bryan Ochalla, flickr. CC BY-SA) 게임 하나가 만 엔이 넘었다.

 

이는 닌텐도의 강압적인 정책과는 완전히 다른 면이었다. 닌텐도는 롬 카트리지를 매체로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는 곧 돈줄이기도 했다. 롬 카트리지는 생산 비용도 많이 들고, 추가 생산에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초기 수요량 예측이 매우 중요했다. 닌텐도는 이를 빌미로 게임 회사에게 엄선된 게임을 가져오라 요구했고, 높은 로열티와 판매 부진시에 감당할 ‘보험료’까지 달라고 들었다. 롬 카트리지 생산의 특수성을 들어 유통도 닌텐도에 우호적인 도매상을 중심으로 한 ‘초심회’라는 것을 편성해 틀어쥔 상태였다.

 

이러니 게임회사들은 게임 발매에 앞서 막대한 선금을 닌텐도에 지불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게다가 초기 수요 예측에 실패하면 손해에 ‘보험료’까지 그대로 날려버리는 셈이었으니 부담은 더욱 컸다. 복잡한 구조는 소비자에게도 부담이 되었다. 생산비용, 로열티, 보험료, 도매 소매 마진이 합쳐지니 슈퍼패미컴 게임 카트리지 한 개가 만 엔을 넘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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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뒤 나온 파이널판타지7의 가격은 CD 3장이었음에도 6800엔이었다.

 

소니는 이 점을 노렸다.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CD-ROM 자체는 (닌텐도와 유사하게) 소니가 생산해서 공급하지만, CD-ROM의 특성상 유연한 생산량 조절이 가능하며 로열티도 훨씬 저렴하게 받을 것이며 보험료 따위도 없다고 강조했다. 유통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복잡한 유통 구조 대신, 소니의 음반 사업 노하우를 살려 소매점에 게임 CD-ROM을 바로 꽂아주겠다고 나섰다.

 

마지막으로 소니가 내세운 무기는 낮은 로열티였다. 소니가 생산과 유통을 모두 책임지고 심지어 기술지원과 마케팅까지 하는데도 로열티는 장당 900엔 수준에 불과했다. 결국 모든 부대비용을 다 합쳐도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CD-ROM의 소매가격은 6천엔 내외였고, 이는 슈퍼패미컴 카트리지의 1/2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면서도 게임회사가 가져갈 수 있는 이익의 폭은 더 컸다.

 

가격 전쟁

1994년 12월 3일, 드디어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이 세상에 나왔다. 이 날 일본 아키하바라에서는 플레이스테이션을 사기 위해 수 백 명의 게이머가 상점 앞에 길게 줄을 서 있었다. 3D 게임에 대한 입소문은 이미 방송과 광고를 통해 널리 퍼져 있었고, 반응은 소니의 상상 이상이었다. 단 하루만에 플레이스테이션 10만개가 팔려 나갔다.

 

예상을 뛰어넘은 수요 덕분에 플레이스테이션은 발매 당일부터 물량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소니가 공장 라인을 최대한 가동해도 수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소니가 왜 게임 사업을 해야 하냐고 핏대를 높이던 임원이, 이제는 손자를 위해 플레이스테이션 하나만 확보해 달라고 오가 사장에게 몰래 부탁할 정도였다.

 

 

물량 부족은 장기적으로 볼 때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였고, 플레이스테이션 팀은 이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다음 단계에 돌입해야 했다. 비슷한 시기 발매된 경쟁 게임기인 세가 새턴도 순조로운 출발에 성공했다. 세가는 할 수 없고, 소니는 할 수 있는 과감한 전략이 필요했다. 플레이스테이션 팀이 제시한 해결책은 가격 경쟁이었다.

 

쿠타라기 켄은 플레이스테이션 출시 시기에는 반도체 가격이 하락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은 반대로 돌아갔다. 1990년대 중반은 PC산업의 절정기였고, 반도체 가격은 계속 상승하고 있었다. 소니는 1994년 12월 플레이스테이션을 39800엔으로 출시했지만, 인기에도 불구하고 원가 상승 때문에 한 대 팔 때 마다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쿠타라기 켄과 토쿠나가 테루히사, 마루야마 시게오가 선택한 길은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방식이었다. 1995년 5월, 미국에서 열린 E3 행사에서 소니 아메리카는 “소니는 북미에 플레이스테이션을 299달러의 가격에 내놓겠다!”고 폭탄 선언을 했다. 가격 인하는 일본에 출시될 신형 플레이스테이션에도 적용될 예정이었다.

 

소니 본사는 난리가 났다. 소니는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영업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고, 자회사인 SCEI는 앞서 설명한대로 플레이스테이션을 팔 때 마다 손해를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플레이스테이션의 가격을 내리겠다고 폭탄 선언을 했다. 소니의 본업인 가전제품 시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회사 내부에서 격론이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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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이스테이션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 필요 없는 포트 등을 제거해 생산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쿠타라기 켄은 태연했다. 반도체 가격은 언젠간 떨어질 것이고, 자신이 플레이스테이션 공정을 개선하면 원가를 더욱 절감할 수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는 투였다. 당장 플레이스테이션 기계로 소소한 이익을 얻으려 하지 말고, 일단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시장을 뒤덮어버리면 이익은 자연히 따라온다 주장했다.

 

재미있게도 쿠타라기 켄의 이런 이론은 몇 년 전 세가가 ‘제네시스’ 미국 판매를 두고 벌인 상황과 아주 유사했다. 세가 아메리카 토마스 칼린스키 CEO는 ‘면도기를 팔아야 날을 팔 수 있다’는 질레트 원칙을 앞세우고 당장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제네시스 가격을 인하해 점유율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본사가 반대한다는 점까지 그대로였다.

 

소니 본사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스테이션 가격 인하안은 관철되었다. 쿠타라기 켄은 대신 생산 비용을 더욱 절감할 수 있는 공정 개선으로 부담을 줄이겠다고 나섰다. 1995년 7월, ‘신형’ 플레이스테이션의 가격은 29800엔으로 인하되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의 가격이 낮아지자 더욱 미친 듯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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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도 소니의 가격인하 공격에 새턴 가격 인하로 맞섰다. 하지만 이는 쿠타라기 켄의 함정이었다. 세가 새턴을 분해해 본 소니 엔지니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플레이스테이션의 구조와 비교하면 세가 새턴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복잡한 구조 때문에 도저히 원가 절감이 불가능해 보였다. 쿠타라기 켄은 이 점을 찔렀다. 소니가 가격전쟁을 걸면 장기적으로 볼 때 세가는 반드시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본사는 난리가 났지만 쿠타라기 켄은 배째라는 식으로 가격 경쟁을 시작했다. 29800엔이던 가격은 다시 24800엔이 되었고, 19800엔까지 떨어졌다. 물론 가격을 인하 할 때 마다 필요 없는 부품을 제외하고, 내부 공정을 개선해 원가를 절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쿠타라기 켄이 처음부터 그게 가능하도록 플레이스테이션을 설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쿠타라기 켄은 아이들에게 3D 그래픽으로 된 게임을 보여주고 싶다는 엉뚱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전력투구했고, 그 결과물은 플레이스테이션이었다.”

 

세가의 항복과 소니의 승리

1996년 1월, 스퀘어가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를 들고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진영에 참가한다고 선언하면서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은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일본 내부에서는 보급률의 한계로 서서히 플레이스테이션 판매가 둔화되고 있었지만, 반대로 해외에서는 가격 인하에 힘입어 플레이스테이션 판매량이 급증해 밸런스를 맞추고 있었다. 이어 ‘파이널 판타지7’의 출시와 함께 차세대 가정용 게임기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세가는 소니와의 첫 전쟁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쿠타라기의 술책에 제대로 말려든 꼴이었다. 도저히 원가절감이 불가능한 새턴을 끌어안고 가격경쟁을 벌이며 세가는 엄청난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세가는 항복을 선택했다. 1997년 E3에서 세가 아메리카 버나드 스톨러 CEO는 “세가 새턴은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라는 발언으로 ‘실패한’ 새턴에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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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가 새턴은 생각보다 '더' 실패한 가정용 게임기였다.

 

소니는 첫 차세대 게임기 전쟁에서 승리했다. 플레이스테이션은 2005년까지 생산이 계속되었고, 1억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초반 경쟁자였던 세가 새턴은 약 1000만대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뒤늦게 등장한 닌텐도의 닌텐도 64는 생산종료까지 3천만대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누가 봐도 완벽한 승리였다. 안방에 3D 게임을 실현하겠다는 쿠타라기의 엉뚱한 고집은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지난 세대의 제왕이었던 닌텐도도 무릎을 꿇었다. 1997년 6월, 닌텐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소니가 경쟁을 주도하고 있으며, 닌텐도는 뒤쳐졌다. 아키하바라에 가 보면 닌텐도64는 곧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라고 밝혔다. 오만함으로 유명한 야마우치 사장이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면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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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타라기 켄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다닌다며 욕을 먹고, 회사에 먹칠을 한 역적으로 꼽히던 쿠타라기 켄은 플레이스테이션의 성공으로 영웅이 되었다. 1997년에 이르면 소니 계열사들이 거둔 이익 중 약 22%가 플레이스테이션 관련 사업에서 나온 이익이었다. 소니 역사상 이렇게까지 큰 이익을 올린 단일 제품은 없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 쿠타라기 켄은 SCE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쿠타라기 켄은 여전히 멈출 줄 몰랐다. 이제 플레이스테이션 사업 전체를 지휘하는 자리에 오른 쿠타라기 켄은 ‘드림캐스트’를 앞세운 세가의 두 번째 공세를 막아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세기말 차세대 가정용 게임기 전쟁의 제2막, 그리고 쿠타라기 켄에게 있어 최고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플레이스테이션2의 등장이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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