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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일본 국립 전기 통신 대학 전자 공학과를 갓 졸업한 공학도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졸업 후 진로로 소니를 지망했다. 이 시기의 소니는 누구나 선망하는 초일류급 회사는 아니었다. 소니의 히트작 ‘워크맨’은 아직 몇 년 더 있어야 했고, 규모가 꽤 큰 전자제품 회사 정도의 인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니 입사를 고집했다. 혁신적인 기술을 연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운도 좋았다. 일본을 덮친 오일쇼크 때문에 소니는 원래 그 해도 신입사원을 뽑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신입사원을 너무 안 뽑으면 뒤쳐진다는 판단 하에 그 해 아주 조금 신입사원을 선발했다. 그는 소니에 합격했다. 이 공학도의 이름은 쿠타라기 켄(久夛良木 健, 1950~). 후에 ‘플레이스테이션’의 아버지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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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문제아 혹은, 젊은 유망주

소니에 입사한 쿠타라기 켄은 처음에는 액정 디스플레이 연구에 배정되었다. 하지만 소니는 액정 디스플레이보다는 막 개발한 최신 브라운관 기술인 ‘트리니트론(Trinitron)’에 더 주력하고 있었고, 쿠타라기 켄의 연구는 회사 내에서 곁다리 취급을 받고 있었다. 쿠타라기 켄은 좌절했지만, 굳이 상사들과 싸우는 것 보다는 자기가 연구한 걸 응용할 수 있는 새로운 연구에 나섰다.

 

그는 액정 디스플레이를 오디오와 연결해 응용해 보기로 했다. 이 시기까지 오디오 음량의 크기 등은 바늘이 달린 VU(Volume Unit) meter을 사용해 표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쿠타라기 켄은 액정 디스플레이를 이용해 표시하는 장치를 개발했다. 액정 디스플레이를 직접 쓰기에는 너무 비쌌기에, 저렴한 녹색과 빨간색 LED로 대체했고 이는 곧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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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까지 널리 사용되던 VU m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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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과 빨간색 LED로 구성된 Peakmeter은 이후 오디오 업계의 유행이 된다.

 

이후 쿠타라기 켄은 2인치 플로피 디스켓 연구에 참여하고, 사내 엔지니어들에게 PC와 소프트웨어를 ‘전도’하면서 사내의 해결사로 떠오르게 된다. 1980년대 중반 소니가 사운을 걸고 추진하던 VCR 연구 부서에서 쿠타라기 켄을 ‘내부 스카우트’하려 할 정도였다. 하지만 쿠타라기 켄은 VCR에는 흥미가 없었고, 대신 정보처리연구소로 보내 달라고 부사장에게 청원했다.

 

상명하복이 엄격한 일본 기업 문화에서 일개 연구원이 자기가 가고 싶은 부서로 옮기고 싶다고 부사장에게 청원하는 일은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그것도 한직으로 좌천되는 것도 아니고, VCR연구라는 당시 소니 내 핵심적인 부서로 꼽히던 곳으로 오라는 데 말이다. 그렇지만 쿠타라기 켄의 이 무모한 청원에 부사장이던 모리조노 마사히코는 기꺼이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감히 부사장에게 자리를 바꿔 달라고 청원하고, 여기 저기서 언쟁을 벌이고 충돌을 벌이는 쿠타라기 켄은 사장인 오가 노리오도 벌써부터 그의 ‘악명’을 알 만큼 유명했다. 그렇지만 쿠타라기 켄은 그 악명만큼이나 실력을 인정받는 유망주였다. VCR 연구 부서에서 쿠타라기 켄을 끌고 가려 한 건이나, 부사장이 ‘건방진’ 쿠타라기 켄의 부탁을 들어준 것만 봐도 그가 소니 내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알 만하다.

 

그가 찾은 소니의 새로운 길

정보처리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쿠타라기 켄은 신이 났다. 자기가 평소 하고 싶던 디지털 신호 관련 연구, 디지털 카메라의 처리 기술 개발이나 이펙터 개발 등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쿠타라기 켄이 정보처리연구소를 고집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그가 보기에 이제 소니의 미래는 ‘디지털’이었다. 디지털은 물론, 앞으로 가정용 컴퓨터가 시장을 휘어잡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은 게임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1983년 7월, 닌텐도는 가정용 게임기 ‘패밀리 컴퓨터’를 출시했다. ‘패미컴’은 말 그대로 열풍을 일으켰고, 1985년에는 북미에 진출해 게임 시장을 정복했다. 쿠타라기 켄도 딸의 성화에 못 이겨 패미컴을 사다 주었는데, 딸이 패미컴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생각보다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것이 미래가 아닐까?

 

1986년 2월, 닌텐도는 패미컴의 주변기기인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을 발매했다. 쿠타라기 켄은 이 패미컴 디스크를 돌려보고는 깜짝 놀랐다. 생각 이하의 성능이었다. 소니가 이미 개발해 놓은 플로피 디스크 기술을 이용하면 몇 배 더 빠른 성능을 체감할 수 있는데 왜 이런 구시대의 산물을 주변기기로 내놓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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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에 달린 못생기고 큰 장치가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 쿠타라기의 생각에 이 장치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저질 성능이었다.

 

얼마 뒤 쿠타라기 켄은 행동에 나섰다. 이전부터 소니의 담당 직원이 부품 판매를 위해 종종 닌텐도에 방문하고는 했는데, 쿠타라기 켄은 자신도 동행해야겠다고 박박 우겨 닌텐도를 방문했다. 쿠타라기는 닌텐도와의 첫 만남에서 대뜸 우리의 플로피 디스크를 쓰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닌텐도와 소니가 손을 잡고 게임기를 위한 저장시스템을 만들 합작 벤처회사를 세우자는 이야기였다.

 

닌텐도는 쿠타라기 켄의 제안에 대해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소니 내부에서도 쿠타라기 켄이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소니가 가야 할 길은 한창 궤도에 오르고 있던 아날로그 비디오 사업이지 애들 장난감이나 만드는 사업이 아니라는 준엄한 경고였다. 쿠타라기 켄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개의치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가기로 했다.

 

닌텐도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소니 엔지니어

벤처회사 이야기는 무관심으로 끝났지만, 이후 쿠타라기 켄은 닌텐도에 드나들며 새로운 제품의 판매에 나섰다. 쿠타라기 켄이 직접 설계한 신형 PCM(Pulse Code Modulation) 사운드 칩이었다. 쿠타라기 켄은 PCM 칩을 달면 패미컴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음질로 게임을 즐길 수 있다고 역설했다.

 

닌텐도는 난색을 표했다. 패미컴 게임들이 잘 쓰던 사운드 방식을 버리고 굳이 소니의 PCM칩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쿠타라기 켄은 끈질기게 닌텐도를 설득했고, 결국 닌텐도는 쿠타라기 켄이 직접 만들었다는 그 칩을 차세대 가정용 게임기에 탑재하기로 동의했다. 문제는 이 제안이 소니 경영진의 동의 없이 멋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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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닌텐도 슈퍼패미컴에 들어간 SPC700은 쿠타라기 켄이 직접, 그리고 경영진 몰래 설계한 칩이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경영진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고 몰래 사운드 칩을 개발하지 않나, 그걸 또 닌텐도에 들고가서 제발 좀 쓰라고 들들 볶은 끝에 진짜로 납품해 버리지 않나…평범한 사원이라면 목이 몇 번은 달아날 일이었고, 당연히 고위 임원들은 쿠타라기 켄을 성토했지만 오직 오가 노리오 사장만은 쿠타라기 켄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격려해 주었다.

 

위기는 넘겼지만, 쿠타라기 켄은 소니 사내에서 이전보다 더 악명이 높아지고 있었다. 애들이나 하는 게임인지 뭔지에 미쳐서 닌텐도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사람으로 취급 받고 있었고, 대부분의 경영진도 쿠타라기 켄이 주장하는 게임 사업에 매우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남이 뭐라든 쿠타라기 켄의 ‘닌텐도 괴롭히기’는 끝날줄 몰랐다. 사운드 칩 핑계를 대고 닌텐도에 쳐들어가서는, 이번에는 롬 카트리지 같은 저열한 매체 말고 최신 매체인 CD-ROM을 쓰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CD-ROM 기술에서 있어 최고인 소니와 가정용 게임기 분야에서 최고인 닌텐도가 손을 잡으면 최강의 동맹이 될 것이라는 강조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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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ROM은 게임 역사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도 중요한 획을 그은 매체다.

 

닌텐도 내부에서는 쿠타라기 켄의 이런 제안에 대해 격론이 오갔다. 닌텐도 쪽에서는 우에무라 마사유키가 쿠타라기 켄의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반도체 기술자 출신으로, 닌텐도의 고참 엔지니어였던 우에무라 마사유키는 신기술의 응용에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쿠타라기 켄의 사운드 칩 채용 과정에서도 우에무라는 도움을 주었다.

 

우에무라의 긍정적인 반응과, 닌텐도 내부에서도 쿠타라기 켄이 저렇게까지 나서서 들들 볶아 댈 정도면 적어도 우리가 손해볼 것 없지 않나 하는 입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1988년 내내 협상이 진행되었고, 1989년 1월 소니 오가 노리오 사장과 닌텐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이 만나 차세대 CD-ROM 플랫폼 합작 개발 계약서에 서명했다.

 

고난의 PS-X 프로젝트

어떻게 프로젝트는 출발했지만, 소니 내부의 반응은 여전히 ‘저 미친놈’에 가까웠다. 쿠타라기 켄이 ‘플레이스테이션-X(PS-X)’ 프로젝트라 이름 붙인 이 공동 개발을 위해 사내에서 인재를 모집했지만 지원자는 6개월동안 단 세 명 밖에 없었다. 중간관리자들은 쿠타라기 켄이 추진하는 쓸모없는 프로젝트에 자신들의 인재를 절대 빼앗기지 않으려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후에 ‘플레이스테이션’ 개발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엔지니어 오카모토 신이치는 원래 정보관리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굳이 ‘PS-X’ 프로젝트에 지원한다고 했다 뭐하러 그딴데를 가냐고 상사에게 욕을 얻어먹었을 정도였다. 소니 내부에서도 CD-i라는 새로운 포맷을 밀 것이냐, 아니면 CD-ROM을 밀 것이냐를 두고 부서 간의 알력이 있었다. (이는 나중에 치명적인 결과로 되돌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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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스의 CD-i 플레이어. i는 interactive를 뜻했다. 심각한 고전에도 불구하고 1991년부터 1998년까지 7년동안 생산됐지만 3DO보다도 안 팔린 기기다.

 

어쨌든 이런 내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쿠타라기 켄은 계속 밀어 붙였다. 그가 세운 계획은 간단했다. 닌텐도를 들들 볶으며 했던 이야기 그대로 게임기는 닌텐도가 만들고, 차세대 매체는 소니가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슈퍼패미컴으로 알려진 닌텐도의 차세대 가정용 게임기, 그리고 소니 주도의 차세대 매체인 CD-ROM. 둘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 원래의 ‘플레이스테이션’ 계획이었다.

 

쿠타라기 켄은 지칠 줄 몰랐다.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인원을 확충해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의 노를 저어갔다. 초기에는 케이블로 게임기 본체와 연결하는 외장형 방식으로 기획되었던 CD-ROM은, 게이머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원래 게임기의 크기를 조금 더 키운 내장형으로 변경되었다. 자그마한 버튼을 누르면 CD 트레이가 툭 튀어나와 거기에 CD를 얹고 다시 버튼을 누르면 들어가는 세련된 방식이었다. 소니 내부의 홀대와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는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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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니와 닌텐도의 합작 기기는 이런 모양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내부의 적과 쿠타라기 최대의 위기

1991년 5월 29일, 쿠타라기 켄은 이틀 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릴 세계 가전 제품 박람회(Consumer Electronics Show)에 내놓을 소니-닌텐도 플레이 스테이션 전시의 협의를 위해 교토로 향했다. 그러나 이 협의는 쿠타라기 켄 인생 최대의 위기로 끝나고 만다. 교토에 도착한 쿠타라기 켄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뜬금없게도 닌텐도 아메리카 아라카와 미노루 사장이었다.

 

아라카와 미노루 사장은 닌텐도는 소니와 더 이상 계약을 지속할 의사가 없으며, 이후 필립스와 CD-i 관련으로 협력할 것이라 통보했다. 황당한 일이었다. 네덜란드 전자회사 필립스는 CD-ROM 개발에 협력한 동맹군이자, 전자제품 시장을 놓고 다투는 라이벌이기도 했다. 소니는 이제는 옛 동맹군 둘이 서로 손을 잡고 자신을 공격하는 꼴을 보게 되었다.

 

쿠타라기의 적은 소니 내부에도 있었다. 소니의 CD-i 팀은 필립스의 CD-i 팀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고, 닌텐도가 필립스와 협력해 기존의 CD-ROM 프로젝트를 파기할 것이라는 정보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차세대 멀티미디어 경쟁에서 CD-i 가 우위를 잡는 것을 원했고, 독자적으로 CD-ROM을 들고 설치는 쿠타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방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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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스의 CD-i 프로젝트는 모회사에 재앙에 가까운 손실을 입히며 망했다. 닌텐도의 제휴 제안은 소니와의 계약 파기를 위한 면피용에 불과했다. 그나마 소위 말하는 '인터렉티브' 교육용으로 잠깐 반짝했지만 결국 이도 저도 아닌 기기에 돈을 쓸 사람은...

 

안팎으로 기습당한 쿠타라기의 입지는 난감해졌다. 소니는 이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은 상태였고, 발표를 고작 이틀 남겨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배신을 당했다. 소니 내부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뎌내고 간신히 프로젝트를 끌고 왔는데 닌텐도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꼴이 되어버렸다.

 

한편 소니에서 쿠타라기 다음으로 분노한 사람은 오가 노리오 사장이었다. 2년전 닌텐도 사장과 만나 자신이 직접 서명을 한 일이 이런 모욕적인 결과로 끝났다. 1991년 7월, 오가 노리오 사장의 주재로 긴급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소니 경영진은 빠른 시일 내로 닌텐도에 소송을 제기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오가 노리오 사장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절대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소리쳤다.

 

닌텐도는 소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비난을 감수하고 계약을 파기했다. 소니가 닌텐도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집어삼키려는 음모가 아닐까? 미국에 있어야 할 아라카와 미노루가 일본에 날아와 있던 것도 사실 소니 때문이었다. 아라카와 미노루는 ‘매체’의 주도권을 넘겨주면 곧 게임 사업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이라며 장인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을 설득했고, 야마우치가 이에 동의하며 계약을 급히 파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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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니와 닌텐도의 합작 프로젝트는 양산 직전에 프로젝트가 취소되었기 때문에 소니 입장에선 타격이 컸다. 오늘날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소니-닌텐도 '플레이스테이션' 프로토타입 기기로 알려진 사진

 

어찌어찌 소니와의 계약을 파기했지만, 닌텐도는 닌텐도대로 긴장하고 있었다. 만일, 소니가 계약 파기에 대한 보복으로 ‘슈퍼패미컴’에 공급하기로 계약한 PCM 사운드칩 생산을 중단한다면 닌텐도도 큰 타격을 입어야 했다. 그러나 소니는 ‘체면’을 생각해서 사운드칩 생산 중지는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비겁한 닌텐도는 계약을 깼지만, 소니는 그렇게 비겁하지 않다는 제스쳐였다.

 

초기의 강경함과는 달리 소니는 소송보다는 닌텐도와 협상을 원했다. 소니 입장에서 막대한 개발비와 시설 투자가 들어간 사업을 감정만으로 끝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닌텐도는 말을 바꿔 필립스와의 계약은 필립스와의 계약이고, 소니와의 계약은 소니와의 계약이라는 식으로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만약 소니가 ‘게임’에 관련된 분야를 제외한 다른 소프트웨어 사업을 하겠다면 그건 괜찮다는 조건을 걸었다. 시간을 끌기 위한 교묘한 술책이었다.

 

뒤통수도 뒤통수였고 쿠타라기 켄은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더 이상은 닌텐도 슈퍼패미컴에 미련이 없었다. 이제 소니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독자적인 게임기를 개발해 닌텐도의 콧대를 눌러주는 길이었다. 쿠타라기는 대담한 제안을 마련한다. 16비트 게임기 따위에 연연하지 말고, 아예 소니가 최신 3D 기술을 응용한 차세대 게임기를 만들어 내놓자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쿠타라기 켄은 이제 그런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쿠타라기는 소니 내에서 감히 닌텐도가 소니 얼굴에 먹칠을 하게 만든 역적으로 단단히 찍혀 있었다. 경영진은 그 게임인지 뭔지에서 당장 발을 빼고, 쿠타라기 켄을 자르라고 아우성이었다. 15억엔은? 소니의 체면은? 쿠타라기 켄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사장을 도발하다

소니가 닌텐도와 벌이던 지루한 협상은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소니는 더 이상 닌텐도의 수작에 놀아날 마음이 없었다. 소니와 닌텐도와의 짧은 제휴관계는 그렇게 원수지간으로 끝이 났고, 쿠타라기 켄도 이제 끝장이나 다름 없었다. 1992년 6월 24일, 그 동안 벌어진 사태를 놓고 경영진 회의가 열렸다. 이 날 회의의 결과에 따라 소니, 그리고 쿠타라기 켄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예상대로 거의 대부분의 임원들이 게임 사업의 철수를 주장하고 나섰다. 오가 노리오 회장이 ‘원흉’ 쿠타라기 켄에게 마지막 발언권을 주었다. 쿠타라기 켄은 전혀 풀 죽은 기색 없이 “소니가 게임 사업을 지속하는 것이야 말로 최선이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특유의 입담으로 소니가 대체 뭐가 두려워서 닌텐도에게 접고 물러나야 하냐는 도발도 잊지 않았다.

 

회의에 참석한 전원이 쿠타라기 켄의 강변에 할 말을 잃었다. 오가 노리오 사장의 안색이 서서히 변했다. 쿠타라기 켄은 소니의 기술력으로 닌텐도가 절대 쫓아오지 못 할 3D 게임기를 만들어 내놓을 수 있다고 열렬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이미 비밀리로 사내에서 3D 그래픽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으며, 지금은 구상 단계지만 기술의 급격한 발전 속도로 볼 때 곧 실용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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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교롭게도 소니가 플레이스테이션 사업을 결정한 그 해 여름, 세가는 '버추어 레이싱'을 내놓으며 본격적인 3D 게임 시대를 개막했다.

 

시작 할 때 까지만 해도 결과가 정해져 있던 회의는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쿠타라기 켄은 닌텐도를 납작하게 찍어 누를 비밀병기를 소니가 직접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치 같아 보였지만, 쿠타라기 켄은 소니의 기술이면 반드시 해낼 수 있다고 우기고 있었다. 그 이상한 자신감에 모두가 압도당하고 있었다. 

 

이 날 쿠타라기 켄의 마지막 발언은 오가 노리오 사장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런 3D 그래픽을 실현하지 못 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이대로 끝내도 좋습니까? 사장님이 직접 서명한 계약서를 닌텐도가 휴지로 만들었습니다. 천하의 소니가 닌텐도에게 이 따위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앉아 있을 겁니까?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쿠타라기의 말을 들으며 부글부글 끓고 있던 오가 노리오 사장이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진행하시오!” 이 날 회의는 엉뚱한 결론으로 끝났다. 소니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소니는 16비트 게임기 ‘따위’로 닌텐도와 맞설 생각이 없다. 소니는 닌텐도와는 차원이 다른 3D 차세대 게임기로 정면 대결을 벌일 것이다. 이 모든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책임질 사람은 쿠타라기 켄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자, 꿈을 실현할 기회였다.

 

마침내 실현되는 소니의 새로운 꿈

물론 오가 노리오 사장이 단순히 화가 나서, 도발에 넘어가서 쿠타라기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니다. 쿠타라기 켄은 소니 내부에서 이 곳 저 곳에서 말썽을 부리고 다니는 사고뭉치로 취급 받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소니의 비전은 경영자 오가 노리오 사장의 마음에도 꼭 들었다.

 

과연 오디오나 비디오만으로 소니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소니는 디지털 분야에서 계속 죽을 쑤고 있었다. 이미 1980년대 중반 게임 시장에 잠깐 발을 담갔다가 바로 뺀 적이 있었다. 경영진이 한결같이 쿠타라기 켄을 반대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이미 실패했는데 또 들어가서 뭘 얻냐는 회의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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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니는 사실 1980년대 말까지 MSX로 꾸준히 PC시장에 진입하려 했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출처: https://www.msx.org/wiki/Sony_HB-F1XDJ )

 

소니는 게임시장에, PC시장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영자의 입장에서 볼 때 새로운 길은 장기적인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쿠타라기 켄이 제시하는 3D 기술을 앞세운 차세대 가정용 게임기는 오가 사장이 찾고 있던 소니의 새로운 길이자 꿈이었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 당당하게 진입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니까 오가 노리오 사장은 사실 쿠타라기의 뻔한 속셈을 알고도 그 날 회의에서 넘어가 준 셈이었다. 진작부터 쿠타라기 켄의 무모한 도전을 밀어준 이유도 그랬다. 물론 닌텐도에게 모욕당한 복수심도 오가 노리오 사장의 결정에 한 몫을 했겠지만 말이다. 이제 가정용 게임기 사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만큼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사장까지 도발하는 대담한 제안으로 한 차례 위기를 넘긴 쿠타라기 켄이었지만 아직 갈 길은 멀었다. 이후 ‘플레이스테이션’이 일본에 출시되는 1994년 12월 3일까지는 채 18개월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쿠타라기 켄은 어떻게 1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차세대 게임기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 도대체 그가 이렇게까지 ‘플레이스테이션’을 밀어붙이며 추구한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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