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a Form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얘기는 게임사에도 통한다. 1편 [아레나]로 처음 시작된 엘더스크롤 시리즈는 [데거폴], [모로윈드], [오블리비언], [스카이림]까지 이어오면서 RPG의 절대강자로 성장했다. 동시대 수많은 RPG들이 나타나고 사라졌지만, 엘더스크롤만은 정통 RPG의 명맥을 유지하며 끝까지 살아남았다. 엘더스크롤은 그 자체가 게임으로 표현하는 자유의 의지이자 위대한 역사서다. 한편에선 RPG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성과 다른 한편에선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성이 맞물려 게임의 결을 다듬어 왔다.

유저들은 게임 속 방대한 세상에 매료됐고, 복잡하고 불친절한 시스템에 좌절하기도 했다. 때론 너무나 달라진 게임성에 충격을 받았고, 때로는 다양한 모드를 공유하며 새로운 재미를 창출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역사를 아우르는 단 하나의 키워드는 “자유”다. 엘더스크롤은 [울티마]부터 시작한 RPG의 역사에 커다란 이정표를 세운 게임이다. 이 웅장하고 매력적인 세계의 시작은 20년 전 어느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1.jpg

역사상 최고의 자유도를 보여준 엘더스크롤 시리즈. 5편 스카이림.



무명개발사 베데스다의 도전

엘더스크롤 개발사 베데스다 소프트웍스(이하 베데스다)는 대기만성형 게임사다. 그들이 시도한 모든 도전에는 늘 조롱과 우려가 따랐다. 처음 터미네이터를 게임으로 만들 때도 그랬고, 인터플레이가 포기한 폴아웃 후속작에 손을 댈 때도 그랬다. 스카이림의 혁신적인 게임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시리즈 정통성을 훼손할 것이라며 걱정부터 했다. 하지만 베데스다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묵묵히 나름의 게임관을 완성했다.

2.jpg

베데스다 창업자 크리스토퍼 위버. 이후 회사를 나와 제니맥스미디어를 설립해 게임사 인수 및 투자를 맡았다. 베데스다소프트웍스도 제니맥스미디어 산하의 스튜디오다. 최근 존카멕의 id소프트가 제니맥스미디어 산하로 들어가 화제가 됐다.


1986년, 창업자 크리스토퍼 위버에 의해 설립된 베데스다는 그 시절 우후죽순 난립했던 그저 그런 게임사 중 하나였다. 회사 이름을 베데스다로 지은 이유는 회사사옥이 미국 메릴랜드 베데스다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성경에 나오는 베데스다와는 상관없다고 한다). 직원도 10명 안팎의 소규모 개발사로 시작했다. 설립 초기에는 FPS, 레이싱, 시뮬레이션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게임을 개발했다. 그러나 딱히 성공한 작품은 없다.

베데스다가 세간에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터미네이터를 게임으로 만들면서부터다. 사람들은 허접한 게임 하나가 좋은 영화를 망친다고 비아냥거렸다. 당시 시장에선 영화를 소재로 한 게임은 대부분 졸작 취급을 받았다. 특히 인지도 높은 영화일수록 관련게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심했다. 영화의 인기에 편승해 말도 안 되는 쓰레기를 찍어낸다는 인식이다. 미국 게임시장을 통째로 말아먹은 아타리 쇼크의 장본인도 [E.T]게임이었다. 최고의 영화가 최악의 게임으로 돌변한 하는 건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한낱 무명 개발사가 당대 최고 인기영화를 게임으로 만든다는 자체가 우스웠을 것이다.


저주받은 걸작, 터미네이터 시리즈

하지만 베데스다의 터미네이터 게임은 뭔가 특별한 점이 있었다. 1인칭 액션장르로 제작된 게임은 영화의 인기에 편승한 완성도 떨어지는 게임들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무엄하게도 원작을 거부한 것이다. 원작 영화의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영화에 없는 새로운 이야기를 그려 넣었다. 2편격인 [터미네이터 2029]에선 원작의 이야기와 캐릭터를 완전 무시하고 새로운 터미네이터 세계관을 창조했다. 실시간 액션장르를 기반으로 플레이어는 존코너 휘하의 병사가 되어 기계들과 싸우는 미래전쟁을 다뤘다. 1993년 등장한 [터미네이터: 램페이지]는 실질적으로 엘더스크롤 시리즈의 모체가 되는 게임이다. 1인칭 게임으로 제작된 램페이지는 무늬만 터미네이터일 뿐 영화의 분위기와는 완전 달랐다. 광활한 스테이지와 디테일한 구성은 단순한 액션게임을 넘어 RPG의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다. 1995년 발매된 [터미네이터: 퓨처쇼크]는 자유도를 더욱 보강해 FPS시장에 파란을 일으켰다.

3.jpg

베데스다 초창기에 만든 터미네이터 시리즈. 영화의 인지도에 기대지 않고 독창적인 게임성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저주받은 걸작으로 남게 됐다. 게임에 대한 평가는 좋았지만 상업적으로 주목 받지는 못했다. 우선 시대를 잘못 만났다. 8~90년대 [울펜슈타인3D]와 [둠] 같은 전설적 작품들과 힘든 경쟁을 펼쳐야 했다. 사람들은 무늬만 액션이고 실상 RPG와 비슷한 이 애매모호한 게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베데스다는 터미네이터 게임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들은 터미네이터란 영화 자체보다 영화속 세계를 구현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액션에서 RPG로 과감히 진로를 변경했다. 어정쩡한 양산형 액션게임을 만들기보다 정통 RPG쪽이 더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RPG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RPG의 이단아! 엘더스크롤: 아레나


4.jpg

처음 액션게임으로 제작됐다가 막판에 RPG로 선회한 ‘엘더스크롤: 아레나’. 장대한 RPG 서사시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처음 기획된 엘더스크롤은 RPG가 아니었다. 개발 도중 기획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터미네이터 시리즈로 자신감을 얻은 베데스다는 판타지세계를 배경으로 한 1인칭 액션게임을 기획했다. 거창하게도 원형경기장을 뜻하는 아레나를 제목으로 달았다. 초기설정은 검투사들의 격투를 다룬 액션게임이었다. 검투사가 되어 탐리엘이라는 가상세계를 여행하며 적을 하나씩 쓰러뜨리는 토너먼트 방식의 게임이다.

당시 게임시장은 1인칭 액션게임이 대세였다. 그러나 [울티마], [마이트앤매직], [위저드리] 같은 정통 RPG 장르는 80년대 전성기를 지나 황혼기로 접어들었다. 게임사들은 빠르고 화끈한 재미의 FPS와 RTS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베데스다도 시장의 흐름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시장의 대세를 따르기로 했다. 아레나라는 이름으로 광고까지 내보낸 상태였다.

하지만 베데스다 개발자들은 RPG 대한 열망을 주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평소 [울티마 언더월드] 같은 정통 RPG 마니아였던 그들은 아레나를 단순한 액션게임으로 만들지 않았다. 다양한 던전과 퀘스트, 캐릭터 성장개념 등 RPG적 요소를 도입했다. 처음엔 액션게임으로 시작했지만 완성하고 보니 RPG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개발진들은 아레나를 액션이 아닌 RPG 장르로 발매하기로 했다. RPG 느낌을 살리기 위해 아레나 앞에 엘더스크롤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RPG의 대명사로 불리는 엘더스크롤이라는 타이틀은 이런 우연한 계기로 인해 탄생한 것이다.

5.jpg

1편 아레나는 액션과 RPG 사이에서 방향을 잃고 말았다. 흥행은 실패했지만 골수 마니아층을 형성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아레나를 보는 세상의 눈은 곱지 않았다. 한 예로 베데스다 개발자가 [위저드리7]을 만든 서텍을 방문해 조언을 구하려다가 당신들도 그런 걸 만들 줄 아냐며 비웃음만 산적도 있다고 한다(위저드리 시리즈는 80년대 대표적인 RPG 브랜드). 사람들은 액션과 RPG를 넘나드는 아레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RPG도, 그렇다고 액션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게임으로 취급 받았다. RPG 시장에서 엘더스크롤: 아레나는 이단아에 불과했다.

그렇다보니 판매성적도 신통치 않았다. 막판에 RPG로 선회하다보니 발매일이 늦어졌고, 결국 대목시즌인 크리스마스 시즌도 놓쳤다. 독특한 게임을 좋아하는 마니아층이 게임을 사주면서 손해는 겨우 면했다. 아레나는 비록 세간의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이후 시리즈의 원형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2년 후, 베데스다는 엘더스크롤 시리즈를 정통 RPG 반열에 올려 놓았다. 시리즈 중 가장 논란이 많았던 엘더스크롤2: 데거폴이 나온 것이다.


할 게 너무 많아 짜증나는 게임. 데거폴

“1996년이 디아블로의 해였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고사해 가던 롤플레잉 장르를 회생시킨 구세주로서 디아블로는 분명 그 해 최고의 게임이었다. 하지만 롤플레잉으로서 1996년 최고의 작품이 과연 디아블로였을까? 단호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엘더스크롤:데거폴이 있었기 때문이다.”
- 피시파워진 서장원 편집장(엘더스크롤 모로윈드 리뷰 중)

6.jpg

가장 방대한 게임맵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엘더스크롤2 데거폴. 실질적인 엘더스크롤 시리즈의 뿌리가 된 게임이다


1996년, 엘더스크롤의 2번째 시리즈 데거폴이 발매됐다. 데거폴부터 엘더스크롤은 RPG로써의 확실한 포지션을 잡았다. 2편은 탐리엘의 일부지역인 하이락과 헤머펠을 배경으로 한다. 데거폴의 가장 큰 특징은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드는 스케일이다. 제작진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세계를 게임으로 구현하기 위해, 당시로썬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맵을 구현했다. 맵 전체를 횡단하는 데 실제시간으로 2주일 이상 걸렸고, 그 넓이가 영국 본토만하다고 한다. 여기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NPC와 마을을 추가해 넣었다. 3D로 구현된 세계는 마치 한 국가를 게임 속에 통째로 넣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데거폴은 당시 가장 방대한 게임맵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콘텐츠가 방대한 만큼 버그도 많아서 버그폴이라는 반갑지 않은 별명까지 들어야 했다.

데거폴은 극강의 리얼리티를 구현했다. 예를 들어 게임에 나오는 모든 아이템은 각자의 무게가 있다. 심지어 캐릭터가 돈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으면 무거워서 이동속도가 느려진다. 맵은 넓어 갈 길은 먼데, 무거운 아이템 때문에 발목이 잡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던전도 한번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구성됐다. 캐릭터 성장이 까다로워 결국 레벨 미션 반복으로 게임을 풀어나가야 했다. 또한 퀘스트에는 시간제한이 있어 허둥지둥 하다가는 헛걸음만 치게 된다. 할 게 너무 많아 짜증날 정도였다.

7.jpg

당시로썬 상상할 수 없는 방대한 세계관을 자랑하지만, 잦은 버그 때문에 버그폴이란 오명을 쓰기도 했다


데거폴은 엘더스크롤의 세계관을 정립했고, 자유도를 위한 여러 가지 실험적 시스템을 도입했다. 시장에선 게임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렸다. 골수 RPG 마니아들은 열광한 반면, 일반유저들은 경악할 정도의 난이도 때문에 게임을 실행하자마자 포기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워낙 매니악스러워서 그런지, 베데스다는 시리즈 외전격인 엘더스크롤:배틀스파이어와 레드가드는 쉬운 액션게임으로 내놨다. 그러나 두 게임 모두 평범한 게임성으로 세간의 관심 속에서 금세 사라졌다. RPG의 이상을 따르는 취지는 좋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취향을 고려치 않는 그들만의 게임에 머물러 있었다. 같은 해 출시된 디아블로가 실시간 RPG로 대중적인 사랑을 독차지 한 것에 비하면 대조적인 모습이다. 데거폴의 실패로 자금난에 시달린 베데스다는 결국 개발진들이 대거 퇴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8.jpg

데거폴 이후 엘더스크롤 외전격으로 출시된 ‘배틀스피어(좌)’와 ‘레드가드(우)



모로윈드, 위기의 엘더스크롤을 구하다


9.jpg

시리즈를 흥행작 반열에 올린 엘더스크롤3:모로윈드. 대부분의 게이머들이 이 작품부터 엘더스크롤 시리즈를 알게 됐다


RPG같지 않은 아레나, 너무나 RPG에 집착한 데거폴. 엘더스크롤은 이 양극단의 접점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했다. 개발자들이 대거 이탈했기 때문에, 3편 제작에는 6명의 개발진들이 참여했다(이 적은 인원으로 모로윈드를 만들었다는 자체가 대단하다). 시행착오가 거듭될 수록 개발기간도 길어졌다. 시리즈 3편 모로윈드는 데거폴이 나온 지 6년이 지난 2002년에 발매됐다. 세월이 지난 만큼 시장상황도 달라져있었다. 2000년 이후 RPG의 흐름은 이미 온라인게임으로 넘어가 있었다. [울티마], [마이트앤매직], [위저드리] 같은 싱글 RPG가 퇴보하고, 온라인RPG 시대가 왔다. [에버퀘스트], [다크에이지오브 카멜롯], [울티마온라인] 같은 MMORPG들이 시장의 주류를 형성했다. MMORPG들은 기존 싱글RPG의 수십배 규모의 방대한 양의 콘텐츠를 내세워 유저들을 끌어 모았다. 혼자서 RPG를 즐기던 시대는 끝난 것이다.

이런 시기에 출시된 모로윈드는 엘더스크롤 시리즈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이다. 코어한 게임성은 그대로지만, 이번엔 그래픽을 대폭 개선했다. 그래선지 시리즈 최초로 콘솔게임용(XBox)으로 출시됐다. 게임의 배경은 탐리엘 대륙의 한 부분인 바던펠 섬을 무대로 한다. 전작 데거폴보다 맵의 규모는 작지만 다양한 아이템과 디테일한 시스템, 그리고 화려한 그래픽으로 유저들에게 어필했다.

무엇보다 모로윈드를 시작으로 엘더스크롤 특유의 자유도가 꽃을 피웠다. 주인공은 갓 석방된 전과자 출신이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개인은 물론 사회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 길드와 종교, 정치적 성향에 따라 파벌을 형성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특정 집단에 소속될 수도 있고 혼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있다. 심지어 선과 악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위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쫓아가 도울 수도 있고, 반대로 약탈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플레이어의 선택에 달렸다. 모로윈드는 기존의 레벨업 시스템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의 경험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용하는 스킬이 상승할 때마다 레벨이 오르는 개념이다. 때문에 특정 무기나 스킬을 집중적으로 연마해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10.jpg

시리즈 특유의 자유도는 모로윈드에서 완성됐다. 하지만 잦은 버그는 여전히 플레이어의 발목을 잡았다


이처럼 모로윈드는 흥미롭고 다양한 선택의 길이 널려 있는 거대한 세계를 게이머들에게 선사했다. 또한 당시엔 매우 생소했던 DLC(다운로드 콘텐츠) 개념을 도입했다. 인터넷에서 새로운 콘텐츠를 다운받아 게임을 확장시키는 시스템이다. 모로윈드는 전작과는 달리 그해 최고의 게임으로 극찬을 받았다. 이때부터 엘더스크롤의 명성이 일반 게이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게임은 흥행과 비평 두 가지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이런 엄청난 게임을 고작 30명 정도의 개발인원으로 만들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확장팩으로는 엘더스크롤3:트리뷰날, 엘더스크롤3:블러드문이 나와 있다.


여기가 모드의 왕국이냐! 오블리비언

모로윈드로 탄력을 받은 엘더스크롤 시리즈는 2006년 4편 오블리비언을 내놓았다. 기본적인 게임성이 워낙 탄탄하기 때문에 개발일정은 순탄했다. 이번에는 탐리엘과 미지의 대륙에서 펼쳐지는 오블리비언 사건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래픽 적으로 진일보했다. 전작에 비해 콘텐츠 양은 줄이는 대신 그래픽 품질에 심혈을 기울였다. 4편은 콘솔을 베이스로 제작됐는데, 그 덕에 조작이나 인터페이스가 전작에 비해 단순해 졌다. 시리즈 전매특허인 자유도는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나쁜 짓을 하면 악명을 떨치고, 좋은 일을 하면 명성을 쌓는데, 어느 쪽으로 치우치냐에 따라 게임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스킬 연마에 따라 레벨이 달라지는 독특한 레벨업 방식은 전작 그대로다. 또 캐릭터의 모든 대사를 성우의 목소리로 더빙했다.

11.jpg

시리즈 4편 오블리비언. 전작 모로윈드에 비해 콘텐츠양은 줄인 대신 디테일을 살린 작품.


이 게임이 대단한 점은 게임내적인 부분보다 외적인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게이머들에게 콘텐츠를 개방한 것이다. 이 게임은 누구나 게임모드를 이용해 다양한 형태로 콘텐츠를 변화시킬 수 있다. 우선 모드 설치가 굉장히 자유롭다. 유저들은 각양각색의 UCC 모드를 만들어 인터넷을 통해 공유했다. 이렇게 쌓인 창의적인 모드들은 게임진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여성 캐릭터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들면 미소녀 캐릭터 모드를 설치하면 되고, 돈이 부족하면 은행에 돈을 예금해 이자를 받아먹는 고리대금 모드를 설치하면 된다. 심지어 캐릭터를 누드로 만드는 성인모드가 유포되어 미국 심의기관이 게임등급을 높이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데스다는 게이머들의 모드제작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심지어 5편 스카이림 개발 때는 모드제작 경험이 있는 사람을 직원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사실 개발자가 유저에게 콘텐츠를 재창조할 권리를 준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다. 오블리비언처럼 모드제작 열풍은 의외의 히트작을 낳는 다는 점에서 게임사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과거 [카운터스트라이크]는 [하프라이프]의 모드로 만들어졌고, [리그오브레전드]도 [워크래프트3]의 유즈맵에서 출발했다.

12.jpg

오블리비언부터 모드제작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유저들이 직접 만든 모드가 보태져 더욱 다양한 재미를 선사했다


오블리비언은 정해진 발매일보다 4개월 늦게 출시됐지만, 나오자마자 흥행에 성공했다. 발매 3주 만에 1백 만 장이 판매됐고 시장에서도 호평을 받았다(정통 롤플레잉 장르가 1백만장 이상 팔리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물론 2006년 최고의 게임상(GOTY)은 당연히 오블리비언 차지였다. 이미 엘더스크롤은 RPG의 제왕이 되어 있었다. 누구도 오블리비언을 플레이하며 과거 아레나나 데거폴 때의 흑역사를 떠올리지 않았다. 이제 남은 숙제는 이 영광을 어떻게 이어 나가냐는 것이다. 5편 스카이림은 그런 고민에서부터 시작됐다.


전통을 지킬 것이냐, 새롭게 진화할 것이냐

오블리비언 발매 이후 팬들에게 천청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엘더스크롤의 아버지라 불리는 캔 롤스톤이 베데스다를 떠난 것이다. 과연 어떤 사연일까? 앞서 설명 했듯이 모로윈드는 상당히 열악한 환경에서 만들어졌다. 적은 인원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인물이 캔 롤스톤과 토드 하워드다. 수석디자이너 캔 롤스톤은 TRPG 디자이너로써 엘더스크롤의 세계관을 창조한 인물이다. 그는 방대한 판타지 지식을 바탕으로 시리즈 전체의 배경이 되는 탐리엘 대륙을 구상했다. 프로그램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음에도 탁월한 기획력과 상상력으로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13.jpg

엘더스크롤 시리즈의 핵심개발자 캔롤스톤(좌), 토드하워드(우). 정통 RPG를 고집했던 롤스톤과 변화를 추구했던 하워드는 결국 오블리비언을 끝으로 갈라선다.


토드 하워드는 캔롤스톤 밑에서 게임디자이너를 맡았다. 그는 [폴아웃3]와 [스카이림]을 만들어 베데스다를 정상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터미네이터 게임에 감동을 받아 게임개발을 결심한 그는 베데스다에 지원 했으나 떨어졌다. 대학 졸업 후 다시 입사한 그는 엘더스크롤 1편의 베타테스터로 개발에 참여했고, 데거폴부터는 퀘스트 디자인을 맡았다. 모로윈드는 이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만든 작품이다.

그런데 모로윈드 성공 후 후속작 개발에서 두 사람은 마찰을 빚었다. 각자 게임에 대해 지향하는 바가 달랐기 때문이다. 롤스톤이 정통 RPG 방식을 고수하는 보수적 개발자라면, 하워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게임도 변해야 한다는 진보적 성향의 개발자다. 롤스톤은 자신이 전공했던 TRPG의 세계를 게임에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 우선과제였고, 하워드는 보다 재미있고 편한 게임을 만드는 게 먼저였다. 결국 두 사람의 개발이념은 차기작 오블리비언에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롤스톤은 오블리비언 개발 도중하차 하면서, 하워드 혼자서 시리즈를 책임져야 했다. 재미있는 건 이후 게임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이다. RPG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캔 롤스톤, 순수한 게임으로써의 재미를 추구하려 했던 토드 하워드. 옳고 그름을 떠나 두 사람의 개발이념은 엘더스크롤 시리즈를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스카이림의 불안한 출발

“사람들은 게임을 보다 적극적으로 즐기는 코어유저의 수를 과소평가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유저들이 실제 코어성향이며, 우리는 그에 맞는 것을 제공할 뿐이죠. 게임을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의도적으로 대중적인 게임을 지향하지는 않습니다.”
- 스카이림 수석 디자이너 토드 하워드(게임인포머 인터뷰 중)

스카이림은 캔 롤스톤이 빠진 상태에서 불안하게 출발했다. 보수적 성향의 RPG 유저들은 롤스톤이 빠진 엘더스크롤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게임에 대한 고정관념은 의외로 심각했다. 사람들은 새롭게 5편 제작을 맡게 된 토드 하워드를 믿지 못했다. 과거 하워드가 주도했던 배틀스피어와 레드가드는 엘더스크롤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아까운 졸작이었다. 정통 RPG였던 엘더스크롤을 한순간에 액션게임으로 만들어 버린 황당한 시도에 경악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 하워드의 엘더스크롤은 그저 비주얼만 화려한 상업적 게임에 불과했다. 게임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게임성에 대한 논란부터 일어났다.

14.jpg

캔 롤스톤이 빠진 엘더스크롤5 개발은 여러 면에서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하워드는 인터뷰에서 “의도적으로 대중적인 게임을 지향하진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그만큼 롤스톤이 제시한 정통RPG의 ‘보수성’은 팬들의 뼈속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하워드는 골수 유저들도 만족시키면서, 재미있고 쉬운 게임을 만들어야 하는 힘든 숙제를 떠안게 됐다. 이 양극단의 접점을 찾는 것이야 말로 5편의 최대 목표였다.

그러나 베데스다는 허둥대지 않고 하워드의 방향대로 밀고 나갔다. 이미 그들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어설픈 게임사가 아니었다. 엘더스크롤 시리즈와 폴아웃 시리즈를 만들어 오면서 수많은 RPG 노하우를 축적해 왔다. 유저들이 좋아하는 RPG의 방향을 아는 개발사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게임이 엘더스크롤5:스카이림이다.


디아블로를 누르고 최고의 RPG가 되다

"개발자 스스로가 게임을 즐기고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모두가 게임을 즐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배우고, 플레이해서, 도전하는 게임 디자인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스카이림 수석 디자이너 토드 하워드

2011년 발매된 엘더스크롤5:스카이림은 앞서 모든 우려를 한 번에 불식시켰다. 콘텐츠의 깊이는 전작 오블리비언을 가볍게 능가했고, 화려한 그래픽은 플레이어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스카이림은 전작으로부터 200년 후의 세계가 배경이다. 탐리엘 북쪽의 지역 스카이림에서 출현한 고대 드래곤의 부활과 사건 등을 흥미진진하게 다뤘다. 게임의 비주얼은 진정 RPG 그래픽의 신기원이라 할 정도로 경탄을 자아냈다. 일 년 내내 눈보라가 내리치는 혹한의 땅을 마치 풍경화를 그리듯 유려하게 묘사했다. 제작사는 험한 빙산과 웅장한 툰드라의 절경을 표현하기 위해 자체 제작한 크라에이션 엔진을 사용했다.

15.jpg

북부지방의 설원을 배경으로 한 스카이림. 게임에서 묘사한 풍경은 마치 실제 그곳에 가있는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사실적이다


죄수로 끌려온 주인공은 사형직전에 드래곤의 공격을 받아 탈출한다. 드래곤 본의 운명을 타고난 주인공은 스카이림 지역을 돌아다니며 강력한 용들과 전투를 벌여야 한다. 스카이림은 전작의 단점으로 지적된 액션부분을 집중적으로 보강했다. 주인공은 양손으로 무기를 들 수 있고, 무기에 따라 액션도 다르다. 3인칭 시점으로 게임을 하면 박진감 넘치는 전투를 펼칠 수 있다. 기존의 복잡했던 시스템도 간단하게 정리했다. 스킬의 종류는 전작의 21개에서 18개로 축소되었고, 레벨 업 때마다 플레이어는 체력과, 마나, 스테미너 중 하나에 자유롭게 포인트를 투자할 수 있다. 또, 클래스 제한 없이 마음에 드는 스킬을 배울 수 있다. 겉보기에는 천상 액션게임인데 속을 들여다보면 RPG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게임은 스토리 전개가 탁월하다. 플레이어는 자유롭게 스토리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스토리가 얼마나 촘촘하게 짜여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펼쳐나가든 극적인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특히 NPC들과의 관계는 스토리를 이끄는 핵심적 요소다. 게임 내 모든 NPC들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설계됐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가 마을의 NPC를 죽이고 도망가면, 사망한 인물의 가족이 복수를 하기 위해 플레이어를 쫓아다닌다. 이렇듯 친밀도에 따라서 NPC들이 주인공을 대하는 반응이 달라진다. 때문에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는 NPC의 경우 그들과의 친밀도를 높여야 게임을 편하게 할 수 있다(심지어 NPC와 결혼도 가능하다).

16.jpg

게임 속 NPC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토리가 달라진다. 액션게임을 보는 듯한 타격감은 RPG의 전투방식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 시켰다.



유저에게 게임을 내놓다

스카이림은 모드의 접근성을 높였다. 누구나 편하게 모드를 만들고 설치할 수 있도록 게임을 내놓았다. 게임에 새로운 종족을 추가하거나, 캐릭터의 외형을 바꾸고, 새로운 마법을 추가하는 등 유저들은 자유롭게 게임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나갔다. 모드도 훨씬 쉽게 만들 수 있도록 제작 툴을 제공했다. 또, 제작된 모드를 한곳에 모아 쉽게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놀랍게도 모드 보관소에는 오픈 하자마자 수천 개의 모드가 등록됐다. 특히 유저들이 직접 만든 한글화 패치는 스카이림을 국내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스카이림은 던가드, 허스파이어, 드래곤본 총 3편의 확장팩(DLC)이 발매됐다.

스카이림은 흥행에서도 성공했다. 발매 일 주 일만에 700만장을 판매하며 [GTA], [콜오브듀티]와 같은 초대박 게임의 대열에 합류했다(국내에서도 품절사태를 낳았다). 비평에서도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올해의 게임상에서 최다부분 수상을 하며, 게임성과 흥행성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엘더스크롤은 스카이림을 기점으로 [디아블로]를 뛰어넘어 RPG 장르의 최고 브랜드로 등극했다.

17.jpg

스카이림 모드를 이용해 캐릭터의 외형을 완전 바꾸었다. 사진은 유저가 올린 미소녀캐릭터 모드의 한 장면



최고의 가치는 자유

현재 베데스다는 엘더스크롤: 온라인을 개발하고 있다. 지상최고의 RPG가 온라인세상과 만나면 어떤 엄청난 세상을 보여줄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더 이상 엘더스크롤이란 이름 앞에서 걱정이나 의심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20년 전, 어설프게 시작했던 이 신생게임이 세월이 지난 지금 가장 위대한 RPG로 당당히 서있기 때문이다. 당분간 엘더스크롤의 아성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엘더스크롤의 핵심은 자유다. 자유는 엘더스크롤의 시작이자 끝이다. 정해진 스토리에 옭아매지 않았고, 특정 퀘스트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유저들이 콘텐츠를 변경하도록 배려했고, 필요하다면 UCC 모드를 게임에 적극 반영했다. 게임이 엉뚱한 방향으로 갔을 때도, 너무 어려워 유저들을 비난이 이어질 때도, 크고 작은 버그로 몸살을 앓았을 때도, 핵심개발자가 떠났을 때도, 자유에 대한 의지를 놓치지 않았다.

엘더스크롤의 세계는 정답이 없다. 어떻게 플레이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게이머 앞에 펼쳐질 세계는 자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곧 캐릭터의 역할(Role)이 된다. 그런 점에서 엘더스크롤은 게이머들이 항상 꿈꿔왔던 방대하고 자유도 높은 서사시적 롤플레잉에 가장 근접한 게임이다.


참고문헌
위키피디아 베데스다소프트웍스/엘더스크롤 항목
피시파워진 2002년 6월 엘더스크롤 모로윈드 리뷰
게임인포머 토드하워드 인터뷰
게임메카 '스카이림, 추가 DLC 없다… 차기작 개발 돌입'
디스이즈게임 '베데스다 모회사, id 소프트웨어 인수'


댓글 0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