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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간 변치 않은 게임성으로 한국 게임사와 함께한 [리니지2]>



1998년 동네 PC방에서 [리니지]를 처음 보았을 때, 솔직히 별로였다.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화면에 캐릭터 하나 덜렁 던져 놓고, 돌아다니는 몬스터를 아무 생각 없이 잡기만하는 소위 ‘레벨노가다’ 게임으로 여겨졌다.

2001년에 다시 만난 [리니지]는 매혹적이었다. 거의 모든 국산 MMORPG들이 [리니지]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리니지]는 온라인게임 시장에서 최고의 흥행작 대열에 올라있었다. 사람들은 수백 만 원의 현금을 들여서까지 [리니지] 아이템을 살 정도로 게임에 빠졌다. [리니지]의 치명적인 매력은 각종 사회문제를 야기했다. 사람들은 이 매력적인 게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리둥절했다.

2004년, [리니지]는 새롭게 변했다. 3D의 화려한 옷을 갈아입고 [리니지2]란 이름으로 다시 나왔다. [리니지2]는 전작만큼 엄청난 흥행을 거두며 온라인게임 시장을 재편했다. 2006년, [리니지]는 힘들어 보였다. 사상 초유의 명의도용 사태를 겪으며 안팎으로 힘든 세월을 보냈다. 언론의 질타와 유저들의 대규모 소송으로 [리니지]는 혹독한 댓가를 치뤄야 했다. 2008년, [리니지]는 절망했다. 개발자 중 몇 명이 차기작 [리니지3]의 핵심기술을 일본에 유출시킨 것이다. 한때 한솥밥 먹고 게임을 만들었던 사람들끼리 법적 소송에 휘말렸다. 결국 [리니지3]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고, 배신감과 절망감이 [리니지]를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2011년, [리니지]는 다시 일어섰다. 바포매트 업데이트 이후 [리니지]는 전성기 때의 인기를 회복했다. 게임을 떠났던 유저들이 다시 되돌아오면서, [리니지]는 전례 없는 중흥기를 맞았다. 2013년 현재, [리니지]는 예전 그대로 변함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유저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 왔던 [리니지]는 이미 오래된 연인 같은 게임이 되어버렸다. 그 속에는 격동의 한국 게임사를 걸어온 사람들의 눈물과 노력, 꿈의 결정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리니지]의 15년의 추억을 되짚어보자.


리니지는 살아남기 위한 오기로 만들었다

“솔직히 [리니지]는 창조와 혁신 같은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만든 게임이 아닙니다. 당시 저를 비롯한 한국개발자들은 일종의 ‘오기’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미국의 [울티마]나 일본의 [파이널판타지] 같은 괜찮은 롤플레잉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되지 않는가.’ 이런 생각으로 만든 게임이 [리니지]였죠.”
-엑스엘게임즈 대표 송재경 인터뷰 중


얼마 전 엑스엘게임즈 송재경 대표를 찾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리니지]를 개발하게 된 동기부터 물었다. 뭔가 거창한 대답을 기대했건만, 막상 돌아온 말은 의외였다. “거창한 의미는 없습니다. 우리도 [울티마] 같은 RPG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리니지]를 만들게 됐죠. 하지만 게임을 만들어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존본능 같은 것이 더 많이 작용했죠.” [리니지]는 좋은 환경에서 만들어진 게임이 아니다. 외국게임에 대한 열등감, 온라인게임에 대한 생소함, 여기에 IMF 경제난 등 현실적 악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게임이다. 당시 송재경 대표(현재 엑스엘게임즈 대표)는 엔씨소프트에서 [리니지]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넥슨에서 [바람의 나라]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리니지] 개발자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중학교 시절 애플컴퓨터를 접하고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매료됐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로 진로를 잡았다. 대학에서 그는 친구 김정주 대표(현재 넥슨 대표)와 만나 프로그래머의 꿈을 키웠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카이스트에 입학한 후 [쥬라기 공원]이라는 최초의 머드게임을 만들었다. [쥬라기 공원]으로 짭짤한 수익을 올린 그는 김정주 대표와 벤처기업 넥슨을 창업해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갔다([바람의 나라] 개발과정은 게임대백과 [바람의 나라] 편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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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엘게임즈 송재경 대표. [바람의 나라], [리니지], [아키에이지]를 개발한 한국온라인게임의 명인.>



송재경은 한곳에 안주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넥슨을 나와 아이네트라는 조그마한 회사에 입사했다. 그는 [쥬라기 공원]과 [바람의 나라]를 만들었지만, 텍스트 기반의 머드게임은 아무래도 세계 수준에 비하면 한계가 있었다. 그는 그래픽 기반의 온라인 롤플레잉게임에 도전했다. 만화가 신일숙 씨의 작품 [리니지]에 감동을 받은 그는 동명의 게임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신일숙 작가를 여러 차례 찾아가 설득한 끝에 [리니지] 게임개발 허가를 받았다.

[리니지] 개발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1997년 당시, IMF 위기가 한국을 강타하면서 기업들이 줄줄이 파산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사실 국내 온라인게임 개발자 1세대에게 있어 IMF는 반드시 넘겨야 할 성장통과도 같은 것이었다. 송재경이 몸담고 있는 아이네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회사가 어려워지자 [리니지] 팀은 구조조정 압박에 시달렸다. 아이네트는 [리니지] 프로젝트를 전면 중단했고, [리니지] 팀은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리게 생겼다.

[리니지]는 회사로부터 찬밥신세로 전락했다. 이때 팀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면 지금의 [리니지]는 아마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 한국에 온라인게임 시대가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송재경 대표는 이때를 회상하며 “앞뒤 돌아볼 것 없이 오기로 게임을 만들던 시절”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던 중 [리니지]를 살릴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엔씨소프트의 창업자이자 한국 게임업계의 풍운아 김택진이란 인물을 만나게 된다.


김택진의 [리니지] ‘인터넷은 즐거움과 문화의 공간’

“저는 인터넷을 사람들이 같이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즐거움과 문화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인터넷을 정보의 망으로 알고 있을 때 저는 ‘엔터테인먼트의 망’으로 보았죠”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서울대학교 강연 중)


송재경이 [리니지]를 빚은 장인이라면, 김택진은 [리니지]를 담은 그릇이다. 그는 엔씨소프트를 창업하고 [리니지]를 본격적으로 서비스한 인물이다. 어릴 적 그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다. 소년시절 야구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그는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해 공학도로써의 꿈을 키웠다. 대학교 컴퓨터 연구 동아리에서 만난 이찬진 씨와 함께 한글 워드프로세서 개발에 참여했다. 당시만 해도 한글로 된 국산 워드프로세서가 없는 상황이라 비싼 돈을 주고 컴퓨터를 사도 업무에 활용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 영어로 된 프로그램을 불법 카피해서 쓰던가, 게임용으로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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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씨소프트 창업자 김택진 대표. 그의 탁월한 안목이 없었더라면 [리니지]는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동아리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아래아 한글을 개발했다. 하지만 한국 IT산업을 일으켜 보겠다는 원대한 야망을 품고 개발에 참여한 건 아니라고 한다.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컴퓨터를 써보게 하자는 생각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송재경의 MMORPG 개발과 김택진의 아래아 한글 개발은 비슷한 맥락에 있다. 시대를 혁신하고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거창한 포부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이들이 처음 업계에 등장했던 1990년대는 인터넷/IT 혁명이라는 ‘기회’와 IMF라는 ‘위기’가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한쪽은 구조조정 안당하고 살아남기 위해 게임을 만들었고, 한쪽은 컴퓨터에서 한글 좀 쓰게 하려고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했다. 가장 현실적인 이유가 게임업계의 두 거인들을 [리니지]라는 울타리로 모이게 했다.

어쨌든 김택진 대표는 벤처기업 ‘한글과 컴퓨터’에서 ‘아래아 한글’을 완성시켰다. 당시 컴퓨터 학원에서 손가락에 땀나도록 쳤던 ‘한메타자교사’도 김택진 대표의 작품이다. 그는 타이핑 게임 ‘베네치아’를 만들어 컴퓨터의 한글보급에 기여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현대전자에 입사했다. 현대에서 그는 사내 네트워크 시스템 ‘아미넷’을 개발해 조직에서도 인정받았다. 대기업 생활은 탄탄대로를 보장했지만 그는 뛰쳐나왔다. 당시 김택진 대표는 인터넷게임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흠뻑 빠져있었다. 당시 31세인 그는 일류대학 출신의 대기업 사원이라는 명함을 버리고 벤처의 격랑으로 몸을 던졌다. 같은 이력을 지닌 또래의 엘리트들은 그를 비아냥거렸다.

“게임? 그거해서 밥 벌어 먹고 살 수 있겠냐?”

그는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그가 구현하려는 건 게임이 아닌 ‘인터넷속의 즐거움’이다. 그 즐거움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게임을 선택했다. 그러나 벤처기업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처음부터 온라인 게임 개발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엔씨소프트는 게임회사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로 시작했다. 시스템 통합업무와 국방부, SK, 천주교구 홈페이지 제작 등 돈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맡았다. 다른 일을 맡아 할수록 게임 개발의 '꿈'은 멀어져 보였다.


수어지교! 김택진과 송재경의 만남

“그 당시 회사가 개발을 막 시작했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투자자를 찾아봤지만 돈을 줄 사람은 없고, 결국은 [리니지]를 원래 목표대로 개발하지 못할 상황이었죠. 회사가 어렵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집 팔고, 그 돈 빼서 직원들 월급주고, 나중엔 서버 살 돈만 남더라고요.”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


사업을 시작했지만 갈수록 상황은 어려워졌다. 시장을 주도했던 PC게임과는 달리 온라인게임은 아직 비주류였다. 일부 마니아들이나 즐기는 하드코어 장르 정도로 여겨졌다. 그런 온라인게임에 선뜻 주머니를 열겠다는 투자자는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사람이다. MMORPG를 이해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만들어 본 사람은 더더욱 적었다. 이 시설, 김 대표가 밝힌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있는 돈 다 털어 직원들 추석 보너스 주고 나서 집에 들어갔더니 깜깜한 방에 아이 혼자 자고 있더라고요. 만약 일(사업)이 잘못돼서 (감옥에) 들어가면 (나 없는 동안) 부모님이 잘 키워 주시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죠”. 그만큼 당시 상황은 절박했다.

그러던 중 그는 [리니지] 프로젝트를 만났다. [리니지]를 본 김택진 대표는 ‘바로 이거다!’며 무릎을 쳤다. [리니지]야 말로 그가 그리던 가장 이상적인 게임이었다. 아이네트에선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리니지]가 김택진의 눈에는 미래의 가능성으로 보였다. 마침 아이네트에서 [리니지]팀이 퇴출위기에 몰리자,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리니지] 프로젝트를 인수했다. 김택진이 송재경을 영입하는 과정은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량을 맞아들이는 삼고초려와 비슷하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리니지]를 만들어 낸 송재경 대표도 대단하지만,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지극정성으로 받아들인 김택진 대표의 안목도 탁월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만나지 못했다면? 한국 온라인게임은 전성기는 적어도 5년은 늦어졌을 것이다. [리니지]라는 울타리에서 만난 두 사람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열정적으로 게임을 만들었다. 김택진 대표는 아예 집을 은행에 맡기고 그 돈으로 게임개발비를 보탰다. [리니지] 하나에 두 사람의 인생을 걸었다.


게임시장을 바꾼 리니지 ‘쇼크’

"콘솔게임은 만들기 힘들고, PC 패키지게임은 포화상태고, 우리의 경쟁력은 온라인게임 밖에 없었죠. 솔직히 그때는 '리니지'란 게임이 어떻게 나올지 개발자 자신들도 몰랐어요. 일단 만들어서 내놓자. 그런 각오였죠."
-송재경 대표 인터뷰 중


97년, 리니지 프로젝트가 마무리됐다. 직원 모두가 벼랑 끝의 절박한 심정으로 게임을 완성했다. 2년여의 개발 기간과 10개월의 테스트 기간을 거쳐 1998년 9월 첫 상용서비스를 시작했다. 세상에 나온 [리니지]는 개발자 자신들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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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리니지]는 요정, 마법사, 군주, 기사로 시작. 그 후 다크엘프, 용기사, 환술사 등의 다양한 클래스가 추가됐다.>



서비스 2개월 뒤 동시접속자 1000명을 돌파하더니, 1999년 12월 1만 명, 2000년 12월 10만 명, 2001년 12월 30만 명을 넘어섰다. [리니지]는 그야말로 게임업계의 거대한 '쇼크'였다. 단순한 인기를 넘어 하나의 사회현상을 일으켰다. 김택진 대표는 그때의 놀라움을 이렇게 회상했다. "어떤 유저가 회사에 찾아오더니 아이템을 구입하려다 사기를 당했다고 하소연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 그때 우리 게임의 아이템이 현금으로 거래 된다는 걸 처음 알고 놀랐습니다." [리니지] 쇼크는 개발자들도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지루한 레벨노가다 게임으로 저평가된 [리니지]는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더니 온라인상에 거대한 역사를 만들어냈다. 게임은 더 이상 개발자 혼자서 주도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개발자와 유저가 함께 만들어가는, 스스로 진화하는 게임으로 발전했다.


여백의 미를 살린 동양화 같은 게임

“MMORPG는 말 그대로 여럿이 모여서 역할을 수행하는 게임입니다. 단순히 몹 잡고 아이템 먹는 게임이 아니죠. 이용자들이 스스로 콘텐츠를 만들어나가는 게임. 개발자가 만든 콘텐츠 외에 다른 걸 더 많이 할 수 있는 게임, 그것이 MMORPG의 매력이죠.”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리니지]는 여백의 미를 살린 동양화 같은 게임이다. [리니지]는 개발자가 공급한 콘텐츠를 유저가 소비하는 수동적인 플레이방식에서 벗어났다. 게임은 개발자가 만들되 콘텐츠의 방향은 유저 스스로가 결정한다. 유저는 게임 안에서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간다. 어떤 세계가 완성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치 우리의 역사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유저들은 게임 속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경제활동을 하고, 정치행위를 하면서 자신들만의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혈맹을 결성하고, 상대편과 전쟁을 펼치면서 각자 독특한 계급구조를 보여주는데, 이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외국게임에서 찾아보기 힘든 [리니지]만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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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의 미를 살린 동양화 같은 게임. 게임 속 모든 스토리는 유저들이 스스로 결정해 진행할 수 있다.>



서버마다 스토리가 제 각각이다. 죽도록 싸움만 하는 서버도 있고, 전쟁이 없는 서버도 있다. 독재자가 나와 전횡을 펼치는 서버도 있고, 대중들이 힘을 합쳐 독재자를 몰아내는 서버도 있다. 유저들은 상호작용을 통해 각자의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운영자는 유저가 만드는 역사에 개입하지 않고 조력만 할 뿐이다. 수동적 플레이에 길들여진 유저들은 [리니지]의 역동성을 경험하고 열광했다. 이것은 엄청난 파괴력이다. [리니지] 쇼크는 전국에 보급된 PC방 물결을 타고 들불처럼 번졌다.


선택과 집중! [리니지] 장수의 비결
1990년대 말, PC방에서 [리니지]는 스타크래프트, 포트리스와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 당시 스타크래프트의 아성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캐주얼게임 포트리스도 [리니지]에겐 만만치 않는 경쟁자였다. 강력한 라이벌에 맞서 [리니지]가 취한 전략은 ‘선택과 집중’이다. [리니지]는 콘텐츠를 남발하지 않았다. 경쟁자 포트리스가 2편, 3편까지 찍어내는 와중에도, [리니지]는 후속작을 내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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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지]는 드라마 시즌제처럼 각각의 테마로 나누어 에피소드를 추가한다. 에피소드2 ‘하늘과 땅’(좌), 다크엘프가 등장한 에피소드3 ‘삶과 죽음’(우).>



각 에피소드로는 주제별로 나누어 정확히 업데이트했다. 더하거나 덜 하지도 않은 오직 유저가 원하는 만큼만 내놓았다. 파격적인 콘텐츠로 [리니지]의 중흥기를 가져왔던 '바포메트' 업데이트도 결국 유저들의 요구를 정확히 읽었기 때문이다. 2000년 초반, [리니지]는 스타의 아성을 넘볼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코스닥에 상장한 엔씨소프트는 성공한 IT회사로 이름을 알렸다.


온라인게임 세대교체! [리니지2] 시대를 열다

“게임은 공학적으로 만들어지지만 결과물은 지극히 감성적이죠. 온라인 게임 개발의 궁극적 목표는 이용자가 감성적으로 몰입하고 그 속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게 리니지2를 기획한 배경입니다.”
-엔씨소프트 배재현 부사장


한국 온라인게임 역사를 두개로 나누라면, [리니지2] 이전과 이후로 분류 된다. [리니지]가 나왔던 1세대 게임업계는 소위 ‘천재들의 시대’였다. 서울대, 카이스트 출신의 기술과 경영 마인드를 모두 겸비한 1% 천재들이 시장을 이끌었다.

김택진, 김정주, 송재경 같은 인물이 1세대 천재 개발자들로 불린다. 이들은 척박한 온라인게임 시장에서 [바람의 나라], [리니지] 같은 불후의 명작을 만들었다. 한국 게임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세월이 지나, [리니지2]가 나올 때쯤 되서 시장의 흐름은 또 한 번 바뀐다. 더 이상 천재 몇 명에 의존하던 시절은 끝났다. 그러기엔 게임산업의 규모가 너무 커버렸다. 수백억 원의 자본과 수백 명의 개발자가 투입된 거대 프로젝트로 성장했다.

[리니지]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중요한 업무는 김택진, 송재경에게 집중됐다. 엔씨소프트는 미국 진출을 위해 송재경 부사장을 현지로 보냈다.

남은 문제는 국내 사업이었다. 송 부사장이 해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리니지] 후속작 개발 시기는 늦어졌다. 송재경 없는 [리니지]는 상상할 수 없었다. 엔씨소프트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송재경이 아닌 배재현(현재 엔씨소프트 부사장)에게 리니지2 프로젝트를 맡긴 것이다. 당시 배재현 PD는 현대전자 재직 시절 김택진 대표와 만나 함께 엔씨소프트를 세운 창업공신이다. 김 대표는 한 신문사 인터뷰에선 “배재현은 늘 학습하고 노력하는 인재로써 엔씨소프트를 한국 1위의 기술력을 보유한 게임사로 만드는데 공헌했다. 앞으로도 이 회사를 떠받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고 평가했다. 그는 스스로를 ‘노력형’, ‘학습형’ 개발자로 부르며, 항상 배우는 자세로 직원들을 대한다고 한다. 송재경의 품을 벗어난 [리니지2]는 시작부터 파격이었다. 먼저 그래픽을 3D로 바꾸었다. 안전한 2D로 만들자는 내부의 의견도 있었지만 끝까지 밀어붙였다. [리니지]가 3D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에 유저들도 놀랐다. 기대와 우려를 안고 [리니지2]는 그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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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지2]는 클래스가 아닌 종족 개념을 도입했다. 초반엔 오크, 드워프, 인간, 다크엘프, 엘프 종족이 등장한다.>



2000년 12월경 개발에 들어간 [리니지2]는 2002년 동경게임쇼에서 첫 선을 보였다. 현장에서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3D 캐릭터의 화려한 움직임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탄을 자아냈다. 삼차원으로 구현된 대규모 공성전은 'MMORPG 혁명' 그 자체였다. 하지만 주변의 찬사가 높아질수록 엔씨소프트는 내심 초조했다. 3D MMORPG는 처음이라 그만큼 시행착오도 많았다. 수백 명의 3D 캐릭터들이 한 곳에 모여 공성전을 펼친다는 게 기술적으로 가능할까? 그 많은 오프젝트는 어떻게 감당해 낼 수 있을까? 도대체 PC사양이 얼마나 높아야 할까?

[리니지2]부터는 만화 원작의 스토리와 선을 그었다. [리니지] 이전 시대를 배경하지만, 단지 설정일 뿐 게임 안의 스토리 주도권은 유저들에게 온전히 바쳤다. [리니지2]는 블리자드의 [월드오브워크래프트]를 견제하기 위해 오픈 일정을 앞당겼다. 당시 [리니지2]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던 배재현 PD는 이 부분을 아쉬워했다. 그는 “와우의 출시가 그처럼 지연될 줄 알았다면 보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출시를 늦췄을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캐릭터의 점프가 가능하게 하지 못한 점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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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지2]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여자 드워프. 귀엽고 깜찍한 외모로 유저들에게 독특한 재미를 선사했다. [리니지2] 드워프 종족이 선보인 후 테라의 엘린족, 블레이드앤소울의 린 종족 등 한국 온라인게임에서 귀여운 캐릭터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청소년 유해게임과 대통령상, 혁신의 시작!

“서양 사람들이 보면 우리나라 인터넷 문화가 난장판에 가까울지 모르겠지만, 여러 사람이 어울리는 문화가 (한국)게임에서도 마찬가지 코드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 [리니지2]는 자체적으로 시나리오를 제공하지 않는, 사용자들이 시나리오를 만드는 세계를 꿈꾸며 개발한 게임이고, 와우는 시스템적으로 멋진 게임경험을 심어줄 수 있는 쪽으로 발전된 게임이죠”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서울대학 강연 중)


[리니지2]는 개발사의 특권인 스토리텔링마저 유저들에게 맡겼다. 시작부터 모든 것을 놓고 만든 게임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모험이었다. 일각에서는 희대의 실패작이 나올 것이라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2003년 7월, [리니지2]가 오픈했다. 그러나 게임은 오픈하자마자 각종 구설수에 올랐다. PC방 불매운동에 부딪혔고, 폭력성과 선정성을 이유로 청소년불가 판정을 받기도 했다. 아이템을 습득하기 위해 상대 캐릭터를 죽이는 PK 행위를 폭력성으로 지탄받았다.

[리니지2]는 오픈 일 주 만에 동시접속자 5만 5천명을 돌파했다. 예상된 성공가도다. 그 해 12월엔 대한민국 게임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청소년불가라는 '낙인'과 '명예'를 동시에 얻었다. 지금이야 웃어넘길 해프닝이지만, 당시 게임을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시선이 그랬다.

2008년 그레시아 업데이트 때 최대 동접자 15만 명을 돌파했다. [리니지]가 이루지 못했던 해외수출 쪽도 성과가 있었다. [리니지2]는 2011년 1분기 전 세계 해외누적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그러던 중 [리니지2]는 게임업계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전체를 깜짝 놀래킬 사고를 쳤다. 그 역사는 [리니지2] 바츠 서버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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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그레시아 업데이트. [리니지2]는 최대 동시접속자 15만 명을 돌파했다.>



그 해 여름, 바츠서버 혁명으로 불타다

“초기게임 [리니지]가 1대 1 대인전 중심이었다면, 후기 게임인 [리니지2]는 혈맹대 혈맹의 집단전투가 중심이다. 집단과 집단의 관계, 개인과 집단의 관계 등이 복잡하게 전개되어 기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회 현상들을 만들어냈다”
-이화여자대학교 이인화 교수(한국형 디지털스토리텔링 중)


[리니지2]는 지금까지 게임에서 한 번도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서사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 나는 [리니지2] 유저만큼 게임을 열광적으로 즐기는 사람들을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이들은 개발자가 만들어 놓은 밥상을 골라 먹는 대신, 스스로 밥상을 차려 먹었다. 누구는 그것을 ‘디지털 스토리텔링’이라 하고, 누구는 ‘새로운 서사 패러다임’이라고 한다. [리니지2]는 유저들의 '욕망'을 펼칠 최적의 공간이었다. 그들의 욕망이 한곳에 모여 거대한 '디지털 서사'를 만들어냈다.

사실 초창기 [리니지2]는 [리니지]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많았다. [리니지]에서 억압 받았던 피지배 계층들이 마음 놓고 게임할 곳을 찾아 [리니지2]로 대거 이주했다. 게임 초반에는 서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서버 내 권력자에 항거한 '반왕 전쟁'이 3D 그래픽으로 화려하게 펼쳐졌다.

[리니지2]는 오픈 후 ‘축9섭전쟁(9서버)’, ‘방송국혈맹의 멸망(5서버)’, ‘스피드혈과 일심동맹(4서버), ‘올포원 민중봉기(1서버)’ 등 굵직한 전쟁 이야기들을 만들며 주목 받기 시작했다. 유저들은 마치 현실의 역사처럼 게임 속 스토리텔링에 몰입했다. 그리고 2004년 6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바츠서버에서 벌어졌다. 게임 속 피지배 계층들이 서버를 장악한 거대 권력자들을 몰아낸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리니지2]뿐만 아니라 한국 온라인게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줬다. 유저들은 소위 ‘내복단’이라는 시위대를 결성해 거대혈맹의 횡포에 대항했다. 고렙의 공격에 수없이 죽어나가도 끝까지 내복(캐릭터 생성시 기본으로 제공되는 복장)만 걸치고 저항 한다고 해서 ‘내복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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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지] 시리즈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시대였던 바츠 해방전쟁. 게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내복단은 주요지점에 인간 바리케이드를 치고 거대혈맹을 상대로 시위를 계속했다. 당시 바츠서버를 주름잡았던 DK혈맹은 내복단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백기를 들었다. 다른 게임에서 절대 볼 수 없었던 초유의 온라인 시민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바츠 이야기는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됐다. 많은 매체에서 '사이버 세계의 시민혁명'이라 보도했으며, 학자들도 이 사건을 표본 삼아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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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내복단’이란 불리는 민중저항세력이 게임 속 거대 권력에 맞서 투쟁을 벌였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내복단 일원(좌), 시위에 참여하다 쓰러진 캐릭터들(우).>



다른 게임들도 '바츠 전쟁'에서 영감을 얻었다. ‘전쟁’과 ‘전투’를 위주로 한 RVR 콘텐츠가 이후 MMORPG의 필수 콘텐츠가 됐다. 물론 게임 자체의 흥행에도 크게 기여했다. 바츠해방전쟁 이후 [리니지2] 동시접속자는 10만 명을 돌파해 전작을 능가하는 수준에 올랐다. 전쟁은 2004년부터 시작해 2006년까지 진행됐다. 2006년 5월, 전쟁의 주역인 DK 혈맹 총군주 아키러스(캐릭터명)는 혈맹을 자진 해산하면서 길고 긴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현실에도 이어진 리니지 현상
유저의 열정은 게임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현실에서도 끈끈한 커뮤니케이션을 만들어갔다. [리니지]는 유저들 사이에 숫한 미담을 남겼다. 한번은 [리니지2] 사용자의 어머니가 사고로 중화상을 입었다. 집안이 넉넉하지 않아 수천 만 원에 이르는 수술비를 감당하기 힘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혈맹 유저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수술비를 보탰다. 이 중에선 그 사용자와 게임에서 적대관계에 있던 혈맹들도 돈을 모아 보탰다. 그들은 "게임에선 서로 적이지만 현실에서는 같은 게임을 하는 동지"라며 흔쾌히 모금에 참여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던 [리니지2]의 한 부부 유저의 결혼식 이야기도 유명하다. 이들 부부는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반신마비가 되고 사회생활이 어려워지자 남편의 신경치료, 정신건강을 위해 [리니지2]를 접하게 된 것을 계기로 게임 속의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게 됐다. 이들의 어려운 사연을 알게 된 동료 게이머들은 부부를 위한 선물로 사이버 결혼식을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리니지] 현상들을 개발자 자신들도 예측하지 못했다. 2006년 E3게임쇼에서 만난 김택진 대표는 “게임의 구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나조차도 유저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감히 예측하지 못했다”며 “바츠 전쟁을 보면서 마치 게임이 스스로 살아 움직여 꿈틀대는 것 같아 전율을 느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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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지]의 흥미진진한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예술작품에도 영감을 주었다. 작년 경기도 미술관에서 열린 바츠혁명전.>



‘공학적으로 만들어지지만, 결국은 감성적으로 몰입하는 게임’. 배재현 부사장이 애초에 기획했던 의도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2002부터 2004년까지 3년간, 한국 게임시장은 온전히 [리니지2]의 것이었다.


너무나 한국적인 리니지의 ‘그늘’
[리니지]는 그 빛나는 역사만큼 그늘도 많았다. 사실 [리니지] 태생적으로 아이템 현금거래의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게임 안에서 잘나가는 아이템은 현금으로 수 천 만원에 팔려나간다. 지금도 아이템 거래 중계사이트를 보면 [리니지] 아이템 거래가 가장 활발하다. 그러다보니 [리니지] 아이템을 팔아 돈을 벌어보려는 작업장들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했다. 작업장은 게임을 좋아하는 청소년들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리니지] 아이템을 모으고, 이를 시장에 팔았다.

엔씨소프트는 아이템 현금거래를 철저히 금지했다. 유저들의 아이템 현거래 행위가 드러나면 계정 삭제 등의 강경조치로 다스렸다. 거래를 하다 계정을 정지당한 유저들이 회사로 찾아가 항의하는 일이 빈번했다. 심지어 유저들이 회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거나, 집단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처음 아이템 현금거래 문제가 지적됐을 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지 않고 무조건 금지로 일관한 것이 지금과 같은 음성적인 거래시장을 키운 원인이 됐다.

결국 2006년 2월, [리니지]에서 대규모 명의도용 사태가 터지면서 그동안 음지에서 기생했던 작업장과 아이템시장의 실체가 드러났다. 엔씨소프트의 허술한 이용자정보 관리와 음성적 아이템시장에 대한 외면이 불러온 비극이다. 이밖에 게임 과몰입, 온라인게임 현피(게임에서 시비가 붙어 현실에서 만나 실제로 싸우는 사건) 등의 사건이 벌어지면 늘 [리니지]가 언급되기도 했다. 어쩌면 한국사회를 가장 많이 닮은 [리니지]가 짊어질 업보이기도 하다.

[리니지]는 게임개발자의 개발윤리에도 큰 교훈을 남겼다. 2007년 4월, [리니지3]의 핵심소스가 외부 게임사에 유출된 사건이 벌어졌다. [리니지3]는 회사의 모든 역량이 투입된 간판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몇몇 개발자들이 [리니지3] 소스를 해외게임사에 유출시키려다 발각되자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이때 받은 충격과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택진 대표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엔씨소프트가 10년간 달려오며 이룩했던 노력과 기술의 결정체를 다른 곳도 아닌 일본 업체에 넘기려는 움직임 자체가 너무도 끔찍한 일”이라고 당시 심경을 밝혔다. 유출 사건으로 [리니지3] 프로젝트는 잠정 중단됐다.


[리니지]의 제 2의 전성기, 회귀본능이 강한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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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지]는 유저들의 회귀본능이 가장 강한 게임이다. [리니지] 유저는 다른 게임을 하더라도 늘 [리니지]로 돌아온다.>



[리니지]는 요즘 제 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2012년 12월 [리니지]는 동시접속자 22만 명을 돌파했다. PC방 게임순위도 여전히 10위권 안이다. 또래의 게임들은 벌써 무덤 속으로 들어갔는데, 혼자만 젊은 게임 못잖게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준다. 업계에선 [리니지] 장수비결을 여러 각도에서 연구하고 있다.

‘변화와 혁신’, ‘대규모 콘텐츠’, ‘유저중심의 운영’, ‘소통과 커뮤니케이션’, ‘브랜드 파워’ 등 여러 가지 요인을 꼽는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설명하지 못할 지점이 있다. 사실 [리니지]만큼 유저들의 회귀본능이 강한 게임은 드물다. [리니지]를 했던 사람들은 "게임을 접을 수는 있어도 지우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다른 건 다 지워도 [스타크래프트]나 [리니지] 정도는 꼭 PC에 남겨 놓는단다. 언젠가 다시 와서 하겠다는 의미다.

우리나라 온라인게임 1세대 유저들은 대부분 [리니지]로 게임을 시작했다. 온라인게임이란 단어조차 낯선 그 시절, [리니지]는 우리의 정서가 들어간 첫 국산 MMORPG다. 좋든, 싫든 [리니지]에서 온라인게임을 처음 접한 사람들이 대다수다. 말하는 섬에서 PK 당해 분노하고, 첫 공성전에서 승리했던 환희를 사람들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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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운영자들은 유저들과 항상 호흡을 맞춘다. 유저들의 [리니지] 보스 공략성공 축전과 [리니지] 11주년 축전. 올해로 [리니지]는 15주년을 맞는다.>



투박한 그래픽에 노가다는 여전하지만, 그 속에는 함께 즐겼던 사람들과의 추억이 남아있다. 그래서 [리니지]는 사람에 대한 추억이 많은 게임이다. 한 [리니지] 개발자는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포세이든이 게임을 접은 사건을 꼽았다. 포세이든은 [리니지] 최고 레벨의 캐릭터로 게임 내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유저다. 동접자 10만명 달성, 1조원 매출돌파 같은 거창한 성과를 꼽을 줄 알았는데, 한 유저의 탈퇴를 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추억이다. 이런 추억들이 퇴적층처럼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리니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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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포메트 서버를 업데이트하면서 [리니지]는 중흥기를 맞는다.>



※ 이 글은 필자가 게임웹진 <베타게임>기재했던 ‘엔씨소프트 3부작’ 기획을 각색해 올렸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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