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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사춘기를 보낸 남학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동급생2].>



[동급생]을 다룬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필자 또한 이 게임을 어떻게 다룰까 고민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동급생]은 성인게임이다. 국내 정식버전이 들어오기 전, 음성적으로 유포되어 엄청난 인기를 끈 작품이다. 부모님에게는 절대 들켜선 안 될 ‘금단의 게임’으로 지목되어 쉬쉬하면서 플레이하곤 했었다.

이런 게임을 지금 와서 소개하는 게 과연 온당할까? 하지만 단지 성인용이란 이유만으로 잘라버리기에는 [동급생]이란 게임이 가진 가치가 너무 크다. 물론 초기 [동급생]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미모의 여성 캐릭터들을 등장시키고 남성이 이들 여성을 ‘선택’하여 플레이한다는 것 자체가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단순 성적으로 대상화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힘든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제작사는 게임을 점점 발전시키면서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들을 계속해서 보완, 수정했고 바로 그러한 점들이 [동급생]이 여타 다른 무분별한 성인게임과 차별되는 점으로 남아있다. [동급생]은 게임사적으로 의미가 큰 작품임은 분명하다.

우선 [동급생]은 연애시뮬레이션 장르의 기틀을 잡은 게임이다. 상업성과 작품성을 두루 갖춘 웰메이드 게임으로 그동안 막장게임으로 불리던 일본 성인게임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특히 한국에서 [동급생]은 음지의 국민게임이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게임 속 달콤한 연애에 대한 판타지는 당시 엄마 몰래 숨겨 놓고 즐겼던 비밀스런 추억이다. 동급생은 90년대 사춘기를 보낸 이 시대 청춘들의 상상력을 유쾌한 시선으로 담아낸 한편의 ‘판타지게임’이다.


연애시뮬레이션 장르의 탄생
[동급생]을 이야기하기 전, 90년대 초반 일본의 일명 ‘미소녀 캐릭터 게임’ 시장부터 짚어보는 게 순서일 듯싶다. 90년대 초, 일본게임시장에서는 미소녀 캐릭터 게임이라 불리는 19세 성인게임들이 성장했다. 80년대 일본애니메이션 산업의 발전으로 만화 속 예쁜 미소녀 캐릭터들이 게임에도 등장한 것이다. 이들 성인 미소녀 캐릭터 게임은 게임사들에게 짭짤한 수익원이 됐다.

닌텐도나 세가 같은 메이저급 회사들은 자사 콘솔기로 절대 성인게임을 출시하지 않았다. 성인게임의 범람으로 ‘아타리 쇼크’가 오고, 결국 미국시장이 무너진 것을 생생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주로 소규모 회사들이 PC용 소프트웨어로 성인게임을 제작하였는데, 적은 개발비용에 상대적으로 많은 매출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코에이, 에닉스, 팔콤 같은 유명 게임사들도 초창기 돈 없고 배고픈 시절 성인게임을 만들어 연명한 적도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 미소녀 캐릭터 게임은 하나의 장르로 정착하며 일본 게임시장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데, 사실 현재도 일본 PC게임의 70% 이상이 성인물 시장일 정도로 일본의 18금 성인게임의 영역은 막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내용보다는 자극적 설정에만 치우친 미소녀 캐릭터 게임은 시장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또한 이들 게임들의 선정성이 사회문제로 부각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차츰 스토리를 가미한 미소녀 캐릭터 게임이 나오기 시작했다. 1990년대 접어들어 PC기술의 발전과 함께 이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게임이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가이낙스사의 [프린세스 메이커](1991)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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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게임은 아니지만 90년대 일본 미소녀게임 시장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프린세스메이커], 당시 한국 게임시장의 양지에선 [프린세스메이커]라면, 음지에선 [동급생]이었다.>



[프린세스메이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게임대백과 [프린세스메이커] 편을 참조하도록 하고, 여기서는 이후 미소녀 캐릭터 게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짚고 넘어가겠다. [프린세스메이커]가 일본 게임시장에서 큰 흥행을 거두면서, 미소녀를 주 콘텐츠로 삼고 있던 성인 게임시장에도 변화가 왔다. 게임에 스토리를 가미하거나 RPG나 시뮬레이션 장르를 도입하는 등 나름 게임성을 갖춘 게임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프린세스메이커] 다음으로 미소녀 캐릭터 게임의 가능성을 열어준 게임이 바로 [동급생]이다. [동급생]은 각 히로인마다 외모와 성격을 부여하고 애틋한 연애 이야기를 가미하면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게임을 만들어냈다. 90년대 수많은 남성 게이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연애시뮬레이션의 장르의 문을 연 것이다.


캐릭터의 품격! 그림 하나로 게임을 바꾸다

“[동급생]은 [드래곤나이트]와 함께 엘프사를 떠치고 있는 연애시뮬레이션의 대표작이다. 일본 어드벤처 전통의 유머와 뛰어난 캐릭터 그래픽이 어우러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야한 게임의 대명사 정도로 취급받고 있지만, 연애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게임평론가 박상우 ([게임, 세계를 혁명하는 힘] 중에서)


[동급생]은 1992년 12월 17일 발매된 일본 엘프(elf)사의 연애 어드벤처게임이다. 후속작인 [동급생2]는 1995년 1월 31일 출시되었다. 처음에는 도스용으로 출시되었으며, 이후 PC엔진, 세가 새턴, 윈도우 등의 다양한 플랫폼으로 이식되었다. 콘솔용 버전에는 선정적인 장면을 순화시켜 청소년 이용가로 출시됐다. 물론 청소년 버전으로 플레이해도 게임의 재미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일본 성인게임 회사인 엘프가 [동급생]을 제작해 성공을 거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미 엘프는 [드래곤나이트] 시리즈를 통해 RPG와 성인게임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드래곤나이트]는 RPG로써의 작품성도 높이 평가를 받았다. [드래곤나이트]를 성공시킨 엘프는 게임제작에 자신감이 붙었다. 사회의 멸시를 받는 막장게임이 아닌, 작품성과 흥행성을 두루 갖춘 당당한 성인용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엘프는 성인게임 개발사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러던 중 걸출한 일러스트레이터 한 명이 들어와 엘프사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가 바로 [동급생]을 만들어 연애시뮬레이션 장르의 격변을 몰고 온 ‘타케이 마사키’다. 그는 본래 애니메이션 작가로 이름을 떨쳤다. [로도스도 전기] 등 굵직한 애니메이션에 참여했던 ‘타케이 마사키’는 게임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발견하고 애니메이션계를 떠나 게임사에 몸을 담았다. 이것은 당시만 해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8,90년대는 일본애니메이션 산업의 절정기였다. 90년대 판타지 애니메이션 최고의 흥행작 [로도스도 전기]는 일본 애니메이터들의 꿈의 무대였다. 이런 최고의 흥행작을 뒤로하고 같은 분야도 아닌, 비주류에 불과한 미소녀게임 분야에 도전한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큰 모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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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원화가 타케이 마사키가 참여한 애니메이션 [로도스전기](왼쪽)과 그의 첫 작품이나 연애육성시뮬레이션의 원조로 통하는 [졸업](오른쪽).>



그는 일본 NEC사의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인 [졸업](1992)의 제작에 참여했다. 졸업 역시 [프린세스 메이커]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게임으로, 개성이 뚜렷한 다섯 명의 제자를 지도해 내는 과정을 다룬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타케이 마사키는 졸업의 제작 과정에서 각자의 특징이 뚜렷한 캐릭터의 원화를 맡았다. 이때의 경험이 [동급생]의 제작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동급생]과 [졸업]은 캐릭터의 의상이나 배경그림 등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동급생] 역시 초반에는 단순 헌팅 게임으로 기획됐었다. 그러나 ‘타케이 마사키’가 제작에 참여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가 그린 캐릭터는 내용도 없는 싸구려 게임에 담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그의 그림은 품격이 있었다. 엘프사 개발자들은 ‘타케이 마사키’가 그린 캐릭터에 맞춰 게임을 기획했다. 캐릭터 원화에 개성 있는 성격을 부여하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여기에 각자의 연애 이야기가 결합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동급생]이 만들어졌다. 그림 하나가 게임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이다.


연애, 결과보다 과정에 충실한 게임
[동급생]은 남녀간의 연애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은 게임이다. 게임 방식은 단순하다. 고등학생인 남자 주인공을 조작해 게임 내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와 연애를 하는 내용이다. [동급생]과 [동급생2] 모두 기본 게임 내용은 동일하다. 학원 3학년(고등학생)인 남자 주인공을 조작해 방학 기간([동급생]은 여름방학, [동급생2]는 겨울방학) 동안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여성들을 만나며 이벤트를 진행하고 그녀들의 호감을 얻으며 엔딩을 보는 방식이다. 설명만 들으면 일반 연애게임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 플레이 해보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동급생]은 연애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연애에 대한 여러 가지 사례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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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뮬레이션 장르의 초석을 놓은 [동급생]. 한국과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마음에 드는 여성 캐릭터의 호감을 사려면 그야말로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부지런함과 꼼꼼함은 연애게임의 최대 덕목이다.

요즘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나쁜남자’ 스타일은 게임에서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주인공은 여성들의 취향에 따라 날짜와 시간을 고려해 계획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예를 들어 데이트 약속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좋아하는 여성의 호감을 살수 없다. 게임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나름의 성격과 개성, 그리고 주인공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 사랑을 향한 유저의 노력은 오직 여성 캐릭터의 호감도 수치에 달려있다. 간혹 마음에 드는 여자 캐릭터가 얼굴을 붉히며 데이트 신청을 한다면, 이미 그녀는 주인공에게 반쯤 넘어온 상태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데이트 시간에 늦거나 데이트 중 실수를 하게 된다면 차갑게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게임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제각각 남모를 고민을 안고 있다.

여성캐릭터의 고민을 들어주고, 또 어떤 말로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세심한 배려도 연애에 성공하기 위한 필수과정이다. [동급생]에서 시간은 금이고, 메모는 필수다. 게임 속 여성들의 취향, 개성, 성격 등을 파악하고 약속장소, 좋아하는 선물, 적당한 데이트 장소 등을 꼼꼼히 파악해 적어놓아야 한다. 약속시간을 따로 적어두고 그 시간에 맞춰 데이트코스의 동선을 짜야한다. 유저는 여성의 성격과 취향을 고려해 대화를 리드해 가되, 특정 조건들을 모두 맞추지 않으면 해피 엔딩을 볼 수 없다.

부지런함과 꼼꼼함, 그리고 세심한 배려가 여성의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이다. 가끔 주인공의 라이벌이 등장해 연애전선에 훼방을 놓기도 하는데, 이들을 퇴치하고 그녀를 확실히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물론 경쟁자가 있으면 조력자도 있기 마련이다. 이처럼 유저는 다양한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랑하는 여성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은근과 끈기의 기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벤트는 1인칭 시점으로 화면이 묘사되며, 고전 어드벤처와 동일한 스타일로 화면에 있는 사물이나 인물을 클릭하면 설명을 보거나 대화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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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RPG처럼 마을을 돌아다니면 이벤트를 볼 수 있다. 여성과의 데이트 시간은 절대적으로 엄수해야 한다.>



연애시뮬레이션의 황금기를 맞다
[동급생]은 90년대 일본 성인게임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여성 캐릭터를 단순히 성적 대상으로 전락시켰던 기존의 성인게임의 도식을 탈피하고 동등한 주체로서의 남녀 연애사를 그렸다. 제작사인 엘프가 [동급생]을 히트시킨 후 일본 게임시장에서 한동안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에서도 [동급생]은 일본의 미소녀 캐릭터와 관련된 문화를 보급시킨 주역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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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하다 보면 주인공의 연애전선을 방해하는 라이벌들이 등장하곤 한다.>



이어 발매된 [동급생2]에는 더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며, 개성도 더욱 다양해졌다. 2편에선 여러 명의 여성을 동시에 만나는 문어발식 연애방식은 통하지 않으며 오직 한 두 명만 선택해 그녀의 호감을 얻어야 한다. 엘프는 이처럼 게임방식을 보다 보수적으로 바꾸었다. 여기저기 여성들을 집적거리고 다니는 바람둥이 스타일은 결코 좋은 엔딩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2편에선 스토리의 밀도가 더욱 깊어졌다. 캐릭터들의 세세한 감정곡선을 살렸고, 가슴 뭉클한 감동적인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비련의 여주인공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사쿠라코의 슬픈 사랑이야기는 플레이어의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감동적이다. 순정만화처럼 감수성을 자극하는 이야기는 여성 유저들에게 특히 인기였다.

[동급생]의 성공은 일본 미소녀 캐릭터 게임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단순히 선정적인 캐릭터만 내세웠던 미소녀 캐릭터 게임에서, 이제는 ‘이야기’가 점차 부각되기 시작했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학창시절에 짝사랑이든 풋사랑이든 가슴 설렌 첫사랑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동급생]은 이 점을 정확히 노렸고, ‘청춘이 끝나기 전에 해보는 연애 이야기’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히트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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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시리즈 중 가장 감동적인 스토리를 보여주는 사쿠라코편. 소설 ‘마지막 잎새’가 연상되는 이야기.>



[동급생]은 성인 게임으로서는 드물게 1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지금도 일본 미소녀 캐릭터 게임시장에서 1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게임이 드문데, 하물며 1990년대 중반의 PC 게임 시장에서 10만장 이상의 판매고는 장르를 떠나서라도 정말 엄청난 성공이다. [동급생]의 대성공으로 엘프는 그저 그런 성인게임 회사에서 시장을 선도하는 메이저급 개발사로 거듭나게 됐다.

[동급생]의 성공 이후 일본 성인 게임시장은 말 그대로 춘추전국시대를 맞게 된다. 아름다운 원화, 독특한 개성의 캐릭터, 색다른 이야기 등 미소녀 캐릭터 게임의 수준이 일취월장하게 한 계기를 마련했다. 특히 [동급생]이 개척한 연애시뮬레이션 장르는 이후 게임시장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동급생]의 게임성은 코나미의 [도키메키 메모리얼]로 이어지면서 연애시뮬레이션 장르의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코나미는 1994년 [도키메키 메모리얼]의 흥행으로 굴지의 게임 기업으로 거듭났다. [도키메키 메모리얼] 역시 ‘학창시절의 연애 이야기’를 테마로, 다양한 캐릭터와의 사랑 이야기를 내세우고 있다. 선정적인 장면 없이 순수하게 연애게임의 재미만으로 당시 남성 유저들의 밤잠을 빼앗았다. [도키메키 메모리얼]은 한국 유저들에게 ‘건전한 동급생’으로 통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게임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 한 명 한 명이 연예인급의 인기를 얻을 정도였다. 일본에서 [동급생] 열풍은 바다 건너 한국을 강타했다. [캠퍼스 러브스토리], [나의 신부], [스커드잼] 등 국산 연애시뮬레이션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었다.


한국을 강타한 [동급생] 열풍, 음지의 ‘국민게임’
한국에서 [동급생] 열풍은 일본보다 뒤늦은 1990년대 중반에 불기 시작했다. 일본어 출력 등의 문제로 일본이 독자 포맷의 PC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도 큰 이유였지만, 사실은 1990년대 중반에 비공식 한글패치가 나왔고 이것이 PC통신을 통해 확산된 것이 본격적인 열풍의 계기였다.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동급생]의 엄청난 마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은 사회적으로는 아직 일본 대중문화를 금기시하던 시절이었다.

쉬쉬하면서 몰래 일본게임을 돌려보던 엄혹한 시기였지만, [동급생] 열풍은 PC통신을 중심으로 유저들에게 확산됐다. 당시 남학생 중에는 [울티마]나 [문명]은 몰라도 [동급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비슷한 시기 만트라를 통해 한글화 된 [프린세스메이커]가 들어오면서, 두 게임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좀 과장해 말한다면 한국 게임시장의 양지에 [프린세스메이커]가 있다면, 음지에는 [동급생]이 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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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신드롬 이후 일본 코나미가 만들어 히트 친 [도키메키 메모리얼](왼쪽)과 마찬가지로 한국 개발사가 만들어 인기를 끌었던 국산 연애시뮬레이션 [캠퍼스 러브스토리](오른쪽)>



비록 불법복사를 통해 유통됐던 게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급생]은 한국에 연애시뮬레이션 장르를 알리는 계기가 된다. [동급생]의 존재도 PC통신 게시판을 통해 어느 정도는 알려져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미소녀 캐릭터 게임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동급생]의 비공식 한글패치가 돌기 시작한 이후라 봐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동급생] 이후 몇몇의 일본의 미소녀 캐릭터 게임들이 국내에 유통되었으나 모두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이후 일본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개방되면서부터는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들어오게 된다.


몰락의 길을 걷다
한국과 일본에서 [동급생]의 영향력은 엄청나지만, 정작 [동급생]을 만든 엘프는 그리 순탄한 길을 걷진 못했다. [동급생] 이후 [동급생2]와 [유작] 등 다수의 성인게임을 내놓으며 성공을 거두었지만, 주요 스탭들이 회사를 빠져나가면서 차츰 쇠퇴해갔다. [동급생]을 만든 타케이 마사키 역시 엘프를 나간 후 썩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고, 결국 애니메이션 원화가로 복귀했다.

일본 미소녀 캐릭터 게임시장도 [동급생] 이후 20년 동안 거의 답보상태다. 오히려 [동급생]에서 정점을 친 후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는 추세다. 물론 1990년대 후반의 리프(Leaf)의 [투하트] 등 비주얼 노벨 시리즈가 인기를 얻는 등 스토리기반의 미소녀 캐릭터 게임은 여전히 일본게임시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숱한 히트작에도 불구하고 정작 게임성은 나아지지 않고 자극적인 장면에만 치우친 작품들을 쏟아낸 결과 미소녀 캐릭터 게임은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제 성인게임 판매순위 상위권에 드는 게임들은 그림과 글자, 음악만으로 이루어진 비주얼 노벨 계열의 게임이 대부분이다. 게임성 보다는 캐릭터만으로 승부를 내는 것이 일본 성인 게임업계의 공식처럼 되어 버렸다. 캐릭터나 스토리 면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게임이라는 면에서는 오히려 퇴보했다고나 할까. 마을을 돌아다니고, 돈을 벌고, 히로인들의 스케쥴에 맞춰야 했던 [동급생]의 ‘어드벤처’ 방식은 과거의 유산이 된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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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엔딩 중 한 장면>



연애는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성향 게임 등장!
[동급생]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일본과 한국에서 연애시뮬레이션은 최고의 흥행장르로 떠올랐다. 그런데 연애시뮬레이션은 너무 남성위주의 게임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성은 소외되는 경향이 있었다. 대부분 연애게임 속 주인공은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고, 남성의 심리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남성위주의 게임성에 반기를 든 ‘여성향 게임’도 등장했다. ‘여성향 게임’은 여성의 입장에서 본 연애시뮬레이션이다.

1994년 코에이에서 개발한 슈퍼패미컴용 게임 [안젤리크] 시리즈는 대표적인 여성 중심의 연애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주인공은 여성이다. 게임 속 각양각색의 개성을 남성캐릭터들과 사귀면서 이야기를 진행해 가는 게임이다. [안젤리크]는 [동급생] 같은 남성용 연애게임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여성의 입장에서 비춰진 이상적인 남성과의 연애감정을 마치 순정만화처럼 세심하게 다루었다. 코나미의 대표적인 연애시뮬레이션 [도키메키 메모리얼]의 여성버전인 [도키메키 메모리얼 걸 사이드]도 나왔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여주인공이 연애와 학업 모두 충실히 하여 왕자님과 사귄다는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스토리다. [도키메키 메모리얼]의 시스템을 거의 그대로 이어 받았고, 다른 점은 여성의 취향이 반영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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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연애관을 담은 게임도 나왔다. 게임판 '미녀는 괴로워' [러브레보](왼쪽), 여성향게임의 원조 [안젤리크](오른쪽)>



또 하나의 여성향 게임 [소녀적 연애혁명, 러브 레보]은 여성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한 영리한 게임이다. 이 게임은 영화 ‘미녀는 괴로워’의 게임판 정도로 보면 된다. 살찐 여주인공이 멋진 남성을 사귀기 위해 다이어트를 소재로 한 게임이다. 1년의 기간 동안 다이어트와 연애을 병행하되, 둘 중 하나라도 실패하면 좋은 엔딩을 볼 수 없다. 살 빼면 남자들의 호감도가 상승하고, 다이어트에 실패하면 멋진 남자와의 인연도 끝이다. 한편으로 [러브레보]는 우리 시대의 외모지상주의를 꼬집은 풍자성 강한 게임이기도 하다. 이밖에 [러브2 파르페], [어이쿠 왕자님] 같은 국산 여성향 게임도 발매됐다.


연애를 잃어버린 청춘들에게
요즘 한국과 일본의 젊은 세대를 가리켜 ‘삼포세대’라고 부른다. 치솟는 물가, 등록금 인상, 취업난 등 경제적 이유로 인해 연애, 결혼, 출산 이 3가지를 포기한 젊은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연애할 권리마저 거세당해 버린 이 시대 청춘들의 쓸쓸한 자화상이다. 하지만 경제적 이유가 우리의 사랑할 권리마저 좌우할 수 있을까. 게임 [동급생]은 이런 삼포세대들을 향해 “연애의 필요충분조건은 경제력이나 스펙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게임 속 주인공은 잘나지 않았다. 다른 게임의 주인공처럼 잘빠진 근육질에 천재적인 두뇌, 부와 명예로 여성들을 유혹하는 그런 잘난 인간이 아니다. 그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하숙생에 불과하다. 처음에 여성들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운동부 주장이나, 부잣집 아들 같은 잘난 라이벌들에 비해 내세울게 없다.

그렇다면 변변찮은 주인공이 어떻게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동급생]의 연애조건에선 돈과 스펙이 전부가 아니다. 여성 캐릭터들이 느끼는 고민이 무엇인지, 그런 아픔을 어떻게 위로해 줄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게이머들의 연애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동급생]의 묘미다. 결국 그녀들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주인공의 화려한 스펙도, 경제적인 조건도 아닌 진심과 열정이다. 어쩌면 우리는 경제적 이유라는 핑계를 대고 청춘의 권리인 연애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동급생]은 잃어버린 우리시대의 연애에 대한 열정을 각성시키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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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엔딩 장면. 방학을 보내고 학교를 졸업하면 어떠한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희비가 엇갈리는 화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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