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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게이머들에게 RPG의 추억을 남겨준 [이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게임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RPG는 한국게임의 젖줄이다. 한국 패키지게임은 RPG로 시작했고, 온라인게임의 기틀도 RPG에서 세워졌다. 그 많은 RPG 명작 중에 한국인이 가장 기억하는 게임은 무엇일까. [파이널판타지], [드래곤퀘스트], [울티마], [위저드리] 등 수많은 명작들이 나왔지만,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끈 작품은 [이스]와 [영웅전설]이다. 일본 게임사 팔콤에서 만든 이 게임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RPG의 재미를 선물했다.

두 게임은 유독 한국유저들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당시 잘나간다는 명작들은 유행가 가사처럼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타이틀들이 많았다. RPG의 전설로 통하는 파이널판타지 시리즈도 비싼 게임기를 구입해야만 플레이 할 수 있었다. 나왔다 하면 대박을 치는 [드래곤퀘스트]도 한국 유저에게는 일본어로 된 마니아 게임일 뿐이었다. 이럴 때 부담 없이 RPG의 매력을 만끽 할 수 있게 해준 타이틀이 [이스]와 [영웅전설]이다.

[이스]와 [영웅전설]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대중적인 게임이었다. 한국 유저들은 두 게임을 통해 RPG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켰다. 그 안에는 역대 최고의 청순가련 히로인 ‘리리아’와 빨강머리 전사 ‘아돌’, 하얀마녀, 바다의 함가, JDK의 주옥같은 음악까지… 수많은 추억들을 담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게임이었던 일본 RPG [이스]와 [영웅전설]의 추억을 회상해 보자.


컴퓨터 대리점으로 시작해 RPG 메이커로
[이스]와 [영웅전설] 개발사 팔콤은 초창기 일본 PC게임을 이끌어온 회사다. 1981년 팔콤은 처음 창립 당시 애플 컴퓨터 대리점으로 시작했다. 80년대 초반에는 IBM 컴퓨터보다 애플컴퓨터가 더 많이 보급되던 시절이었다. 미국에서 건너온 애플 컴퓨터는 다양한 게임들을 선보이며 일본 전체에 보급됐다. 팔콤은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우주선 ‘밀레니엄 팰콘’의 이름을 따서 창립한 회사로 PC게임을 주로 만들었다. 초창기에는 돈을 벌기 위해 마작게임이나 18금 성인용 게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특히 [여대생 프라이빗] 같은 모호한 제목의 성인게임을 만들 만큼 초기에는 정체성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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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용 RPG로 40만장 이상 판매된 [바람의 전설 제나두], 팔콤은 이 작품을 시작으로 RPG 메이커로써의 입지를 다졌다.>



팔콤은 1984년 영웅전설 시리즈의 전신인 [드래곤 슬레이어]를 내놓아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다 1985년 액션RPG [제나두]가 성공하면서 RPG 메이커로써의 입지를 굳혔다. [제나두]는 당시 PC게임으로는 경이로운 기록인 40만 카피를 판매하며 팔콤의 출세작으로 명성을 떨쳤다. PC게임시장이 발달한 미국과는 달리 80년대 일본은 닌텐도의 콘솔게임이 주도하는 시장이었다. [파이널판타지], [드래곤퀘스트] 같은 작품들도 콘솔용으로 나와 100만장 이상의 히트를 쳤다.

PC게임은 콘솔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 변두리 시장이었다. 당시 일본 PC게임은 단순 액션, 혹은 조악한 성인용 게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시장에서 [제나두]의 40만장 판매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성과였다. 그만큼 PC게임 유저들은 제대로 된 RPG에 목말라 했다. 팔콤은 RPG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들은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RPG를 만들었다. 그리고 1987년 팔콤은 액션 RPG게임 [이스]를 내놓으면서 확고한 RPG명가로써 첫발을 내디뎠다.


청순가련의 상징 리리아, 충격의 첫 등장씬
[이스]는 1987년 1편이 발매된 후 지금까지 총 8편의 시리즈가 나와 있다(이외에 각종 리메이크 버전까지 합치면 시리즈 수만 20개 가까이 된다). 1편부터 5편까지 2D버전이라면, 2000년 이후에 발매된 6편부터 8편까지는 3D그래픽으로 표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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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 시리즈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이스2] 오프닝. 여주인공 리리아는 청순가련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이스] 시리즈를 명작의 반열에 올린 타이틀은 단연 1988년에 나온 [이스2]다. 특히 청순가련의 상징으로 통하는 ‘리리아’의 첫 등장 신은 당시 남성 게이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뮤직비디오를 연상케 하는 어쿠스틱 기타의 강렬한 음악과 함께 여주인공이 화면 쪽을 향해 뒤돌아보는 장면은 시리즈 최고의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이스]하면 2편의 오프닝 장면을 떠올리는 유저가 많다.

사실 리리아의 첫 등장신은 겨우 4~5장의 그림을 연결한 연속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됐다고 한다. 1편과 2편은 ‘사라진 고대왕국’이란 부재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시리즈다. 주인공 아돌이 에스테리아 섬을 구하고 이스의 책 6권을 모아 천공의 신전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내용을 담았다. 1편과 2편은 [이스 이터널] 시리즈로 리메이크되어 또 한 번 인기를 끌었다(이때부터 팔콤의 시리즈 우려먹기 버릇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89년 발매된 [이스3: 이스로부터의 방랑자]는 혁신적인 변화를 택했다. 필드형 RPG인 전작과는 달리 횡스크롤 RPG라는 획기적인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횡스크롤은 [슈퍼마리오], [마계촌] 같은 액션게임에서나 쓰이는 방식이었다. RPG의 특성상 맵이 방대하다보니 협소한 시점의 횡스크롤 방식은 어울리지 않았다. 게임이 너무 달라져서 유저들은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유저들은 2편의 여운을 3편에서 채우고 싶었는데, 게임이 너무 달라져 버리니 이질감만 커졌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내용도 전작과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주인공 아돌이 친구 도기의 고향에서 우연히 겪게 되는 모험을 다루었다. 지금도 이스 팬들은 3편을 일종의 외전격 타이틀로 치부한다. 3편의 실패로 이스 시리즈는 한동안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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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 시리즈 최고의 작품 [이스2]. 사진은 리메이크 버전인 [이스2 이터널].>



4년 뒤 팔콤은 [이스4]를 내놓았다. 1993년 발매된 [이스4: 태양의 가면]은 콘솔 플랫폼인 ‘PC엔진’과 ‘슈퍼패미콤’으로 발매됐다. [이스]가 인기를 얻은 만큼 주류 시장인 콘솔로 발매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PC용을 기대했던 팬들은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게임은 2편의 정통성을 이었다. 700년 전 천공으로 올라갔던 이스가 지상으로 내려온 지 2년이 지나고, 에스테리아에 돌아온 ‘아돌’과 ‘도기’는 신의 계시를 받고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내용이다. [이스4]는 3편의 횡스크롤 방식을 버리고 다시 필드형 RPG로 돌아왔다.

1995년에 출시된 [이스5: 잃어버린 모래도시 케핀]는 슈퍼패미콤 전용으로 나왔다. 이스 시리즈의 전매특허인 몸통박치기 방식의 전투가 사라지고, 공격과 점프 등의 모션이 추가됐다. 주인공 아돌이 잃어버린 도시 캐핀을 찾아 떠나는 모험을 다뤘다. 그래픽이나 게임시스템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플레이 타임이 너무 짧아 아쉬움을 주었다(시작한지 4~5시간이면 엔딩을 볼 수 있었다). 또, 게임의 난이도가 너무 낮아 기존 시리즈를 즐겼던 유저들에게는 싱거운 감이 있었다. 나중에 팔콤은 난이도를 상향 조절한 [이스5 익스퍼트]를 따로 내놓았으나 좋은 반응을 얻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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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스크롤 방식으로 나온 [이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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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솔 전용으로 나온 [이스4].>



이렇게 해서 전반기 이스 시리즈는 5편까지 나왔다. 5편의 실패로 유저들은 이스 시리즈는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팔콤은 이스의 리메이크 판들을 발매하면서 명맥을 이었다. 이 중에 국내개발사 만트라가 리메이크한 [이스2: 스페셜]도 나왔지만, 아쉽게도 정식 시리즈에 포함되지 못할 만큼 결함이 많았다. 엔딩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버그가 많아서 초창기 한국 게임의 기술적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스 시리즈는 1편과 2편만 팔콤이 만들고, 3편부터는 허드슨 등 다른 개발사들이 만들었다. 때문에 우리에게 알려진 ‘이스’는 1,2편 정도이고 3편부터는 국내 유저의 기억에 크게 남지 않는 작품들이다. 8년 후 등장하는 [이스 6]부터 팔콤이 다시 개발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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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이스3] 패키지, 아돌이 저렇게 생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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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발사 만트라가 제작한 [이스2 스페셜].>



3D 옷을 갈아입다, 후반기 이스 시리즈
2003년 ‘이스’가 다시 한 번 수면위로 등장했다. 시리즈 최신작 [이스6: 나피쉬팀의 방주]가 8년의 기나긴 잠을 깨고 출시된 것이다. 6편의 가장 큰 변화는 뭐니 뭐니 해도 그래픽이다. 배경을 모두 3D로 표현해 섬세하고 화려한 화면을 연출했다. 특히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광선, 지표면에 비치는 구름의 그림자, 해변에 출렁거리는 파도 등 세세한 묘사에 충실했다. 전투 또한 다양한 액션을 추가해 박진감 넘치고 입체적인 전투를 펼칠 수 있다. 전작의 주인공 ‘아돌’과 ‘도기’만 그대로 나오고, 다른 등장인물은 모두 교체됐다(리리아가 안 나오는 게 팬들에게 큰 아쉬움). 게임의 배경도 완전히 바뀌어서 전작을 하지 않은 유저들도 큰 부담 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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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이스2 나피쉬팀의 방주]. 이스 시리즈의 부활을 알렸다.>



2006년 발매된 [이스 오리진]은 시리즈의 프리퀄 개념의 타이틀이다. 주인공 아돌이 살던 시대의 700년 전, 고대 이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하며 게임의 배경도 ‘다암의 탑’으로 한정됐다. [이스 오리진]은 이스 시리즈의 세계관을 완전히 정립했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 이전 시대를 다루면서 지금껏 풀리지 않았던 사건의 연관관계들이 하나 둘 매듭지어진다. 시리즈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오리진’부터 플레이하는 것이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전반적으로 스토리를 보강하는 수준이라 게임의 시스템은 [이스6]와 비슷하다.

2009년, 팔콤은 정식 시리즈 [이스7]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휴대용게임기(PS Vita) 전용으로 발매됐다. 7편은 아돌의 3대 모험(잊혀진 고대 왕국, 셀세타의 수해, 알타고의 오대룡) 중 유일하게 남은 ‘알타고의 오대룡’을 배경으로 했다. 때문에 시리즈의 정통성을 이은 굵직한 타이틀로 발매 전부터 기대를 모았다. 시리즈 최초로 파티플레이가 적용됐고 다양한 공격패턴이 추가되는 등 여러 가지 변화를 주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스의 친정격인 PC용으로 나오지 않아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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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최신작 이스7. 국내에선 정식 발매되지 않았다.>



친절한 롤플레잉(RPG)을 추구하는 이스 시리즈
이스 시리즈는 개발 당시 ‘친절한’ 롤플레잉을 모토로 만들어졌다. 어려운 철학적 내용이나 복잡한 시스템 대신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인 점이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이다. 당시 턴방식으로 진행됐던 정통 롤플레잉과는 다르게 실시간 액션을 도입해 전투를 더욱 쉽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캐릭터를 몬스터에 갖다 대면 자동으로 전투를 하는 ‘몸통박치기’ 방식을 처음 선보였다. 복잡한 세계관이나 철학적인 내용을 배제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스토리를 완성했다. 캐릭터 설정도 단순하고 게임 중 등장하는 퍼즐 또한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다.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 없이, 담백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이다.


전설의 RPG, 영웅전설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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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전설1&2. 전형적인 영웅의 모험담을 다루었다.>



[이스]와 함께 팔콤의 대표작으로 통하는 [영웅전설] 시리즈는 지금까지 총 8편이 나왔다. 사실 [영웅전설]의 모태는 팔콤의 초창기 작품인 [드래곤 슬레이어]였는데, 이 게임이 인기를 끌자 [영웅전설]이란 새로운 시리즈로 다시 나왔다. [영웅전설]은 크게 3개의 시리즈로 나눠진다. 첫 번째 드래곤 슬레이어 영웅전설(1, 2편), 두 번째 영웅전설 가가브 트릴로지(3, 4, 5편), 셋째 영웅전설 궤적 시리즈로 나눠져 있다. 각 시리즈마다 등장인물이나 배경이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시리즈인 [드래곤 슬레이어]편은 국내에서도 한글화 되어 출시됐다. 게임은 이셀하사라는 가상의 대륙을 배경으로 왕국의 왕자 세리오스가 악마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구한다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스토리다. 2편은 ‘세리오스’의 아들 ‘아틀라스’의 모험을 다루었다. 1편과 2편으로 구성된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는 크게 성공하진 못했지만, ‘영웅전설’의 시작을 알렸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타이틀이다. 이후 3, 4, 5편으로 구성된 ‘가가브 트릴로지’에서 본격적인 [영웅전설]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잔잔한 감동과 깊이 있는 스토리, 가가브 트릴로지

“그리고 하얀 마녀의 전설이 있다. 마녀가 지나간 길을 따라가며 그녀의 슬픔과 좌절을 느낀다. 툭하면 쥬리오를 윽박지르는 말괄량이 소녀와 길도 제대로 못 찾는 울보 소년이 어른이 돼 간다. 때론 세계를 파멸시키려는 악당에 맞서 세상을 구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 게임의 주제는 아이들의 눈으로 본 세상, 즉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 게임 평론가 박상우(<동아일보> 칼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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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전설] 시리즈의 대표작, ‘하얀마녀’. 마녀라 불리는 한 여성의 희생을 다룬 감성적 스토리로 인기를 끌었다.>



‘가가브 트릴로지’는 3편 ‘하얀마녀’, 4편 ‘주홍물방울’, 5편 ‘바다의 함가’로 이어지는 방대한 스토리를 담았다. 가가브라고 불리는 거대한 균열로 분열되어 있는 3개의 대륙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뤘다. 3편 ‘하얀마녀’는 영웅전설 시리즈 중 가장 감동적인 스토리로 정평이 나있다. 지금도 [영웅전설]하면 ‘하얀마녀’를 가장 먼저 떠올릴 만큼 유명한 작품이다.

주인공 ‘쥬리오’와 ‘크리스’는 성년식날 순례여행을 떠나는데, 여행 도중 ‘하얀마녀’라는 여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얀마녀’는 주인공들이 모험을 통해 성장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비정한 세상과 마녀라 불리는 한 여인의 숭고한 희생, 그리고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 진실이 하나둘 밝혀지는 과정을 통해 가슴 짠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이렇듯 감성에 호소하는 스토리는 [영웅전설] 시리즈의 전매특허로 사랑받고 있다.

‘주홍물방울’이라는 부재로 출시된 4편은 가가브 3부작 중 시간적으로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을 다뤘다. 고아로 태어난 주인공 ‘어빈’이 어렸을 때 헤어진 여동생을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면서 게임이 시작된다. 4편은 ‘희생’과 ‘성장’을 테마로 한 전작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신으로부터 자립하려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소 어둡고 비극적인 톤으로 묘사했다. 난이도도 전작에 비해 어려워졌고, 시스템 또한 바뀐 게 많아서 기존 팬들로부터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는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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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중 가장 어둡고 비극적인 테마를 다룬 4편 주홍물방울. PSP용으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5편 ‘바다의 함가’는 4편에 비해 경쾌한 분위기로 시작한다. ‘바다의 함가’란 부재처럼 주인공 일행이 사라진 멜로디를 찾아 떠나는 모험을 다뤘다. 이 게임은 독특하게도 음악을 테마로 다뤘다. 때문에 게임 곳곳에서 아름다운 테마음악들을 들을 수 있다(바다의 함가의 미디음악은 지금 들어도 잔잔한 감동을 준다). 특히 주인공 일행이 단 한 명의 어린아이 관객을 위해 공연을 하는 장면은 이 게임의 최고의 명장면이다. 1999년 발매된 게임치고 썩 좋은 그래픽은 아니지만, 음악과 스토리만으로 본다면 단연 최고의 게임이라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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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5편인 바다의 함가. 소년의 모험과 성장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음유시인의 이야기를 유쾌한 시선으로 담았다.>



영웅전설의 종착지, 궤적 시리즈
전설은 2000년대 이후에도 계속 됐다. 가가브 트릴로지는 5편으로 종결되고 ‘영웅전설’은 새로운 시리즈를 맞는다. 2004년 출시된 [영웅전설: 천공의 궤적]은 ‘에스텔 브라이트’라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지금까지 남성이 주인공으로 나온 기존 시리즈와 비교하면 새로운 변화다. 3D 그래픽을 사용해 게임의 수준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켰다. 모험을 통해 주인공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은 전작과 비슷하다. ‘천공의 궤적’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공중도시나 각종 비행물이 등장하는 등 전반적으로 스팀펑크적인 분위기를 도입했다. ‘천공의 궤적’은 실제 산업혁명을 모티브로 한 ‘도력혁명’ 시대를 다뤄 분위기가 완전 달라졌다. ‘천공의 궤적’은 총 3부작으로 나뉘어 출시됐다(하나의 게임을 3개로 나누어 발매한 팔콤의 상업성이 비난받기도 했다). ‘천공의 궤적’ 시리즈는 국내 게임사 아루온 소프트에서 한글화해 인터넷으로 발매됐지만, 현재는 서비스가 중단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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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브 트릴로지 이후 5편부터 새로 시작되는 궤적 시리즈. 게임이 완전 달라졌다.>



2010년 발매된 [영웅전설: 제로의 궤적]은 아쉽지만 PSP버전으로만 나왔다. 기존 시리즈처럼 등장인물들이 완전 바뀌었고, 시스템도 변화를 맞았다. 2011년에는 후속편인 [영웅전설: 벽의 궤적]이 이어 발매됐다. ‘제로의 궤적’과 ‘벽의 궤적’은 스토리가 이어지며, 아쉽지만 국내 정식발매는 되지 않았다.


소년이 어른으로... 게임 속 성장드라마
[영웅전설]은 소년들의 성장을 테마로 한 게임이다. 모든 시리즈는 주인공의 ‘모험’과 ‘성장’을 기본 한다. 철모르는 아이였던 주인공은 모험을 통해 청년으로 성장을 하며 어른이 되어 간다. 여행도중 친구들과 만나고 몬스터와 싸우며 영웅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런 성장드라마는 [영웅전설]이 추구하는 공통적인 맥락이다.

유저들은 온갖 역경을 딛고 어른으로 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현실의 자신을 반추해 볼 수 있다. [이스]가 쉽고 재미있는 RPG의 맛을 선보였다면, [영웅전설]은 교훈적인 내용과 잔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두 게임은 한국형 RPG의 성장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창세기전], [악튜러스] 같은 한국형 RPG가 감성코드를 전면에 내세운 것도 이 게임의 영향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와 [영웅전설]의 정서적 감동은 한국 게이머들의 가슴에 큰 울림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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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전설] 궤적 3부작의 2편인 제로의 궤적, 3편 벽의 궤적. 아쉽지만 국내에는 정식 발매되지 않았다.>



누가 영웅전설의 명예회복을 책임질 것인가?

‘폭력성이 강한 인터넷 게임에 중독된 중학생이 초등학생 동생을 살해...’
2001년 3월 5일자 ,조선일보
 
‘이번 사건은 죽고 죽이는 인터넷의 폭력게임이 청소년에게 얼마나 심각한 폐해를 끼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
2001년 3월 6일자 <동아일보>
 
‘잔혹한 내용의 게임이 난무하는 사이버 공간, 가상과 현실세계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폭력적인 게임에 빠져들어 병들어 가는 청소년들...’
2001년 3월 18일 MBC 시사 프로그램 보도 내용

도대체 얼마나 폭력적인 게임이길래 언론들이 저토록 살벌한 표현을 써가며 융단폭격을 가할까? 기사가 하나 같이 비판하는 대상은 [이스]와 [영웅전설]이다. 2001년 3월 4일,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한 중학생이 자신의 동생을 흉기로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이 보도되자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경찰과 언론은 이 비극적인 사건의 원인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결론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그 학생이 평소 즐겨 했던 게임이 [이스]와 [영웅전설]이란 게 알려지자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게임 죽이기에 나섰다. 한 방송국 시사프로에서 게임의 폭력성을 검증한답시고, 게이머들의 뇌파검사를 하는 모습은 정말 희극이 아닐 수 없었다.

이내 “살인사건의 원인은 폭력게임”이라는 공식이 성립됐고, 게임은 연일 언론의 도마 위에 올라 비난의 칼을 받아야 했다. [이스]와 [영웅전설]을 비롯한 많은 게임들은 폭력적 인터넷 게임으로 변질되고 모욕당했다. 그런데 당시 게임을 해본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살인동기를 유발할 만한 폭력성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스]와 [영웅전설]은 ‘착한’ 게임의 대명사였다. 동시대 일본 PC게임들이 자극적인 성인물로 변할 때도 한결같이 RPG게임의 순수한 재미를 지켰다. 캐릭터의 옷 한번 벗기지 않고, 피한방울 흘리게 하지 않았다. 그 안에는 소년의 모험과 성장, 꿈과 희망, 재미있고 감동적인 에피소드들이 가득했다. 그런 게임이 영문도 모른 체 살인동기를 제공한 극악의 게임으로 사회의 돌팔매질을 받아야 했다. [이스]와 [영웅전설]은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게임 마녀사냥’의 첫 희생자였다. 당시 <피시파워진> 서장원 편집장은 ‘누가 영웅전설의 명예회복을 책임질 것인가?’라는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스와 영웅전설을 즐기고 사랑했던 게이머들의 허탈감과 마음의 상처는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의 관심은 수그러들고 조용해 질 것이다. 그 때 과연 누가 자신들이 상처 입힌 게임의 명예에 책임을 질 것인가”

그러나 [이스]와 [영웅전설]의 명예회복은 10년이 지금도 지금도 요원하기만 하다. 게임에 대한 마녀사냥은 그때보다 더 심해졌다. 이후로도 수많은 게임들이 ‘마녀재판’의 화형대 위에서 더 심한 모욕을 당해야 했다. 이제는 아예 게임을 마약으로 규정짓고 아예 법으로 청소년의 게임시간을 제한했다. 언론은 청소년 관련 사건만 터지면 가장 먼저 게임의 혐의부터 파고든다. 과연 누가 [영웅전설]의 명예회복에 책임을 질 것인가? 10년의 세월 동안 게임은 변했지만, 게임을 보는 우리의 왜곡된 마음은 여전히 '영웅전설'을 옭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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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씨에게도 사과를 드릴께요”. 이렇게 착한 그녀가 살인을 유발한 폭력게임의 주인공으로 전락했다. 누가 그녀의 명예회복을 책임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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