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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간 변함없는 인기를 받아온 [바람의 나라]. 한국 온라인게임의 뿌리역할을 해왔다.


초창기 한국 온라인게임은 3면의 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게임은 사회악’이라는 사회인식의 벽, ‘외국게임을 절대 따라갈 수 없다’는 열등감의 벽. ‘온라인게임은 패키지게임에 비해 조악하다’는 고정관념의 벽이다. 게임에 대한 배타적 인식 위에 열등감과 고정관념이 합쳐져 단단한 장벽이 세워졌다. 이 3가지 벽은 한국 온라인게임의 발목을 잡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 ‘게임’이란 녀석이 사람을 홀리는 묘한 매력이 있는 모양이다.

촉망받던 젊은이들이 그들 앞에 놓인 탄탄대로를 버리고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는’ 게임이라는 분야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깟 게임 만들어서 밥 먹고 살 수 있냐”는 주변 사람들의 냉소적인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온라인 게임이란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다. 게임을 출세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게임 자체가 좋았고, 그 열정을 바탕으로 한국 온라인게임 산업을 일구었다. 물도 주지 않고, 제대로 일구지도 않은 이 척박한 땅 위에서 한국 온라인게임은 기어코 싹을 띄웠다. 그리고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고 화려한 꽃을 피웠다. [[바람의 나라]]는 한국 온라인게임의 뿌리 역할을 한 게임이다. 고구려 국내성에서 시작한 [바람의 나라]는 17년째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 온라인게임의 놀라운 생명력은 [바람의 나라]에서부터 시작됐다.


대학가에서 시작된 머드게임 열풍
한국 온라인게임의 원류는 1990년대 초반 대학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대 초에는 초창기 네트워크 서비스 텔넷이 전국에 보급되던 시절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 PC통신들이 생겨나면서 온라인게임의 토양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초창기 국내 온라인게임의 태동은 과거 미국의 게임역사와 비슷하다. 70년대 미국 대학생들은 학교 내에 오락기를 설치하고 즐기면서 전자게임의 역사가 시작됐다. 최초의 상업용 게임 [퐁]도 당시 캠퍼스 최고 인기게임인 [스페이스워]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한국 온라인게임도 처음엔 대학교 연구실이나 동아리를 중심으로 확산된 소규모 네트워크게임에서 출발했다.

당시 대학가에선 외국에서 들어온 ‘테이블RPG(TRPG)’가 유행이었다. TRPG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테이블에 모여 주사위를 굴리며 대화를 나누면서 RPG를 즐기는 게임이다. 하지만 아무리 재미있는 게임이라도 오프라인 상에서 즐기기엔 공간적인 한계가 있었다. 학생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RPG를 즐기는 방법을 찾았다. 바로 네트워크를 이용해 TRPG를 즐기는 방법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온라인게임의 시초로 불리는 ‘머드게임’이다. 90년대 초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전국에 깔려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PC방도 없었다. 마음 놓고 네트워크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은 대학교 전산실밖에 없었다.

머드게임은 대학 전산실에 설치된 PC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초창기 머드게임은 그래픽이 없이 텍스트 위주로만 진행됐다. 머드게임에 매료된 학생들의 동아리를 만들어 게임을 공유했고, 일부에선 외국 게임을 가져와 번역해, 함께 즐기곤 했다. 넥슨 김정주 회장,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 엑스엘게임즈 송재경 대표 등 한국 게임산업의 주역들도 이 시절 대학교에서 머드게임을 즐긴 세대다.


온라인게임 ‘대모’와 머드게임 전성기

“내가 알게 된 그들은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아닌 게임이라는 테크놀로지에 재능을 가진 친구들이었죠. 어른들이 기대하는 영역이 아니었던 게임을 택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왕따’ 당하는 모습을 보고 참을 수 없었습니다.”
- 마리텔레콤 장인경 전 대표(매일경제 인터뷰 중)

90년대 초반만 해도 ‘온라인게임(엄밀히 말해 머드게임)’은 대학생들의 취미나 놀이정도에서 그쳤다. 온라인게임이 게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쥬라기 공원]과 [단군의 땅]이 나오면서부터다. 두 게임은 국내에서 상용화 된 최초의 온라인게임이다. 이중 [단군의 땅]을 제작한 마리텔레콤의 장인경 대표는 한국 온라인게임의 '대모'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여학생으로는 최초로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해 주목 받았다. 여성 우주인이 되기 위해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70년대 서슬 퍼런 유신시절을 보내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삼성전자를 거쳐 한국생산기술연구원에서 근무했던 그는 머드게임에 빠져 있는 카이스트 학생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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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온라인게임의 효시가 되는 머드게임[단군의 땅]. 게임이 텍스트로만 진행 된다.


뛰어난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게임에 빠졌다는 이유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을 보고 그는 어떠한 오기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게임에 심취해 학업을 계속하기 힘든 카이스트 후배들을 모아 벤처회사를 차렸다. 이것이 바로 한국 온라인게임의 산실로 통하는 ‘마리 텔레콤’이다. 그는 학생들을 모으기 위해 카이스트 교수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설득시켰다고 한다. 장 대표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마리텔레콤 직원들은 상처받은 이 사회의 패자들입니다. 벤처의 논리는 패자부활전이죠. 실리콘밸리에서도 나스닥에 상장해 성공할 확률은 1만분의 1입니다. 실패는 당연한 것입니다. 다시 배워서 시작 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죠.”(<매일경제> 인터뷰 중)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단군의 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게임을 하기 위해 막노동을 하며 통신비를 마련하거나, 고시생이 시험을 포기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단군의 땅]보다 며칠 앞서 발매된 [쥬라기 공원]은 같은 카이스트 출신인 송재경 씨가 개발한 작품이다. 울티마를 광적으로 좋아한 송재경은 전투가 아닌 퀘스트 중심의 머드게임을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두 게임의 성공에 힘입어 90년대 초반 한국 게임시장은 머드게임 전성기가 도래했다. 분당 2~30원의 비싼 통신비에도 불구하고 머드게임 유저들은 급속도로 늘어갔다. 이 시기 [오로라캠프], [드래곤랜드], [퇴마요새] 등 다양한 머드게임이 나왔다. 특히 [퇴마요새]는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퇴마록]을 소재로 해 인기를 더했다.


카이스트의 괴짜들, 회사를 차리다

“게임 회사는 소비자에게 즐거움을 판매하는 곳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제작자부터 즐겁게 일해야죠.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이 아니라 놀면서 게임에 몰입해야 하거든요. 규제보다는 자유롭고 열린 분위기가 필요하죠.”
- 넥슨 김정주 회장(조선일보 인터뷰 중)

지금은 세계 굴지의 게임회사로 성장한 넥슨. 그러나 20년 전에는 10평짜리 오피스텔에서 직원 5명 안팎의 한 작은 회사에 불과했다. 넥슨 창업주 김정주 회장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대학원 전산학과에 들어간 전형적인 수제였다. 천부적으로 사업가 기질을 타고난 그는 카이스트 재학시절 마리텔레콤 장인경 사장의 영향을 받아 온라인게임 쪽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함께 게임을 만들 사람을 찾던 중 카이스트 동기인 송재경을 영입하게 된다. 한국 온라인게임의 거목들이 역사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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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슨 창업주 김정주 회장. 당시 송재경 등 카이스트 동문들을 모아 넥슨이란 게임회사를 차렸다.



김정주 회장은 이민교, 송재경(엑스엘게임즈 대표), 김상범, 서민(넥슨코리아 대표) 등과 함께 1994년 12월 넥슨을 창업했다. 변호사인 그의 아버지에게 6,000만원을 빌려 창업자금으로 썼다고 한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살 때였다. 그러나 회사를 차리자마자 바로 게임을 만들 수는 없었다. 이때만 해도 ‘온라인게임’은 검증된 산업이 아니었다. ‘단군의 땅’ 같은 머드게임이 성공했으나, 아직은 마니아들만 즐기는 비주류 장르이었다. 당연히 투자자들도 온라인게임에 투자하길 망설였다.

넥슨은 스스로 개발자금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와 SK 등 대기업 홈페이지 제작부터, 아시아나항공 예약시스템 개발, 웹오피스 프로그램 개발 등 돈 되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맡았다. 외부에서 돈 벌어오는 일은 김정주 대표가 담당하고, 게임개발은 전적으로 송재경 씨에게 맡겼다. 김 대표는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조직 관리보다는 좋은 게임을 내놓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자신의 몫”이라고 밝힐 만큼 사람에 대한 신뢰를 중요시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바람의 나라]는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됐다.


동접자 30명? 매출 100만원? 위기의 [바람의 나라]

“내 미래가 너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기업 연구원으로 들어가 대리, 과장, 부장이 되고 잘하면 임원이나 경영자도 되겠지요. 하지만 평탄한 길 대신 불확실하지만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싶었습니다.”
- 넥슨 공동창업자 서민 대표(한국일보 인터뷰 중)

넥슨은 텍스트 머드게임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픽을 입힌 진화된 온라인게임을 구상했다(지금이야 당연하지만 그때만 해도 무모한 시도였다고 한다.) 넥슨은 동명의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고구려 시대를 다룬 MMORPG를 개발했다([바람의 나라]가 최초의 MMORPG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최초의 MMORPG는 1991년 미국에서 만든 [네버원터나이츠]이고 그 다음이 1995년 [메리디안59]라는 게임이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일대기를 다룬 [바람의 나라]는 무협/판타지 일색의 국내 게임시장에 한국적 정서를 담은 게임이다. 사실 [바람의 나라]는 송재경 씨가 평소 재미있게 보던 만화였다고 한다. [바람의 나라]를 시작으로 [리니지], [레드문] 등 만화원작의 온라인게임이 유행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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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바람의 나라] 로그인 화면.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국적 정서를 살렸다.


하지만 [바람의 나라]가 처음 나올 때만 해도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그래픽 온라인게임을 제대로 서비스하기엔 당시 인터넷 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처음 서비스 할 때는 인터넷이 아니라 ‘천리안’, ‘하이텔’ 등의 통신서비스에서 서비스됐다. 당시에는 모뎀을 썼기 때문에 게임을 하기 위해선 엄청난 전화비를 감수해야 했다. 한 달에 전화비가 수 십 만원씩 나와 부모님에게 혼나는 사례가 비일비재 했으니, 어쩌면 온라인게임에 대한 기성세대의 거부감이 이때부터 시작됐을지 모를 일이다. 이렇듯 느린 인터넷 환경, 낮은 PC사양, 비싼 서버비용 등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었다.

1996년 12월, 넥슨은 [바람의 나라]라는 그래픽 기반의 머드게임을 내놓았다. [바람의 나라]는 유저들에게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물론 당시 패키지 게임보다 그래픽수준은 떨어졌지만,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인터넷상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 함께 플레이 하는 경험 자체가 경이로움이었다. 하지만 시장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과는 달리 초반 흥행수준은 실망스러웠다. 동시접속자가 30명이 채 안됐다. 유료서비스를 시작하고 첫 달 매출이 고작 백만 원 수준에 그쳤다. 온라인게임에 대한 낯선 시선과 열악한 인터넷 환경 때문에 좀처럼 탄력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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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의 인기 만화 [바람의 나라]를 원작으로 개발됐다. 이후 [리니지], [레드문] 등 한국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한 게임들이 속속 등장했다.


하지만 인터넷 환경이 좋아지고, 새로운 게임에 대한 유저들의 갈망이 높아지면서 [바람의 나라]는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때마침 [스타크래프트]가 몰고 온 PC방 열풍이 절벽 끝에 몰린 [바람의 나라]를 구했다. 한국 게임시장은 온라인 쪽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었다. 뒤늦게 가치를 인정받은 [바람의 나라]는 이후 승승장구 했다. 한국 IT산업의 절정기였던 1999년에 이르러서는 동시접속자 12만 명을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 이때부터 넥슨은 100억대 매출을 돌파하며 국내 최고 게임사로써의 입지를 굳혔다.


[바람의 나라], 커뮤니티 게임으로 진화하다
1997년, 넥슨의 공동창업자 송재경 씨가 회사를 떠나면서 [바람의 나라]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그는 병역특례를 위해 ‘아이네트’라는 회사에 입사한 후 엔씨소프트로 옮겨 [리니지]를 만들게 된다(엔씨소프트와 송재경 이야기는 [리니지] 편에서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송재경의 빈자리는 게임의 기획을 담당했던 정상원 씨가(현재 띵소프트 대표) 맡았다. 그는 대기업 삼성에 입사했지만 경직된 조직문화가 싫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넥슨에 합류했다. [바람의 나라]의 기획을 맞은 그는, 이후 [어둠의 전설], [일렌시아] 등 넥슨 대표작들을 개발했다.

정상원의 지휘하에 [바람의 나라]는 본격적인 변신에 들어갔다. 그들은 10년 이상 장수하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게임이 롱런하려면 다른 게임에는 없는 특별한 재미가 필요했다. [바람의 나라]는 네트워크게임의 한계를 돌파했다. 그때까지 온라인게임은 네트워크를 통해 게임을 즐기는 수준에서 그쳤다. 넥슨은 온라인게임의 커뮤니티 기능을 강화하기로 했다. 게임 안에서 다른 사람과 만나고, 동료가 되고, 함께 사냥을 하고, 이야기하는 사회성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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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경험 자체가 당시 유저들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것은 당시 게임에서 맛볼 수 없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바람의 나라]는 마치 채팅 프로그램처럼 인터넷상의 또 하나의 커뮤니티 공간을 제공한 것이다. 사람들은 게임을 단순히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소소한 일상사를 이야기하는 커뮤니티의 장으로 활용했다. 이런 커뮤니티성은 한국 온라인게임의 가장 큰 매력으로 자리 잡았다. [바람의 나라]는 화려한 그래픽(당시로써는)과 견고한 커뮤니티성을 내세워 머드게임 유저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초기 버전은 머드게임에 그래픽을 도입하는 정도였지만, 게임이 진화되면서 강화된 MMORPG로 변신했다. 솔로잉 위주의 기존게임과는 달리 파티플레이 시스템을 강조해 유저 간 소통을 활성화 시켰다.

커뮤니티는 게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1998년 [바람의 나라]에서 결혼시스템을 도입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결혼시스템을 추가하면서 실제 게임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는 커플도 생겼다. 2005년 전면 무료화를 선언하면서 [바람의 나라]는 또 한 번 중흥기를 맞았다.

[바람의 나라]는 게임의 서사와 유저 간 커뮤니티가 어우러져 놀라운 역동성을 발휘했다. 이러한 역동성은 한국 온라인게임에 근간을 형성했다. 이후 나온 온라인게임들은 대부분 [바람의 나라]에서 제시한 커뮤니티 기능을 계승 발전시켰다. [리니지]에선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정치의 커뮤니티를, [미르의 전설]에서는 무협지 속 문파간의 강한 결속력을, [라그나로크]에선 동네 사랑방과 같은 아기자기한 대화의 장이 형성됐다. [바람의 나라]는 17년간 1800만 명의 누적가입자 수를 기록했고, 1,000회가 넘는 업데이트를 통해 유저들의 취향에 맞게 진화해 왔다. 또 가장 오랜 기간 상용화된 그래픽 MMORPG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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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기능을 살린 [바람의 나라]는 한국 MMORPG의 원형을 제시했다.


라인게임의 시대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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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나라] 기획을 담당한 정상원 띵소프트 대표(좌), 서버프로그램 담당 서민 넥슨코리아 대표(우) <출처: 게임메카>


[바람의 나라]는 한국 게임역사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이 게임 이후로 패키지 게임의 시대가 가고, 온라인게임 시대가 열렸다. [바람의 나라] 이후 [리니지], [영웅문], [미르의 전설] 같은 MMORPG들이 등장해 성공했다. 반대로 패키지 게임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됐다. 넥슨은 온라인게임 시대를 맞아 차기작 준비에 들어갔다. 1998년, 넥슨은 MMORPG [어둠의 전설]을 서비스 했다. [어둠의 전설]은 [바람의 나라]에서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다 넣었다. 그래픽이 대폭 보강됐고, 정통 RPG 요소가 도입됐다. [바람의 나라]의 탑뷰 방식을 쿼터뷰 시점으로 바꾸었다. 넥슨은 이후 [텍티컬 커맨더스(2001)]와 [비엔비(2001)], [카트라이더(2004)], [마비노기(2004)] 등의 게임들을 연달아 성공시키면서 온라인게임 시장의 맹주로 성장했다.

[바람의 나라]는 게임 개발자들의 산실이기도 하다. [바람의 나라] 제작에 참여했던 개발진들은 업계 곳곳에 진출해 국내 게임 산업의 버팀목이 됐다. 송재경 대표는 엔씨소프트에서 [리니지] 만들고, 엑스엘게임즈를 창립해 [아키에이지]를 내놓았다. 게임 기획을 맡은 정상원 대표는 2000년 초반 넥슨 대표를 지내면서 수많은 히트작들을 배출했다. 현재 띵소프트에서 ‘프로젝트NT'라는 이름으로 게임을 개발하고 있다. [바람의 나라] 서버 프로그래머로 일했던 서민 대표는 현재 넥슨 코리아의 대표직을 역임하고 있다. 프로듀서를 맡은 강신철 대표는 현재 네오플 대표를 역임하면서 [던전앤파이터], [사이퍼즈]를 서비스하고 있다. 8조원 자산가로 성장한 김정주 회장은 여전히 넥슨의 리더로서 한국게임을 세계에 알리는데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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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나라] 이후에 서비스된 넥슨표 RPG [어둠의 전설]과 [일렌시아].


첫사랑과 같은 게임

“17년 된 [바람의 나라]는 아마 유저들에겐 첫사랑과 같은 게임일 겁니다. 게임의 나이만큼 유저들의 연령층도 다양해 졌죠. 지금은 40대에서 1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바람의 나라]를 즐기고 있죠.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유저들의 취향에 따라 늘 변화를 시도하려는 노력입니다”
- 넥슨 [바람의 나라] 개발팀 박웅석 실장

얼마 전 [바람의 나라]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판교에 위치한 ‘넥스토릭’ 사옥을 찾았다(넥슨은 넥스토릭을 자회사로 분리해 [바람의 나라] 서비스를 전담시켰다). 그런데 이곳 회의실 풍경이 재미있다. 회의가 시작되면 40대 이상의 10년차 실장님부터, 5년차 과장, 2년차 대리, 갓 입사한 신입사원까지 전부 모여 각자의 의견을 나눈다.

17년 된 노장게임이라 회사 풍경도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일 것이라 생각했던 내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회의실에 모인 개발자들은 게임을 처음부터 즐겨온 1세대 유저부터 갓 시작한 요즘 세대 의견까지 꼼꼼히 체크해 게임에 반영한다. 그래선지 [바람의 나라]는 유독 10대에서 20대까지 젊은 세대들이 많이 하는 게임이다. 지금도 19세에서 25세 사이의 유저들이 가장 많다고 한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게임판에서 열정 하나로 시작한 [바람의 나라]는 어느덧 세대를 아우르는 나이 지긋한 게임이 됐다. 이곳에서 만난 박웅석 실장은 10년째 [바람의 나라]를 서비스해 온 베테랑이다. 그는 [바람의 나라]를 가리켜 “첫사랑과 같은 게임”이라고 표현했다. 정말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학창시절 [바람의 나라]를 시작한 유저들은 이제 부모 세대가 되어 아이들 함께 게임을 즐긴다. 부모 세대나, 아이들 세대나 [바람의 나라]는 여전히 젊고 풋풋한 매력이 느껴진다. 마치 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던 첫사랑을 대하는 느낌이랄까. 게임은 유저들의 변화에 맞춰 수백 번 모습을 바꿔왔다. 그래선지 세월의 풍파도 이 게임만은 비껴가는 모양이다. [바람의 나라]의 진화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한편, [바람의 나라]가 온라인게임의 시대를 열면서, 반대로 패키지 게임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한국 패키지 게임시장의 종말을 고한 [화이트데이]는 다음 시간에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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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바람의 나라]를 시작한 유저들이 이제 부모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게임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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