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a Form
 
메인 모델은 그 상품을 잘 팔기 위한 선택 중 가장 중요한 선택이다. 그런 이유로 당대 최고 스타들은 어마어마한 몸값을 자랑하기도 한다. 20여 년을 넘게 이어온 피파도 축구라는 장르의 특성상 메인 모델은 당대 최고의 선수를 선택해 왔다. 게임의 메인을 장식했던 축구스타에 대해 정리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피파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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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프랑크 데 부어(우) 아일랜드 제이슨 맥아티어(좌)

 
네덜란드의 전성기를 이끈 비운의 천재 – 프랑크 데 부어
 
1984년 14세의 나이로 아약스 유소년팀에 입단한 프랑크 데 부어는 18세의 어린 나이에 1군으로 콜업되어 데뷔전을 치른다. 1991년 그의 축구 인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인연인 루이스 반 할 감독의 부임 후 데니스 베르캄프, 마크 오베르마스, 클라렌스 세도르프, 에드윈 반 데 사르, 에드가 다비즈, 로날드 데 부어(쌍둥이 동생) 등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이끈 선수들과 함께 아약스 천하를 만드는데 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이 때의 아약스는 5차례 리그 우승과 1991-92 시즌 UEFA CUP 우승, 1994-95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94-95 시즌의 챔스 우승 때에는 리그 우승도 함께 하는 더블을 기록했는데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무패 더블의 대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1994년 미국 월드컵 4강에 이어 명장 거스 히딩크의 지휘 아래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4강에 올라 그의 인생 최고의 황금기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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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약스 천하의 핵심 수비수 프랑크 데 부어

 
1998-99시즌 220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로 동생과 함께 이적한 프랑크 데 부어는 다시 한번 루이스 판 할 감독과 함께 프리메라리가 우승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의 찬란했던 순간은 여기까지였다. 자신을 든든히 지지해 주었던 루이스 판 할 감독이 미디어, 구단 그리고 선수단과의 갈등으로 사임하게 되고 프랑크 데 부어는 금지 약물 복용으로 1999-2000 시즌 초반 출장정지를 당하게 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로 2000에서는 이탈리아와의 4강전에서 패트릭 클루이베르트가 얻은 페널티킥을 실축하고 승부차기마저 실축해 ‘페널티킥의 악몽’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수식어도 얻게 된다.
 
2002-03 시즌 다시 루이스 판 할 감독이 바르셀로나로 부임해 프랑크 데 부어와 재회하게 되지만 루이스 판 할 마저 어수선한 바르셀로나를 재건하는데 실패했으며, 바르셀로나는 리그 10위권 밖으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는다. 프랑크 데 부어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묵묵히 수비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지만 2003-04 시즌 부임한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의 플랜에는 이미 프랑크 데 부어의 자리는 없었다. 결국 프랑크 데 부어는 터키의 갈라타사라이, 스코틀랜드 글레스코 레인저스로 이적 후 2006년 36세의 나이로 은퇴를 한다.
 
프랑크 데 부어는 선수 은퇴 후 감독으로서도 굴곡이 많은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아약스의 임시 감독으로 우승을 경험한 것을 시작으로 11-12, 12-13, 13-14 시즌을 연속으로 우승해 감독으로서도 황금기를 걷나 싶었지만 2017년 6월 26일 크리스탈 팰리스 감독으로 선임된 후 같은 해 9월 11일 취임 후 77일 만에 경질되는 EPL 사상 최단기간 경질이라는 굴욕도 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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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파 온라인 4에서의 프랑크 데 부어

 
 
피파 2002, 피파 2004, 피파 온라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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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L의 왕 – 티에리 앙리
 
이민 2세로 파리 근교 레줄리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AS 모나코 유스 출신으로 모나코에서 141경기 28골 37어시스트를 기록하고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팀 내 최다 득점을 기록해 월드컵 우승에 크게 기여한 앙리는 이탈리아 세리에 A의 빅클럽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1250만 유로라는 거금을 들였으나 아쉽게도 유벤투스는 앙리를 제대로 활용할 줄 몰랐다. 스트라이커가 몸에 맞았던 앙리는 유벤투스가 제시한 윙어로는 좀처럼 그 재능을 폭발 시킬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에 당시 감독이었던 카를로 안첼로티는 앙리를 아스날로 이적시켰고 안첼로티는 후에 이 선택을 가장 후회한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유벤투스에서 인생 최악의 시기를 겪은 앙리는 모나코 시절의 은사인 아르센 벵거 감독 밑에서 엄청난 선수로 성장하게 된다. 앙리는 같은 프랑스 출신의 비에이라, 프티 그리고 데니스 베르캄프라는 당대 최고 선수의 지원을 받으며 폭발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4차례의 득점왕은 물론 2번의 리그 우승을 이뤘으며 특히 전무후무한 무패 우승을 이루는 역사를 썼다. 앙리가 아스날에서 기록한 228골(후에 임대로 다시 아스날 유니폼을 입게 된다)은 클럽 역사상 가장 많은 골로 남아 있다. 그야말로 아스날의 왕을 넘어 EPL의 왕으로 군림했다 할 수 있다.
 
▶ 앙리는 아스날을 넘어 EPL의 왕이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리한 토목공사는 왕조를 멸망시키는 지름길이 되곤 한다. 아스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스날의 수뇌부는 더 큰 구장을 짓기로 결정했고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는 재정 악화를 불러오게 되었고 몸값이 비싼 선수들을 팔기 시작한다. 비에이라, 피레스, 에두 등을 이적시켰고 기대주였던 레예스는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임대되었다. 여기에 베르캄프마저 은퇴를 하게 된다.
 
남은 앙리는 고군분투했지만 옛 왕조의 영광을 찾아오기엔 역부족이었다. 여기에 클럽과 국가대표를 오가며 혹사시킨 몸은 부상으로 이어졌다. 결국 시즌 중반 부상으로 아웃되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시즌이 끝나고 무한도전을 찍은 후 앙리는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게 된다. 챔스 우승을 위한 본인의 강력한 의지와 이미 노쇠해져 가는 앙리에게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아스날 수뇌부의 생각이 맞은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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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는 무한도전에 출연해 물공을 맞았다

 
바르샤에서 앙리는 사무엘 에투, 리오넬 메시와 함께 지구 최강의 공격진을 이루었다. 전성기 때의 압도적인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30경기 12골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보여 성공적인 첫 시즌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바르샤에서의 2008-09시즌은 앙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시즌으로 남아있다. 예전의 폼이 다시 살아났음은 물론이고 그토록 염원하던 빅이어를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모든 우승컵을 들어 올린 앙리였지만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리고 그 한을 풀기 위해 아스날을 떠나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것이었다. 한으로 남았던 챔스 우승을 마침내 이룬 앙리는 26골을 넣으면 바르샤가 6관왕이라는 초유의 기록을 달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월 앞에선 영원할 것 같았던 왕의 치세도 저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신예들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되고 2010년 여름 미국 MLS 뉴욕 레드불스로 이적한다. 은퇴 후 축구 해설가로 왕성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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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파 온라인 4에서의 티에리 앙리

 
 
피파 2006 ~ 피파 2012, 피파 온라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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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시리즈 최장수 메인 모델 – 웨인 루니
 
리버풀에서 태어난 웨인 루니는 9살 때 에버튼 유스팀에 입단해 만 16세의 나이로 1군 데뷔를 한다. 그리고 얼마 뒤 당시 30경기 무패를 기록하고 있던 최강 아스날을 상대로 역사적인 데뷔골을 터뜨린다. 이 골은 아스날의 대기록을 마감시키는 골인 동시에 당시 프리미어리그 최연소 골이었다. 영국을 충격과 열광의 도가니로 빠뜨린 루니는 국가대표팀에서도 그 활약을 이어간다. 유로 2004 첫 경기 프랑스전에서 페널티킥을 얻어냈으며 2경기에서 4골을 터뜨리는 기염을 토한다.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이 축구신동을 3,000만 파운드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맨유로 데려온다. 루니의 천문학적인 이적료는 많은 잡음을 불러왔다. 아직 어린 선수에게 3,000만 파운드를 쓴 것은 거품이 낀 것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루니는 “맨유가 날 위해 지불한 3,000만 파운드가 파격 세일한 가격이 되도록 하겠다.”며 응수했고 데뷔전이었던 챔피언스리그 32강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해 자신에게 향했던 논란을 한 방에 불식시킨다.
 
그라운드에서 루니는 마치 한 마리 성난 황소 같았다. 다소 육중해 보이는 몸이었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놀라운 순발력과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맨유 문전에서부터 상대 팀의 골문 까지 질주하기 시작하면 상대편 선수들은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여기에 축구 센스마저 탁월해 클럽 팀은 물론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트는 신성 루니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잉글랜드 최고의 감독 퍼거슨 경의 지도와 더불어 판 니스텔로이, 솔샤르, 라르손, 테베스, 박지성 등 당시 최고의 공격자원들과 함께 프리미어리그를 씹어 먹었다. 특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각성으로 득점 루트가 다양해지면서 직접 공격을 이끄는 것뿐만 아니라 측면이나 후방으로 빠져 호날두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플레이에도 눈을 뜨기 시작한다. 특히 2007-08 시즌은 루니의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활약을 펼쳤다. 초반 부상으로 주춤했지만, AS로마와의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부터 골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리그 2연패와 맨유가 3번째로 빅이어를 들어올리는데 크게 기여한다.
 
▶ 한때 루니는 EPL을 씹어먹었다
 
하지만 엄청났던 루니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암흑기와 함께 서서히 지고 있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은퇴 후 맨유는 극심한 침체기에 빠졌고 좀처럼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루니 역시 이전과는 확연히 떨어진 폼으로 부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루니는 어렸을 적 자신이 그토록 가기 싫어했던 미드필드로 포지션을 바꾼다. 하지만 루니는 스콜스가 되지는 못했다. 운동능력이 전성기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 루니는 미드필더로서 자리 잡지 못했으며 결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에버튼으로 이적했으며 현재는 미국의 DC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클럽에서 엄청난 커리어를 쌓은 루니는 그러나 국가대표로서는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처음 데뷔한 유로 2004에서 4경기 4골이라는 엄청난 골 행진을 벌여 잉글랜드를 열광의 도가니로 빠뜨렸으나 8강전에서 부상으로 교체된다. 잉글랜드 역시 8강에서 탈락하고 만다. 2006년 월드컵에서는 출전 직전 부상을 당했으나 산소 텐트 등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가까스로 출전한다. 하지만 부상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체 극심한 부진을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포르투갈과의 8강전에서 히카르두 카르발류를 고의로 밟는 파울을 범해 퇴장당하게 되고 잉글랜드는 또 한번 8강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만다.
 
절치부심하던 루니는 불행하게도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2006년 월드컵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월드컵을 앞두고 무릎 부상을 당한 것이다. 이때도 불굴의 의지로 월드컵에 출전하였으나 4년 전처럼 극심한 부진을 보이며 16강 탈락의 고배를 맛본다. 잉글랜드 A매치 최다골 기록과 센츄리 클럽에 가입했지만 월드컵 통산 1골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는 루니에게는 뼈아픈 기록이다.
 
“호날두는 골을 넣고, 메시는 드리블을 하지만 루니는 축구를 한다” 멕시코의 에이스이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루니와 한솥밥을 먹었던 치차리토의 말이다. 그만큼 루니는 축구선수로서 천재적인 감각과 센스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팀동료였던 호날두가 철저한 자기관리로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 반면 루니는 흡연과 음주 기행을 일삼으며 알을 깨지 못하고 쇠락해 갔다. 각종 성추문에 휩싸였으며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중요한 경기마다 매번 퇴장당해 팀과 국가에 누를 끼쳤다.
 
2011년 트위터상에서 한 팔로워와 논쟁 중 “운동장으로 나오면 10초 안에 때려눕혀주겠다.”라고 도발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고 이때 열받은 퍼거슨 경이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며 차라리 도서관에 가서 책 한 권을 보라”며 일침을 날린 유명한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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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파 온라인 4에서의 웨인 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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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캡틴 – 박지성
 
대한민국의 영원한 캡틴. 차범근 이후 가장 성공한 축구선수이자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다.
 
박지성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몸이 작고 왜소하다는 이유로 고교 졸업 후 프로 입단에 실패한다. 하지만 박지성의 잠재력을 알아본 당시 명지대 김희태 감독에 의해 대학 강호 명지대에 입학하게 된다. 김희태 감독은 프로로 가지 못하는 박지성을 아까워했고 친분이 있었던 교토 퍼플 상가의 총감독 키무라 분지에게 박지성을 소개한다. 교토에서 박지성은 드디어 그 잠재력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2부 리그였던 교토의 1부 승격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2003년 유럽 진출을 앞두고 교토와 계약이 끝난 상태에서도 일왕배 결승전에 출전해 동점골을 터뜨리는 등의 맹활약으로 팀을 우승에 올려놓는다.
 
교토에서의 활약은 대표팀으로 이어졌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4강에 올려놓는데 큰 공헌을 한다. 특히 포르투갈과의 예선전에서 나온 골은 전 세계의 극찬을 받았으며 황금세대로 불리던 우승후보 포르투갈을 침몰시키는 결정적 한방이 되었다. 월드컵의 대활약으로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과 함께 네덜란드의 명문 PSV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한 박지성은 그러나 이적 초반 부상의 불운과 더불어 적응 실패로 좀처럼 경기력이 올라오지 않았고 홈 팬들에게 야유를 받을 정도로 극심한 슬럼프를 겪는다.
 
하지만 박지성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2004-05 시즌 홈 팬들의 야유를 찬사로 바꿀 만큼 눈부신 활약을 펼친다. 서툰 네덜란드어와 부진을 비판했던 팀 동료 마르크 판 보멀은 사과의 인터뷰를 했으며, ‘위쑹 빠르크’라는 박지성 전용 응원가가 생길 정도로 인정받는 선수로 성장했다. 특히 AC밀란과의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의 활약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퍼거슨 감독을 사로잡았고 박지성은 꿈의 구장 올드 트레포트에 입성하게 된다.
 
명장 퍼거슨 감독의 지도 아래 박지성은 월드 클래스 급의 선수로 성장한다. 지칠 줄 모르는 스태미나를 바탕으로 쉼 없이 그라운드를 뛰어다녀 3개의 폐를 가진 사나이로 불렸다. 축구 지능도 높아 공간을 잘 활용할 줄 알았으며 수비력도 뛰어나 ‘수비형 윙어’라는 새로운 포지션을 탄생시켰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웨인 루니,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등 당시 세계 최고의 스쿼드를 자랑했던 맨유에서 박지성은 당당히 살아남았으며 사랑받았다.
 
부지런하고 헌신적인 그가 더욱 사랑받았던 이유는 빅 매치에 강했다는 점이다. 아스날, 첼시, 리버풀, AC 밀란 등 강팀과의 경기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으며 특히 2009-10 시즌 AC 밀란과의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밀란의 에이스 피를로를 완벽하게 봉쇄했다. 훗날 피를로는 “기술적으로 가장 강한 동료는 호나우지뉴였고 최고의 상대는 메시였다. 그리고 가장 까다로운 상대는 박지성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그의 헌신적이고 성실한 모습은 퍼거슨 감독뿐만 아니라 리오 퍼디난드, 라이언 긱스 등의 동료 선수로부터도 찬사를 받았다.
 
▶ 박지성은 소속팀, 대표팀 가릴 것 없이 종횡무진 활약했다.
 
리그 우승 4회, 준우승 3회 챔피언스 리그 우승 등의 클럽 커리어뿐만 아니라 2002 한일 월드컵 4강과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원정 16강까지 이루면서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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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파 온라인 4에서의 박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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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신 – 리오넬 메시
 
리오넬 안드레스 메시 쿠치티니(Lionel Andrés Messi Cuccittini), 하늘에서 아르헨티나로 내려와 현재 스페인 FC바르셀로나에서 뛰고 있는 축구의 신이다.
 
철강 노동자인 아버지와, 파트타임 청소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메시는 지역 클럽의 코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축구와 친했다. 1995년 뉴웰스 올드 보이스 유소년 팀에 입단하였으나 열한 살 때 성장 호르몬 결핍증 진단을 받게 된다. 치료에 매달 90 ~ 100 달러의 돈이 들었지만 가난한 살림에 이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소속팀 역시 이 금액을 내는 것을 꺼려 했고 메시의 부모는 빚을 내서라도 메시를 치료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린 나이지만 메시는 이러한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축구뿐이다라며 마음을 다 잡고 하루 10시간씩 볼을 찬다.
 
어려운 순간에 항상 기회가 온다라는 말처럼 평소 메시의 잠재력을 눈여겨보고 있던 FC 바르셀로나가 모든 치료비를 부담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메시는 FC 바르셀로나로 스카우트되었고 그렇게 전설이 시작된다.
 
2004-05 시즌 17세에 데뷔한 메시는 프리메라리가 최연소 선수, 최연소 리그 골을 기록한다. 그해 FC바르셀로나는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2006-07 시즌 메시는 신으로서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한다. 레알 마드리드와의 엘 클라시코에서 헤트트릭을 터뜨렸으며 리그 26경기 14골을 기록한다. 2008-09시즌 38골이라는 골 폭풍을 일으키며 바르샤의 트레블(프리메라리가, 국왕컵, UEFA챔피언스 리그 우승)달성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하지만 아직 배가 고픈 메시는 2009-10시즌 53경기 47골 14도움을 기록했으며 2012년 한해 동안 총 91골을 넣어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한다.
 
2008-09 시즌부터 2011-12 시즌까지 연속으로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2009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기염을 토한다. 두 상이 FIFA발롱도르로 통합된 후 2010, 2011, 2012 FIFA발롱도르를 수상해 4회 연속 수상이라는 축구사에 새로운 역사를 새긴다. 2014-15 시즌 또다시 트레블 우승을 이룬 메시는 UEFA 챔피언스리그 득점왕, UEFA 챔피언스리그 도움왕, 프리메라리가 도움왕을 차지했다. 57경기 58골의 엄청난 성적을 거둔 메시는 프리메라리가 최우수선수상, UEFA 유럽 최우수 선수상에 이어 FIFA발롱도르를 수상하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함께 FIFA발롱도르 5회 수상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운다. 축구 전문지 ‘월드 사커’가 뽑은 역대 베스트 11 중 현역 선수 중 유일하게 뽑혔다.
 
 
하지만 우승 트로피로 방 하나를 가득 채워도 모자란 메시에게도 아직 한으로 남아있는 부분이 국가대표이다. 메시의 아르헨티나는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로 늘 꼽히지만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메시가 본격적으로 아르헨티나를 이끌기 시작했던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독일에게 패해 8강에서 탈락했다.
 
절치부심한 메시에게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인 남미에서 열리는 월드컵은 우승의 호기였다. 메시는 국대에서는 클럽에서의 활약을 보이지 못한다는 그동안의 비난을 눈부신 활약으로 종식시키며 조국 아르헨티나를 결승에 진출 시킨다. 결승전 상대는 전차군단 독일이었다. 초반 아르헨티나가 경기를 주도하지만 8강전에서 부상으로 아웃된 디 마리아의 공백과 골 결정력 부족이 발목을 잡는다. 3번의 완벽한 기회를 날린 곤살로 이과인 활약(?)과 더불어 메시 역시 그 답지 않게 골키퍼와의 일대일 기회를 날리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만다. 결국 독일의 요아힘 뢰브 감독의 번뜩이는 용병술에 의해 교체로 들어온 마리오 괴체가 결승골을 작렬하게 되고 아르헨티나는 또다시 독일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메시는 7경기 4골 1도움을 기록하며 대회 최우수 선수에게 수여하는 골든볼을 수상한다. 물론 시상대 위의 메시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그 후 국가대표 은퇴 선언으로 아르헨티나를 충격에 빠뜨렸으나 팬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은퇴를 번복한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지역 예선 아르헨티나는 최종전 결과에 따라 러시아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다.
 
마지막 경기는 에콰도르 원정이었다. 에콰도르의 홈구장은 고산지대에 위치해 원정팀의 무덤으로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았고 아르헨티나 역시 18년 동안 에콰도르 원정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아르헨티나는 1분 만에 에콰도르에 선제골을 내준다. 원정팀의 무덤에서 선제골을 얻어맞은 아르헨티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는 메시가 있었다. 메시는 전반 12분과 20분에 골을 넣으며 역전에 성공한다. 그리고 후반 17분 수비수 세 명을 제치는 신기에 가까운 플레이를 보이며 해트트릭을 달성한다. 아르헨티나는 조 3위로 본선 진출에 성공했고 메시는 조국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
 
축구의 신으로 불리는 메시지만 A팀 우승 경험이 없다는 사실은 메시의 완벽한 커리어에 유일한 흠으로 남아있으며 아르헨티나의 레전드 디에고 마라도나를 넘어서 아르헨티나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과연 러시아 월드컵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려 유일하게 비어있는 커리어의 한 부분을 채울 수 있을지 주목되는 바이다.
 
“메시는 인간이 아니다. 거짓말이 아니고 사실이다.
볼과 함께 그러한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를 본 적이 없다. 
대를 완전히 무력화 시킨다. 그것도 정말 쉽게 말이다.” 
- 티에리 앙리
 
“가장 가지고 싶은 것? 메시의 왼발”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메시에게는 그 어떤 전술도 소용없다. 메시는 메시다” – 펩 과르디올라
 
현재 메시는 통산 616골을 기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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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파 온라인 4에서의 리오넬 메시

 
 
피파 온라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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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신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한 빈민가 놀이터에서 혼자 흙장난을 하던 소년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축구공 하나가 그 소년 앞으로 날아왔고 소년은 그 축구공에 매료된다. 포르투갈의 작은 섬마을에서 전설은 그렇게 우연히 시작되고 있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두스 산투스 아베이루(Cristiano Ronaldo dos Santos Aveiro)는 1985년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포르투갈에서도 가장 가난한 작은 섬마을이었고 형 누나들과 한방에서 지낼 정도로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낸다. 호날두의 가정환경은 좋지 못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형은 마약 중독자였다. 결국 모든 생계는 청소부였던 어머니가 책임질 수밖에 없었고 하루하루 버티며 고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축구를 너무도 사랑했던 아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없는 형편에도 호날두가 축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으며 마침 아마추어 구단인 안도리냐에서 장비 관리자로 근무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축구 선수로서의 꿈을 키워간다.
 
비록 제대로 못 먹어 비쩍 말랐지만 호날두는 또래에 비해 발군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2세에 포르투갈 명문 스포르팅 리스본에 영입된다. 홀로 리스본으로 상경한 호날두는 그러나 산투 안투니우 특유의 억양과 말투로 인해 친구들에게 놀림당하기 일쑤였고 매일 눈물을 흘릴 정도로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 호날두에게 축구는 힘든 생활을 이겨낼 수 있는 돌파구였다. 엄청난 노력으로 14세에 이미 준 프로 무대에서 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호날두에게 시련의 시간이 찾아왔다. 빠른맥(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는 증상)이 발견되어 수술을 하지 않으면 축구를 중단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이 나왔던 것이다. 온 가족이 호날두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다행히 무사히 수술을 마쳤고 호날두는 며칠 후 다시 훈련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무섭게 축구에 매진했다.
 
호날두는 16세에 스포르팅 1군에 콜업 되는데 U-16, U-17, U-18, 2군, 1군까지 단일 시즌에 모두 밟은 구단 최초의 선수가 된다. 2002년 모레이렌스와의 프리메라리가 데뷔전에서 2골을 넣어 강한 인상을 남긴 호날두는 2003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만난다. 당시 맨유의 감독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알렉스 퍼거슨이었다.
 
이스타이두 주제 안발라드 개장 경기로 열린 스포르팅과 맨유의 경기에서 호날두는 맹활약을 하며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물론 맨유의 선수들에게도 찬사를 받는다. 18세에 불과했던 어린 선수에게 퍼거슨 감독은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2003-04시즌 1,224만 파운드라는 당시 잉글랜드 축구 사상 청소년 선수로는 최고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호날두를 영입한다.
 
호날두는 맨유에서 7번을 받았다. 이는 조지 베스트, 에릭 칸토나, 데이비드 베컴과 같은 레전드 선수들이 달았던 번호였으며 당시 축구 변방이던 포르투갈에서 온 어린 소년에게 7번을 내어 준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호날두의 잠재력을 꿰뚫고 있었고 호날두는 그 기대에 200% 부응한다.
 
2003년 볼턴 원더러스와의 홈경기에 호날두는 역사적인 EPL 데뷔를 하게 된다. 그리고 데뷔전 맹활약으로 레전드 조지 베스트로부터 “논란의 여지없이 가장 흥미로운 데뷔전”이라는 찬사를 얻는다.
 
EPL에서의 호날두는 그야말로 경의로웠다. 데뷔 시즌 40경기 6골을 시작으로 2006-07시즌 리그 도움왕을 기록하며 맨유를 4년 만에 리그 정상으로 이끌었으며 선수 선정, 팬 선정, 올해의 신인 선수상,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PFA와 FWA가 주관한 4종류의 상을 모두 받는 최초의 선수가 된다. 2007-08시즌엔 42골을 작렬하며 EPL과 UEFA 챔피언스 리그 동시 득점왕이라는 금자탑을 세운다.
 
그는 맨유를 다시 한번 리그 정상에 올려놓았으며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우승해 더블을 기록한다. 2008년 조지 베스트 이후 EPL 선수로는 두 번째로 발롱도르 수상했으며 FIFA 올해의 선수는 EPL 선수로는 최초로 선정되어 EPL을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매김한다.
 
잉글랜드를 정복한 호날두는 2009년 8,000만 파운드라는 천문학적인 이적료를 기록하며 스페인 정벌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그곳엔 영원한 라이벌 리오넬 메시가 있었다.
 
갈락티코(은하수) 정책으로 별들이 은하수를 이루고 있던 레알 마드리드에서 호날두는 가장 빛나는 별 중의 별이었다. 그의 입단식이 열린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는 75,000명의 구름관중이 운집했다.
 
스페인에 입성하자마자 호날두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데뷔전 골과 함께 이후 리그 4경기 연속 골은 프리메라리가 새로운 기록이었다. 하지만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발목 부상을 당해 7주간 경기를 뛰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고 그 해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도 라이벌 메시에게 내준다. 시즌이 더해가면서 프리메라리가에 적응을 마친 호날두는 2010-11 시즌 라리가 34경기 40골 10도움으로 득점왕 리그 득점왕과 더불어 코파델레이에서도 7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라리가 평정에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특히 한 시즌 40골은 라리가 최초의 기록이었다.
 
2011-12 시즌 46골로 또 한번 기록을 경신하지만 이 기록은 50골이라는 전무후무한 골을 넣은 메시에 의해 깨지고 만다. 2013-14 시즌 호날두는 절정의 폼을 보여준다. 드리블, 스피드, 결정력 모두 완벽했다. 특히 가레스 베일, 카림 벤제마와 함께 지구 최강으로 불리는 BBC라인을 형성하면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31골로 라리가 득점왕에 오른다. 득점왕에 오르는 호성적에도 라리가 우승을 놓친 호날두는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특히 ‘챔피언스리그의 사나이’라는 닉네임처럼 한 시즌 최다골인 17골을 몰아넣으며 라 데시마(챔피언스리그 10회 우승)를 달성하는 대기록을 세우는데 크게 일조한다. 그리고 프랑크 리베리를 제치고 다시 한번 FIFA 발롱도르를 수상하게 된다.
 
잦은 부상과 세월의 흔적으로 예전 같은 폭발력은 나오지 않았으나 철저한 자기관리와 영리한 축구 센스로 자신의 포지션을 잘 찾아갔다. 그리고 역사적인 2016-17 시즌을 맞이하게 된다. 2016-17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5년 만에 라 리가 챔피언 자리를 탈환했으며, UEFA 챔피언스 리그도 우승해 ‘라 두오데시마(12번째를 의미)’를 달성한다. 호날두는 12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다시 한번 ‘챔피언스리그의 사나이’임을 증명했다. 이 밖에도 FIFA 클럽 월드컵 우승(득점왕), UEFA 슈퍼컵 우승을 이루며 레알 마드리드는 최고의 시즌을 보낸다.
 
▶ 챔피언스리그의 사나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호날두는 유로 2016의 우승으로 국가대표로서도 큰 족적을 남긴다. 초반 부진했던 호날두는 4강 웨일스전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살아난다. 그리고 이 골은 미셸 플라티니가 세웠던 유로 본선 최다골과 타이를 이루는 기록이었다. 호날두는 경기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었다.
 
프랑스와의 결승전. 그러나 호날두는 전반 7분 만에 부상으로 그라운드를 떠나게 된다. 팀의 에이스이자 정신적 기둥이었던 호날두의 부상으로 포르투갈은 암운이 드리워졌다. 호날두는 무릎이 틀어지는 심각한 부상에도 압박붕대를 감고 벤치에서 선수들을 독려했다. 특히 마지막 몇 분간은 페르난두 산투스 감독과 같이 서서 목이 터져라 선수들 향해 소리쳤고 이 장면은 경기 후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승부욕과 꼭 우승을 하고 싶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행동이었기에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결국 포르투갈은 유로 2016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호날두는 메시도 이루지 못한 국가대항 메이저 대회에 조국 포르투갈을 올려놓으며 자신의 커리어에 방점을 찍는다.
 
2017-18 시즌 후 이적이 유력하며 그의 행선지가 어디일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아르헨티나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 디에고 마라도나
 
“매년 스스로를 능가한다. 그것이 그가 전 세계 최고 중 한 명인 이유이다.”  – 리오넬 메시
 
“호날두와 함께라면 공격이 너무 쉽다. 
그에게 패스하고 나면 어느새인가 어시스트로 되어있다.” – 이스코
 
현재 호날두는 통산 654골을 기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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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파 온라인 4에서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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