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a Form
 
Detroit main.jpg

 

야만의 시대는 끝나고 문명의 시대가 도래했다. 무기와 힘으로 타인을 제압하는 일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고 모든 사람은 각자의 환경이나 조건에 관계 없이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우리는 성별이나 국적, 경제적 수준을 비롯해 그 어떤 것으로도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고 배운다. 그것이 고양있는 현대인이 갖춰야 할 미덕이다. 문명은 차별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21세기는 높은 고등교육 비율과 다양한 문화의 결합이 교차하는, 한 치의 의심도 필요없는 문명의 시대다. 모두가 차별 철폐에 공감한다. 인종차별은 범죄로 간주되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다. 사회 곳곳에서 평등이라는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정말 우리는 차별이 없는 시대를 사는 것일까. 어쩌면 이 두 작품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수도 있겠다.
 
영화 <디트로이트>와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제목처럼 디트로이트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을 쫓는다. 디트로이트는 미국 미시간 주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진 도시로 20세기 즈음 자동차 산업이 성장해 크게 부흥한 지역이다. 넓은 땅과 많은 일자리, 그리고 빠른 성장세. 다양한 사람이 모여들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춘 지역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품기 마련이다.
 
detroit_xlg.jpg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후 몇몇 영화관에 걸린 <디트로이트>에는 1967년 디트로이트에서 벌어진 한 사건의 전말이 담겨 있다. 감독인 캐서린 비글로우는 <허트 로커>, <제로 다크 서티> 등의 작품을 통해 화면 속에 현실을 담담하고 생생하게 담아내는 역량을 증명한 사람으로, 이번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실력을 발휘한다.

 
다소 조용히 개봉한 영화와 달리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제작 발표 당시부터 적잖은 관심을 받았던 타이틀이다. 개발사인 퀀틱드림은 <헤비 레인>, <비욘드: 투 소울즈> 등을 통해 플레이어블한 요소보다는 시나리오 구성에 중점을 맞추는 작품 세계를 정립한 바 있다. 한편으로는 걸어온 길은 다르지만 제작자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에 묘한 공통점이 엿보인다.
 
 
1967년의
디트로이트
 
미국 남북전쟁이 종료되고 흑인들은 노예제도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자유의 몸이 된 흑인들은 새 삶을 찾아 곳곳으로 흩어졌다. <디트로이트>는 그로부터 꼭 100년 후에 벌어진 디트로이트 폭동 사태를 조망한다.
 
흑인들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커뮤니티를 구축했지만 여전히 환영받지 못하는 ‘인종’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혹은 가질 수 있는 직업이 이를 증명한다. 디트로이트의 경제적 성장을 주도했던 포드 자동차 공장으로 출근하는 흑인 노동자, 백인으로 꽉꽉 들어찬 극장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흑인 가수, 그리고 밤에 가게를 지키는 흑인 경비원.
 
011407s001.jpg

 

야간에 불법 영업을 하는 클럽에서 파티를 벌이는 흑인들을 백인 경찰이 제압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미국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풍요로운 삶을 구호처럼 외치는 가운데 해당사항이 없었던 흑인들이 폭발한다. 말 뿐인 자유를 주고 주류 사회에서 유리시키는 것도 모자라 같은 잘못을 해도 백인보다 가혹한 처분을 받는 데 분노한다. 카메라는 팽팽한 긴장관계가 이어지는 디트로이트 폭동 현장을 빠르게 따라가다 도시 외곽의 알제 모텔에서 멈춘다. 그곳에는 거리 폭동을 피해 들어선 사람과 전쟁에서 막 돌아온 군인, 그리고 장난기로 가득한 친구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모두 흑인이다. 두 명의 백인 여자만 빼고.
 
10명 남짓한 사람이 모였지만 이들은 총을 든 백인 3명 앞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한다. 동족이 장난감 총을 쏘았다고 저격수로 의심받아 죽어가는 모습을 눈 앞에서 보고도. 디트로이트 백인 경찰에게는 흑인이 죽은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과잉 진압’으로 고소당하는 일을 피해보고자 알제 모텔의 흑인 투숙객들을 폭행하고 다그친다. 철저히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흑인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현장을 방문한 인권 단체마저 개입을 꺼리고 떠난다. 이유는 단순하다. 제압당하는 대상이 흑인이기 때문이다. 알제 모텔에서의 지옥같은 시간이 지난 후 살아남은 자들은 백인의 이해관계에 의해 용의자가 되고 도망자의 인생을 살도록 강요받는다. 꿈과 삶, 그리고 생명을 잃은 건 흑인들 뿐이다. 장난감 총을 쏜 죗값으로 말이다.
 
1527327516.6711.6.jpg

 

80722155358_727.jpg

 

 

디트로이트,
2036년
 
공장 연기와 거친 색감이 중심을 잡는 영화와 달리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꽤 산뜻하게 시작된다. 자동차 산업으로 성장한 도시답게 안드로이드 개발 및 생산의 선두주자인 ‘사이버라이프’사도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사이버라이프는 인간과 달리 늙지 않고 아픔도 없는 안드로이드를 만들어 집안일과 호스피스, 청소부, 유희용 등 ‘진짜’ 인간이 하기 꺼려하는 일을 수행하게 했다. 관자놀이의 LED를 의식하지 않으면 인간과 다를 바 없지만 인간들은 의도적으로 그들과 거리를 둔다. 안드로이드 전용 에스컬레이터나 버스 정류장을 보면 인간들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w8r5j7bbut7pa7e67uns.jpg

 

게임은 안드로이드 세 명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노쇠한 화가를 모시는 마커스, 마약중독자 아버지와 살아가는 소녀를 지키는 카라, 그리고 불량으로 판정된 안드로이드를 처리하는 교섭가 코너. 이들은 ‘불량품’ 안드로이드에 연루된 사건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당연히 안드로이드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고 일부 인간은 뒤틀린 감정을 폭력으로 표출한다.
 
안드로이드 세 명의 입장과 환경, 목표는 모두 다르지만 그들이 봉착하는 장애물은 항상 같다. 마커스가 변론의 권리를 부여받지 못하고 폐기된 것은 그가 안드로이드인 탓이고, 카라가 어린 소녀와 비를 잔뜩 맞고 들어선 편의점에서 도움을 받지 못한 이유도 그가 안드로이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다 보면 으레 서로에게 베풀게 되는 배려나 호의와 같은 따뜻한 감정들은 기대하기 어렵다. 태생이 인간이라면 대수롭지 않을 일들이 이들에게는 늘 커다란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다.
 
img_20180525103858_b8d32edf.jpg

 

2036년의 디트로이트 시민들은 그런 대우가 당연하다고 여긴다. 안드로이드는 인간이 아니며 그래도 되는 존재니까. 하지만 안드로이드는 정말 ‘그래도 되는’ 존재일까?
 
세 안드로이드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 질문은 디트로이트 시민이 아닌 플레이어 앞에 놓인다. 모두가 행복한 엔딩을 위해 ‘선의’일거라 느껴지는 선택지를 고르는 순간에도 플레이어는 그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비로소 한 가지 의문점을 발견하게 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나 자신조차도 이들이 안드로이드이기 때문에 힘든 선택을 강요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에.
 
 
평등이란
신기루를
지워내다
 
<디트로이트>와 <디트로이드: 비컴 휴먼>은 공간적 배경 외에도 ‘거대한 차별’이라는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경제 성장과 삶의 질 개선이라는 포장 이면에 외견 또는 태생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등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이들을 조명한다. 시대적 배경은 전혀 다르지만 차별의 양상은 소름끼치도록 유사하다. 기득권은 고통을 대리할 약자를 찾고 갖은 이유를 들어 정당한 차별 대우를 한다. 그 존재가 흑인이냐, 안드로이드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두 작품은 관객의 생각을 어느 한 쪽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최대한 담담하게 현상을 서술하며 허구 속에 본질을 담는다. 강자는 ‘악’이고 약자는 ‘선’이라는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차별 그 자체에 집중한다. 그리고 관객과 플레이어 스스로 차별이 생산되는 과정을 인식하게 만든다. 그 과정 속에서 신기루를 지워내고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 두 이야기의 힘이다. 문명의 시대 하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신기루를 걷어내면 근간에 도사리고 있는 차별의 모습이 선명히 보인다.
 
KakaoTalk_20180612_172346843 사본.jpg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을 시작하기 전, 안내 안드로이드는 플레이어에게 당부의 말을 전한다. 지금부터 경험하게 될 이야기는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이라고. 여러 의미가 담겨 있겠지만 ‘지금’이라는 표현에 방점을 찍는다면, 우리는 지금도 정당해 보이는 차별이 생산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경고가 아닐까.
 
두 작품은 과거와 미래의 이야기를 통해 그런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1967년부터 2037년까지 이어지는 차별의 연대기는 그 문제를 인식해야만 끊을 수 있으니 위장된 평등을 꿰뚫고 현실을 보라고. 영화 <디트로이트>의 래리가, 게임 <디트로이트>의 마커스가 그랬듯이.
 

KakaoTalk_20180612_172346708 사본.jpg

 



댓글 0
1 2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