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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섬의 비밀] 인트로.


한 시대를 찬란하게 꽃피우다 사라진 게임들이 있다. 지금은 거의 모습을 감추었지만, 20년 전만 해도 게임계 주류는 어드벤처 장르였다. 말 그대로 ‘모험’과 ‘탐험’을 내세운 어드벤처 게임들은 ‘액션’ 위주의 게임시장에 ‘스토리텔링’의 재미를 새롭게 열어 보였다. 어드벤처는 시뮬레이션처럼 무엇을 관리하거나 상대를 제압하는 경쟁 요소도 없고, 액션게임처럼 화려한 조작 기술도 필요 없다. 그렇다고 롤플레잉처럼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게임도 아니다.

어드벤처 게임은 오직 플레이어의 상상력과 논리력을 요구한다. 어려운 퍼즐 앞에서 몇 시간 동안 고민해야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 문제를 풀지 못하면 절대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없다. 그래서 어드벤처는 여러 게임장르 중 가장 지적이고 논리적인 장르다.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 재미가 있다면 바로 이야기다.

8~90년대는 어드벤처의 전성기였다. 그 중 최고의 걸작이라 평가 받는 작품은 단연 [원숭이 섬의 비밀]이다. 카리브 해의 해적들을 유머와 위트로 형상화 시킨 이 게임은 꿈과 낭만, 모험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 속에는 개성적인 캐릭터,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배꼽 잡는 유머, 그리고 현실에 대한 풍자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녹아 들어가 있다. 게임 엔딩을 보고 나면 좋은 영화 한편을 보고 난 듯 여운이 깊다. 주인공 ‘가이브러시’와 연인 ‘일레인’, 악당 ‘리척’은 게임보다 더 유명한 캐릭터로 유저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평범한 가정주부, 게임에 이야기를 불어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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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하우스] 게임 화면. [미스터리 하우스]는 최초의 그래픽 어드벤처게임으로, 어드벤처 장르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다.


“주방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수없이 많은 종이가 쌓이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써 내려갔죠. 뭔가 근사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걸 게임으로 만들었죠.”
- 시에라엔터테인먼트 창업자 로베르타 윌리암스

[원숭이 섬의 비밀]을 이야기하기 전, 먼저 당시 상황부터 설명해야 할 듯 싶다. 80년대 게임은 영화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100년 역사의 영화는 문화적 가치로 평가 받는데, 10년밖에 안된 게임은 아이들의 공부를 방해하는 사회악으로 인식됐다. 산업규모는 성장했지만, 그 이면에는 심각한 결핍이 있었다. 문제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없으니 감동이 없고, 감동이 없으니 꿈과 비전을 줄 수 없다. 말초적 재미를 위한 도구쯤으로 여겨졌다. 요즘도 한국에선 게임을 마약 취급하지 않는가.

희대의 졸작 [E.T]는 그런 열등감의 표출이다. 단순히 영화의 이름값에만 의지하려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변종이 되어버렸다. 영화의 감동을 담기에 게임의 이야기가 너무 부실했다. 아니, 당시 개발자들은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다. 실망한 사람들은 게임은 절대 영화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게임이 이야기를 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평범한 가정주부의 사소한 일상에서 그 역사가 만들어졌다. 어드벤처의 시작은 여기서 비롯됐다.

어드벤처의 어머니로 통하는 ‘로베르타 윌리암스’. 그는 원래 게임과는 전혀 상관없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가사 일을 하면서 짬짬이 이야기를 쓰는 취미를 가진 그녀는 문득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게임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그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운영하는 남편(켄 윌리엄스)의 도움을 받아 최초의 그래픽 어드벤처 게임 [미스테리 하우스]를 만들었다. 부인이 스토리를 쓰고, 남편은 프로그래밍을 했다. 개발부터 패키지 포장까지 부부가 손수 작업한 [미스테리 하우스]는 8만 장이 팔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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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퀘스트] 게임 화면. 시에라 어드벤처의 대표작으로, 동화 속 왕자와 공주의 전형적인 스토리를 담았다



본격적으로 게임을 만들기로 결심한 로베르타는 남편과 함께 게임회사 ‘시에라 엔터테인먼트’를 차렸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그녀는 3인칭 어드벤처 게임 [킹스퀘스트]를 만들었다. 백마 탄 왕자가 공주를 구하려 간다는 권선징악 스토리를 담은 [킹스퀘스트] 시리즈는 9편까지 출시되며 어드벤처 전성기를 열었다. 이외에도 시에라는 [가브리엘나이트], [폴리스퀘스트], [퀘스트포글로리], [레저슈트 레리] 등 주옥 같은 어드벤처 게임을 선보였다.

시에라는 80년대 게임시장을 온전히 이야기의 바다로 던져 넣었다. 때론 유쾌하고, 때론 무섭게, 살짝 얼굴을 붉힐만한 야한 농담들로 가득한 시에라 어드벤처는 당시 게이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리고 시에라의 라이벌 ‘루카스아츠’가 등장하면서 90년대 초 어드벤처의 양대 산맥이 형성했다. 시에라가 어드벤처의 씨앗을 심었다면, 루카츠아츠는 그 위에 찬란한 꽃을 피웠다. [원숭이섬의 비밀]은 어드벤처 게임이 꽃을 피웠던, 바로 그 정점에 만들어진 ‘명작 중의 명작’이다.


영화의 상상력과 게임의 상상력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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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섬의 비밀을 만든 론 길버트. 그는 “유머는 게임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출처: (CC)Ronald Woan at Wikipedia.org>


루카스아츠는 이름 그대로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가 만든 게임사다. 알다시피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시리즈를 만든 금세기 최고의 영화감독이다. 세계적인 감독이 된 그는 자신의 영화 속 상상력들을 게임으로 구현해 보고 싶었다. 영화 스타워즈의 ‘엑스윙’을 직접 몰아볼 수 있는 경험, 그가 꿈꾸는 상상력의 완결은 바로 게임이었던 것이다. 그는 루카스 사단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들로 구성해 게임그룹을 만들었다. 이것이 루카스아츠의 시작이다. 루카스아츠는 아타리에서 수백만 달러의 투자금을 받고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은 달랐다. 영화를 게임에 담으려는 노력은 얼마 안가 난관에 부딪혔다. 첫 작품 [레스큐 온 프랙탈러스(Rescue on Fractalus)]를 시작으로 [콜로니스 리프트], [PHM 패가수스], [스트라이크 프릿] 같은 게임이 나왔지만 반응은 썰렁했다. 앞서 아타리가 스필버그의 [E.T]를 어설픈 액션게임으로 만들다 실패하지 않았던가. 단순히 영화 속 그럴싸한 장면을 게임으로 재현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루카스아츠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됐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그들은 한 가지 결과에 도달했다. 영화의 상상력과 게임의 상상력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 어설프게 영화를 흉내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영화가 표현하지 못한 디테일을 게임에서 경험하길 원했다. 게임의 디테일을 갖추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이야기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영화든 게임이든 똑같은 감동을 준다.

루카스아츠는 이야기를 표현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장르를 고민했다. 지금까지 나왔던 액션/시뮬레이션 게임으로는 부족했다. 시에라의 게임들을 해본 그들은 어드벤처가 답이란 것을 알았다. 수석 개발자로 들어온 ‘론 길버트’는 어드벤처게임 개발에 회사의 역량을 쏟았다. 1987년 그들은 자체 개발한 스컴(SCUMM) 엔진을 도입해 첫 작품 [매니악 맨션]을 내놓는다. 루카스아츠 어드벤처 게임의 찬란한 시대가 이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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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아츠의 첫 어드벤처게임 [매니악맨션], 게임 속 기괴한 상상력은 [원숭이섬] 시리즈에 많은 영향을 준다.



‘인디아나 존스’도 피해가지 못한 게임의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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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은 영화와 게임 모두 성공을 거두며 원 소스 멀티유즈의 성공적인 사례를 남겼다.


[매니악 맨션]은 루카스아츠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게임이다. 게임의 엉뚱하고 기발한 유머는 이후 [원숭이섬의 비밀]로 계승되어 더욱 빛을 발한다. 흥행에도 성공한 [매니악 맨션]은 루카스아츠의 선택에 자신감을 붙였다. 그러던 중 급한 프로젝트가 떨어졌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디아나존스: 최후의 성전]을 게임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80년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인기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초대형 히트작을 게임으로 만든다는 건 보통 부담이 아니었다. 잘해도 본전, 잘못하면 쪽박이다. [E.T] 하나로 아타리가 망가지지 않았는가. 게다가 영화 개봉시기에 맞추려면 개발기간이 채 5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 경영진들은 그냥 영화 시나리오대로 게임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개발자들은 영화를 그대로 따라 만들지 않았다. 영화는 영화고, 게임은 게임이다. 천하의 [인디아나 존스]도 원칙에서 예외일 순 없다. 개발자들은 경영진과 수없이 토론한 끝에 영화와 다르게 만들자는데 합의했다. 그래서 원작 영화와 같은 엔딩에 또 다른 엔딩을 추가했다. 영화를 본 사람들도 게임을 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접할 수 있다.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은 영화와 게임 모두 성공을 거두며 원 소스 멀티유즈의 성공적인 사례를 남겼다. 스필버그 감독도 바뀐 게임내용에 만족했다고 한다.

루카스아츠는 회사의 모든 노하우를 집약한 [원숭이섬의 비밀]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이 게임이 나오면서부터 게임은 영화에 대한 열등감을 털어낼 수 있었다. 게임의 오리지널 스토리가 영화의 그것을 능가하게 된 것이다.


유쾌한 해적들의 수다! 어드벤처 전성기를 열다
1990년, 사람들은 [원숭이섬의 비밀] 패키지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5.25인치 플로피디스크 9장이라는 엄청난 용량! 당시 하드디스크가 없는 XT급 컴퓨터에선 9장의 디스켓을 일일이 바꿔 끼워가며 플레이 해야 했다. 고맙게도 당시 불법복사가 횡횡 했던 국내에서 정식발매 된 게임이기도 하다.

오프닝이 시작되면 게임의 배경인 멜리섬이 보이고, 그 유명한 오프닝 곡이 깔린다. 중독성 강한 이 멜로디는 지금도 수많은 마니아들이 UCC로 리메이크해 연주하고 있다.

 

[원숭이섬의 비밀] 오프닝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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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드벤처 최고 전성기를 수놓은 [원숭이섬의 비밀 1] 게임 화면.



오프닝이 끝나고 주인공 ‘가이브러시 스립우드’가 해적들의 섬에 도착하면서 게임이 시작된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이 오직 입만 살아있는 그는 해적이 되기 위한 3가지 시험을 통과하고 유령해적 리척에 맞서 여자친구 일레인을 구해야 한다. 1편부터 선보인 특유의 감각적인 유머는 어드벤처 게임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이 게임의 유머는 주인공과 해적들의 욕 싸움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욕 싸움이라 해서 상스러운 육두문자가 나오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말을 얼마나 재치 있게 받아 치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리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해적이 “다가오기만 해도 사람들은 내 발 밑에 쓰러지지!”라고 위협하면 “네 입 냄새를 맡고?”라고 받아 쳐야 한다. 이렇듯 주인공은 해적들과 대결할 때 칼이 아닌 입으로 상대방을 ‘멘붕’시켜야 한다. 이때 나오는 대사들이 플레이어의 배꼽을 잡게 한다. 루카스아츠의 전매특허인 비아냥거리는 촌철살인의 유머가 처음 선보인다.

1991년 발매된 [원숭이섬2]는 ‘리척의 복수’라는 부제를 달고 나왔다. 2편에선 해적이 된 가이브러시가 빅 우프라는 보물을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내용이다. 전작에서 죽은 줄 알았던 리척이 가이브러시에게 복수를 다짐하면서 코믹한 대결이 시작된다. 256컬러를 지원해 전작보다 더 화려한 그래픽을 보여주었다. 화면 구성을 간소화해 플레이하기가 훨씬 더 수월해 졌고, 특유의 유머는 더욱 업그레이드 됐다. 전작에서 욕 싸움이 최고장면이었다면, 2편에선 침 뱉기 대회가 단연 압권이다. 엔딩에선 깜짝 놀랄 반전까지 준비되어 있어 시리즈 중 최고의 작품이라 평가 받고 있다.

[원숭이섬의 비밀2]의 명장면 해골댄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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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섬의 비밀2]의 침뱉기 대회 게임 화면. 내용상 최고의 시리즈로 평가 받고 있다.



그래픽의 발전, 위트를 넘어 사회 풍자까지
3편은 전작에서 6년이 지난 1997년 발매됐다. 3편부터는 [원숭이섬] 시리즈의 창시자인 론 길버트가 제작에서 빠지고 다른 개발진들이 만들었다. 그래서 전작과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는다(2편 엔딩의 반전이 워낙 논란이 많아서 제작자 입장에서 수습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CD게임으로 나온 [원숭이섬3]은 등장인물의 대사를 모두 음성으로 더빙했고, 게임 내 모든 배경을 손으로 직접 그려 한편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하다.

어설픈 해적 가이브러시는 여친 일레인과 약혼을 한다. 약혼선물로 리척에게서 빼앗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주지만 반지의 저주로 일레인이 황금동상이 되어버린다. 저주를 풀기 위해 가이브러시는 또 다시 모험을 떠난다. 1편의 욕 싸움, 2편의 침 뱉기가 있다면, 3편에선 기타연주 대결이 최고의 명장면이다. 현대적 감각에 맞춰 칼 대신 기타로 대결을 해야 한다. 기타대결을 펼치는 상대 해적이 세계적 기타리스트 ‘산타나’와 비슷하게 생겨 웃음을 준다.

[원숭이섬] 시리즈 3편의 명장면 기타연주 대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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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섬의 비밀3] 몽키컴뱃 게임 화면. 게임 그래픽을 실제 애니메이션처럼 수작업을 통해 완성했다.



2000년에 발매된 [원숭이섬 4]는 시리즈 최초로 3D 그래픽을 사용해 더욱 화려한 영상을 연출했다. 가이브러시와 일레인이 신혼여행을 떠난 사이 리척과 그의 하수인들이 섬을 점령하고 일레인을 총독에서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민다. 가이브러시와 일레인 부부는 함께 힘을 모아 리척의 음모를 또 분쇄한다. 4편의 가장 큰 변화는 게임조작이다. 마우스 조작방식이 키보드 조작으로 바뀌어 기존 시리즈의 팬들에게 다소 혼란을 주었다. 그래픽은 좋아졌지만 내용면에서 전작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게임에 나오는 퍼즐이나 스토리가 전작에 비해 엉성했다. 대전게임 방식의 몽키컴뱃 등 위트 있는 장면들이 있지만 욕 싸움, 침 뱉기 같은 기상천외한 연출들에 비해 이팩트가 덜하다. [원숭이섬] 3편과 4편은 국내에서 정식 한글화되어 출시됐다.

[원숭이섬] 시리즈 4편의 오프닝 영상

2009년엔 틸테일게임즈에서 시리즈 5편 격인 [원숭이섬 이야기(Tales of Monkey Island)]를 출시했지만 루카스아츠 작품이 아니라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최근엔 원숭이섬 1, 2편을 현대적 그래픽으로 리메이크한 스페셜 버전이 출시되어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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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섬의 비밀4] 게임 화면. 시리즈 최초로 3D 그래픽을 사용했다, 전작들이 워낙 훌륭해 그 빛에 가린 작품.



고전적 배경의 현대적 캐릭터

“게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가이브러시와 상인 스탄이 대화하는 부분입니다. 스탄이 가이브러시에게 배를 팔면서 온갖 추가옵션을 함께 팔려 들지요. 마치 자동차 딜러들이 차를 팔 때 처럼요. 우리가 의도한 부분은 스탄이 플레이어를 귀찮게 만들어서 결국 짜증을 유발시키는 것이죠. 현실처럼 말이죠.”
-원숭이 섬의 비밀 개발자 론 길버트

[원숭이섬]은 배경은 고전적인 해적이야기지만, 그 속의 캐릭터들은 지극히 현대적이다. 주인공 커플부터 요즘 젊은이들의 애정관을 보여준다. 가이브러시는 싸움도 못하고 능력도 별로 없는 백수다. 볼 게 있다면 현란한 입담과 애인을 향한 넓은 아량(?)정도. 그에 비해 일레인은 아무리 봐도 주인공에게 아까운 여자다.

그녀는 성격도 까칠하고, 총독이라는 배경도 빵빵하다. 툭하면 소리를 지르고 애인에게 손찌검을 하는 다혈질 여성이다(시리즈마다 일레인에게 두들겨 맞는 가이브러시를 볼 때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해적두목 리척의 구애에도 망설임 없이 ‘꺼져!’라며 어퍼컷을 날리는 여자다.

기존 게임처럼 남자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청순가련형 공주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자기주관이 확실한 이 여자캐릭터는 게이머들에게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또한 빈털터리 백수 주제에 한 도시 총독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이브러시야 말로 이 시대 진정한 능력남의 표상이다. 시리즈 내용도 이들 연인의 닭살행각(?)에 따라 진행된다(특히 질투에 눈이 먼 리척 앞에서 닭살행각을 펼치는 장면은 지금 봐도 오글거린다). 1편에선 이들의 만남, 2편은 다툼, 3편은 약혼, 4편은 신혼여행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일레인을 짝사랑하는 리척은 이들의 애정행각을 방해하는 역할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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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섬의 비밀1]의 가이브러시와 일레인 모습. 총독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이브러시, 역시 능력남!



밉지 않은 독설가들, 그 속에 담긴 패러디
[원숭이섬] 시리즈는 곳곳에 재치 있는 패러디들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이렇다. 시리즈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2편 엔딩에서 악당 리척은 가이브러시에게 뜬금없이 ‘I'm your brother'이라고 말한다. 영화 스타워즈의 그 유명한 대사 'I'm your father'를 패러디 한 것이다.

이중적인 인간을 풍자하는 내용도 있다. 1편에서 장사꾼 스탠은 현란한 말솜씨로 주인공을 꾀어내 불량품 배를 판다. 하지만 3편에서 주인공은 그런 스탠을 속여 오히려 더 많은 돈을 뜯어낸다. 겉으로 똑똑한 척하는 스탠은 눈뜨고 주인공에게 당하는 어수룩한 인물로 나온다.

이밖에 어리숙한 정치인, 소심한 해적,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부자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루카스아츠는 자사의 다른 게임이나, 경쟁사 게임들까지 익살스럽게 패러디 해 놓았다. 심지어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한테도 비아냥거리는 유머를 쏟아낸다. 가령 플레이어가 주인공을 죽이려고 억지로 절벽에서 떨어뜨리려고 하면 “안녕, 사악한 어드벤처 게임이여!”라며 죽기를 거부한다. 폭력적인 플레이를 거부한다는 게임 특유의 센스다. 이런 유머와 위트가 거부감 없이 플레이어를 웃게 만든다는 점이 [원숭이섬]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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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섬의비밀5] 게임 화면. 루카스아츠가 아닌 틸테일게임즈에서 만들었다.



‘죽음’과 ‘섹스’ 없이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욕먹는 드라마일수록 시청률이 높다는 말이 있다. 요즘 일부 드라마들을 보면 자극적인 설정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막장드라마가 많다. 그럴 때마다 제작자는 ‘자극적인 내용이 아니면 사람들의 눈에 띄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핑계는 [원숭이 섬의 비밀] 앞에선 통하지 않는다.

[원숭이섬] 시리즈의 대단한 점은 자극적인 설정 없이도 얼마든지 흥미로운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게임은 등장인물이 죽거나, 야한 농담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지 않는다. 악당 리척도 절대 죽지 않고 시리즈마다 주인공을 졸졸(?) 따라다닌다. ‘죽음’과 ‘섹스' 없이 순수한 재미만으로 유저를 한없이 웃기고 감동시킨다.

루카스아츠 어드벤처는 영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쓴 어드벤처게임 [디그]를 [아마게돈]과 [딥임팩트]가 그대로 받았다(사실 스필버그는 시간 날 때마다 루카스아츠를 들려 개발자들과 신작게임을 즐기며 영화의 영감을 얻었다). 지구로 돌진하는 행성을 제거하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가 폭탄을 설치하는 설정이 게임과 비슷하다.

[원숭이 섬의 비밀]도 많은 부분 영화에 영감을 주었다.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의 등장인물을 보면 알 수 있다. 영화에서 허풍쟁이 해적으로 나오는 ‘잭 스패로우’는 가이브러시를 닮았고, 여주인공 ‘엘리자벳 스완’은 일레인과 느낌이 비슷하다. 유령해적 [바르보사]도 리척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영화에 대한 열등감으로 시작한 어드벤처게임은 영화를 능가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어드벤처의 제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소재의 빈곤에 시달린 어드벤처 게임은 점점 자극적인 설정으로 치닫다가 결국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어드벤처 장르는 황혼기를 맞았다. 이후 [롱기스트저니], [사이베리아] 같은 명작들이 명맥을 이었지만 이미 어드벤처 장르는 시대의 뒤안길로 물러난 후다. 황혼기 어드벤처 게임은 다음 기회에 따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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